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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당신을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80/118)

80. 당신을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202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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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819501195.jpg“폐하, 벨포르 공작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만…….”

16558819501195.jpg“쯧.”

시종장의 말에 왕이 불편한 듯 혀를 찼다. 그는 손에 들린 편지를 구기며 시종장에게 턱짓했다. 편지 또한 란델이 보내온 것이었다.

16558819501195.jpg“자리를 비웠다고 전하고 돌려보내라. 당분간은 계속 그렇게 전해.”

16558819501195.jpg“알겠습니다.”

시종장이 고개를 숙이고 알현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왕은 요즘 들어 머리가 계속 아프다는 생각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16558819501195.jpg‘성가신 놈. 출정하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는 전쟁인데도, 고작 회의 참석을 못했다는 걸 개처럼 물고 늘어지는군.’

왕은 심기 불편하게 알현실의 문을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그 문 너머에 있을 란델을 향한 시선이었다. 란델은 며칠 전부터 수도에 머물며 왕에게 계속해서 알현을 신청했다. 이번 출정 명령이 부당하다는 이유에서였다.

16558819501195.jpg‘설마 건방지게 이걸 빌미 삼아 나를 공격하려 드는 건 아니겠지?’

왕이 이를 뿌득 갈았다. 출정하기만 하면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전투에 선봉으로 세워준다는데, 감사할 줄을 알아야지. 그간 북부를 지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특혜는 다 받아 챙겼으면서 감히 의무를 거부해? 감히 짐을 거슬러? 그의 눈은 그런 지독한 강박과 의심에 찌들어 있었다. 현왕 에델 2세는 현재 다비드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왕위 계승권을 지닌 란델을 철저히 경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본래라면 왕관에 손조차 대지 못할 사람이었다. 선왕의 세 번째 자식으로 태어난 에델 2세의 위로는 그린 듯 완벽한 형과 누나가 있었다. 본래라면 첫째였던 형이 왕위를 물려받았어야 옳았다.

16558819501195.jpg-저 자리에는 내가 더 어울릴 텐데.

  하지만 에델 2세는 왕관이 탐이 났다. 그는 타고나길 누군가 제 위에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왕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르고 싶었다. 하여 겉으로는 사이좋게 지내던 형에게, 서부 이민족들의 짓인 양 꾸며 암살자를 보냈고. 형의 죽음에 슬퍼하던 누나의 물 잔에 무색무취의 독을 탔다.

16558819501195.jpg-미안하네, 형제들이여. 그러게 나보다 늦게 태어나지 그랬어. 그랬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그 누구보다 현명하고 다정했던 선왕은 잇따른 자식들의 죽음에 슬퍼하며 에델 2세를 의심했지만, 결국 이렇다 할 증거는 없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시름시름 앓던 선왕의 사후에 에델 2세는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왕관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본래라면 손에 쥐지 못했을 것을 억지로 빼앗았기 때문일까. 그는 언제나 제 것을 빼앗아 갈 자가 나타나지는 않을까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가 란델을 그토록 경계하는 이유도 이러한 비밀 때문이었다.

16558819501195.jpg-왕자님.

16558819501195.jpg-예, 숙부.

16558819501195.jpg-거기까지입니다.

16558819501195.jpg-…….

16558819501195.jpg-거기까지만 욕심내십시오. 더는, 아무것도 욕심내지 마십시오.

16558819501195.jpg-…….

16558819501195.jpg-그러면 저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왕국의 충실한 방패로 남겠습니다.

  선왕의 장례식에서 만난 전 벨포르 공작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말을 흘렸기에. 혹 란델 역시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지는 않으려나. 왕위 계승권을 가진 란델이 저와 다비드의 것을 빼앗으려 하지는 않으려나. 그러한 의심과 경계심에 사로잡힌 왕은 왕위에 오른 이후로 내내 전 벨포르 공작과 란델을 경계했다. 다른 이가 제 명령에 이처럼 반발했어도 상당히 언짢을 텐데. 하물며 란델이 이러하니 불쾌함은 배가 되었다.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두통이 그의 불쾌함에 한몫을 더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왕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긴 채 고개를 들었다.

16558819501195.jpg“무슨 일이냐.”

16558819501195.jpg“폐하. 플로레트 백작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16558819501195.jpg“들라 하라.”

왕은 란델이 아닌 플로레트 백작의 방문이라는 말을 듣고는 아까와 달리 출입을 허락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머리를 반듯하게 빗어 넘긴 플로레트 백작이 알현실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다가왔다. 왕의 앞에 멈춰선 그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16558819531677.jpg“폐하를 뵙습니다.”

16558819501195.jpg“어서 오게. 자네가 이곳까진 무슨 일인가?”

왕이 의아함을 담아 물었다. 평소 왕은 언제나 왕가에 정중한 플로레트 백작을 퍽 기껍게 여겼다. 하여 가끔 차나 한잔하자고 그를 불러도, 아카데미에 가 보아야 한다며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플로레트 백작은 그만큼 국무회의를 제외하고는 왕궁에 자주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귀족들 사이에서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그의 능력이었다. 그런 백작이 미리 약속조차 없이 이렇게 찾아올 줄이야.

16558819531677.jpg“폐하.”

왕이 인사를 받아주자 플로레트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왕은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본능적으로 흠칫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는 온화하고 깊던 금색 눈이 반쯤은 돌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후 백작의 입을 타고 나온 말 또한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적나라하고 발칙했다.

16558819531677.jpg“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벨포르 공작까지 제대로 참석한 국무회의를 열어, 이번 출정을 재고해 주십시오.”

16558819501195.jpg“……뭐?”

왕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가 아무리 플로레트 백작을 퍽 아낀다지만, 지금 그의 말은 흡사 왕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에델 2세는 아무리 아끼는 개라도 제게 기어오를 기미가 보이면 가차 없이 그 목을 비트는 성정이었다. 하지만 왕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 형형한 눈빛의 플로레트 백작이 한발 먼저 말을 이었다.

16558819531677.jpg“폐하. 저는 이 세상에서 가족이 가장 중요한, 편협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16558819501195.jpg“…….”

16558819531677.jpg“만약 이렇듯 섣불리 일을 진행했다가 제 딸과 사위가 비명횡사하기라도 하면,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플로래트 백작이 말끝에 날카로운 웃음을 흘렸다. 그는 조금 전 눈물자국이 점점이 남아 있는 편지를 한 통 받았다. <아버지, 저예요.> 그것은 실비아가 직접 적어내린 편지였다. 그녀는 란델이 이번 출정 명령 이후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국왕 폐하와 수도 귀족들을 만나러 뛰어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저 또한 걱정에 잠을 이룰 수 없다 구구절절 호소했다. <……아무리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나, 어디까지나 전쟁은 전쟁. 이렇듯 북부의 마음이 다른 이들과 하나가 되지 않은 상황에 전장으로 내몰렸다가 남편이 죽기라도 하면……. 아아, 저는 란델 없이 살 수 없어요, 아버지. 만에 하나라도 란델이 목숨을 잃는다면, 저 또한 기꺼이 그의 뒤를 따라갈 생각입니다.> 그 구절을 읽는 순간, 플로레트 백작의 이성은 저만치로 날아갔다. 그 또한 이번에 왕과 왕세자가 란델이 없는 국무회의에서 결정된 출정 명령을 내린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명령이 엘바레스 왕국을 위태롭게 만드는 일은 아니었으므로, 우선은 한발 물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하나뿐인 딸이 남편 걱정으로 실신할 지경이라는 말에 그의 이성과 침착함은 순식간에 증발했다. 왕은 그런 백작의 기에 눌려 호통을 치려던 것조차 잊고 움츠러들어 있었다. 플로레트 백작은 그 우스운 모습을 보며 다정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다정해서 더욱 소름이 돋는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16558819531677.jpg“저는 폐하께서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리라 믿습니다.”

16558819501195.jpg“…….”

16558819531677.jpg“아무렴, 서부 이민족들과의 회합이 곧인데, 그들이 유일하게 대화하는 상대인 제가 사라진다면 여러모로 곤란하시지 않겠습니까?”

16558819501195.jpg“네 이놈…….”

왕은 플로레트 백작의 말에 이를 뿌득 갈며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플로레트 백작은 지금 본인의 목숨을 걸고 왕을 협박하고 있었다. 왕은 서부 이민족들이 지닌 뛰어난 제약 기술을 탐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그들과 교섭하려 애썼는데, 그들은 오래전 자신들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플로레트 백작을 통해서가 아니면 교섭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행여 플로레트 백작이 자진이라도 한다면, 왕은 원하던 것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된다. 플로레트 백작은 말을 맺으며 왕 쪽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바로 했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흐트러진 매무새를 툭툭 가다듬은 그가 언제 위협적으로 굴었냐는 듯 정중한 신사의 모습으로 돌아와 인사했다.

16558819531677.jpg“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폐하. 오늘 안에는 답변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군요.”

  ***

16558819578353.jpg“……뭐? 회의를 다시 열고 출정일을 미루겠다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다비드는 왕궁으로 돌아오던 길에 왕이 출정일을 미루겠다 선포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트렸다. 그는 왕궁에 발을 들이자마자 곧장 알현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결국 플로레트 백작이 귀족들을 선동하고 다니기 전에 선수를 쳐 자비롭고 신중한 척하는 것을 택한 왕이 있었다. 왕명을 내린 후 뒤늦게 플로레트 백작의 만행에 분노하긴 했지만.

16558819501195.jpg“왔느냐.”

왕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다비드를 맞이했다. 다비드는 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 제 할 말부터 내뱉었다.

16558819578353.jpg“출정일을 미루겠다니, 이게 무슨 소립니까.”

16558819501195.jpg“플로레트 백작을 위시로 한 귀족들의 의견이었다. 어쩔 수 없었어. 그 얘기는 그만…….”

16558819578353.jpg“X발, 내가 그딴 변명이나 듣자고 여기에 온 줄 알아? 이게 멋대로 무슨 짓이냐고 묻잖아!”

쨍그랑! 다비드가 사납게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알현실에 놓여 있던 화병을 집어 던졌다. 그 행태에 왕이 경악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윽박질렀다.

16558819501195.jpg“네가 정녕 미쳤느냐? 이게 감히 무슨 짓……!”

16558819578353.jpg“버러지 같은 게 내 계획을 망쳐놓고, 어디서 ‘감히’라는 말을 입에 담아.”

16558819501195.jpg“윽……!”

다비드는 왕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턱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그에 말문이 막힌 왕이 눈을 부릅떴다. 다비드는 그의 코앞에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속눈썹끼리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다비드가 짓씹는 듯한 속삭임을 뱉었다.

16558819578353.jpg“잘 들어.”

보랏빛 눈 가운데 붉은 기운이 감돌자 왕의 눈이 조금씩 풀렸다. 다비드는 그에게 최면을 걸 듯 강한 어조로 속삭임을 이어갔다.

16558819578353.jpg“이번은 플로레트 백작, 그 작자가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미처 막을 시간이 없었다지만.”

16558819501195.jpg“…….”

16558819578353.jpg“다음에도 또, 겨우 그깟 놈의 기에 밀려 멋대로 내 일을 망쳤다간 네놈의 목부터 따버릴 줄 알아.”

다비드는 말을 마치며 왕의 턱을 거칠게 팽개쳤다. 쿵! 그 행동에 왕의 머리가 알현실의 의자에 세게 부딪쳤지만, 왕은 줄 끊어진 인형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비드는 분노로 숨을 몰아쉬며 한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손가락 틈으로 보이는 그의 눈에 잔혹한 빛이 깃들었다.

16558819578353.jpg“그래. 겨우 며칠쯤이야……. 자애롭게 기다려주지. 발악해봤자 어차피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 <아빠가 폐하께 강하게 말해두었다. 다행히 폐하를 뵌 그날, 곧 제대로 된 국무회의를 열고 출정일을 미루겠다고 선포하셨더구나. 그러니 언제나 몸조심하고, 남편을 따라…… 가겠다느니, 그런 말은 두 번 다시 하지 말거라. 알았느냐?> 실비아는 플로레트 백작의 편지를 받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6558819600689.jpg‘일단 시간은 벌었군.’

하지만 그조차도 여유로운 시간은 아니었다. 다음 국무회의는 열흘 후. 그때까지 평화주의 마족에 대한 자료나, 다비드가 어둠 벌레들과 결탁하여 인간을 이용하려 한다는 명확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전쟁은 막을 수 없다. 기어이 전쟁이 일어난다면, 선봉에 서야 하는 것은 란델이었다.

16558819600689.jpg“…….”

수심 어린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던 실비아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16558819501195.jpg“마님?”

16558819501195.jpg“그렇게 뛰다가 넘어지세요!”

사용인들은 급하게 1층까지 뛰어가는 실비아의 모습에 놀라 그녀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실비아의 귀에는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가다가 순간적으로 발목이 욱신거려 크게 휘청했다.

16558819600689.jpg“윽……!”

실비아는 몸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고통 대신 다가온 것은……. 풀썩-

1655881961877.jpg“실비아! 위험했잖습니까!”

익숙한 열기,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체향이었다. 2층으로 올라오다가 말고 급하게 실비아를 붙잡아 안은 란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실비아는 그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녀가 제 허리를 감싸 안은 란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애틋하게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아, 역시. 어쩔 수 없나.

16558819600689.jpg“보고 싶었어요, 란델.”

1655881961877.jpg“…….”

16558819600689.jpg“어서 와요.”

실비아는 물기 가득한 목소리를 흘리며 란델의 목을 껴안았다. 란델은 찰나 굳어 있다가 곧 말없이, 그녀를 힘 있게 마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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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비아는 란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결심했다. 금색 눈이 단단하게 빛났다.

16558819600689.jpg‘켈베티아로 가봐야겠어.’

이 사람을 지킬 수만 있다면. 나는 영원히 끓어오르는 지옥에도 기꺼이 발을 들이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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