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당신에게 나의 의미란2022.01.06.
이번 국무회의 전까지, 어떻게든 켈베티아에서 평화주의 마족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를 찾아오겠다. 그것이 실비아의 결심이었다. 란델과 북부 사람들을 애꿎은 전쟁으로 희생시킬 수는 없으니까. 평화주의 마족의 멱살을 잡고 비틀림을 넘는 한이 있더라도. 「란델.」 실비아는 란델의 이름 뒤로 온점을 찍은 채 망설였다. 그 바람에 종이 위로 잉크가 번져 란델의 이름까지 덮어버렸다. 실비아는 뒤늦게 한숨을 삼키며 종이를 구겨버렸다. 그렇게 구겨진 종이가 벌써 여럿이었다.
‘……그냥 당분간 다녀올 곳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는 말만 쓰면 되는데.’
고작 그 몇 마디 적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결국 그녀는 자못 삭막한 말들을 늘어놓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해야 했다. 「란델. 당신이 이 쪽지를 보고 있을 때쯤이면 나는 벨포르 성에 없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놀라거나 걱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저…… 잠시 다녀와야 할 곳이 생겨서 성을 떠난 것뿐이니까. 볼일만 마치면 곧장 당신 곁으로 돌아올게요. 늦어도 국무회의 전까지는 꼭 돌아올 테니까. 내가 없어도 잘 지내야 해요. -실비아 플로레트 벨포르」 실비아는 내가 이렇게 글을 못 썼던가, 하는 생각에 한숨을 푹 쉬고는 깃펜을 내려놓았다. 어쨌든 이것이 지금 그녀의 최선이었다. 쪽지를 반듯하게 두 번 접은 실비아가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델마가 방으로 들어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마님.”
“델마.”
“말씀하십시오.”
“내가 자네를 믿어도 되겠나?”
“……예?”
델마는 갑작스러운 물음에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실비아는 일부러 상대를 시험하듯 무감한 눈으로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그것이 만약 북부를 위협하는 일이 아니라면…….”
“…….”
“자네는 나를 위해서, 잠깐이나마 공작님을 속일 수 있겠나?”
“…….”
실비아의 물음에 델마가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눈과 얼굴에서 채 감추지 못한 혼란스러움이 묻어났다.
‘……사실 이렇듯 고민조차 하면 안 되는 일인데.’
델마는 속으로 자조했다. 이제는 실비아를 가까이서 보필하고 있다지만, 델마는 어디까지나 북부의 백성이었고 북부의 주인은 란델이었다. 그러니 란델을 속여야 한다는 저 말에 난색을 표해야함이 맞는데. 지금까지 실비아가 보여 왔던 모습을 떠올리니 차마 단호히 고개를 내저을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믿고 싶다.’
실비아가 북부에, 란델에게 해가 될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델마가 보아온 ‘실비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윽고 혼란을 지워낸 델마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명하십시오.”
“……뭐?”
실비아는 외려 델마의 답에 당황했다. 그녀가 미간을 설핏 좁히며 되물었다.
“나중에 란델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문책을 피할 수 없을 텐데. 어째서…….”
델마는 빙그레 웃었다. 정작 란델을 속일 수 있겠느냐 질문한 것은 실비아 본인이면서. 막상 이런 상황이 되자 델마의 안위부터 걱정하는 모습이, 그 다정함이 그녀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 또한 제 선택에 대한 책임이니까요.”
“…….”
“저는 저의 의지로, 마님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명령을 내리실 리가 없다고 믿기로 한 겁니다. 그러니 그 책임 또한 제가 지는 것이 마땅하지요.”
실비아는 자신을 믿겠다고 ‘선택’했다는 델마의 모습에 순간 말을 잃었다.
-죄송합니다, 알리사 님.
문득 첫 번째 삶에서 믿음을 얻지 못했던 것을 상기하니 쓸데없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실비아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또 반쯤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띠었다.
“……고맙네, 델마.”
* * * 실비아는 델마에게, 자신이 쓴 쪽지를 한 시간 뒤 란델에게 전해달라 부탁한 후 오스턴을 불러들였다. 오스턴은 그녀가 새로운 마법을 가르쳐주려는 줄 알고 신이 나서 달려왔다가, 그녀의 옷을 보고 멈칫했다.
“그 차림새는 뭡니까? 저희 혹시 실습이라도 나가나요?”
“……나는 자네가 이렇게 헛소리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적응이 안 되네.”
실비아가 조금 질린 눈으로 오스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갈색의 바지, 흰 셔츠를 걸치고 셔츠 위로 가죽 재질의 오픈 바스트 코르셋을 덧대어 상의가 펄럭이지 않게 고정한 차림이었다. 소파에 갈색의 긴 클로크까지 걸쳐져 있는 것을 보니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용병 같았다. 실비아는 장갑과 목이 긴 부츠까지 야무지게 착용하고 나서야 오스턴을 부른 용건을 꺼내 들었다.
“아무튼 내가 자네를 부른 건,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왕세자의 뒤를 캐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야.”
“……예?”
오스턴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정보들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는 귀를 타고 흘러 들어온 정보들을 이해하기 위해 제가 들은 말을 곱씹어보았다. 마님이 자리를 비운다. 마님이 왕세자의 뒷조사를 부탁했다. ……음? 뒤늦게 사고가 정상으로 돌아온 오스턴이 기겁하며 펄쩍 뛰었다.
“이렇게 갑자기요? 아니, 그보다, 대체 어딜 가시려는 건데요?”
“필요한 곳.”
“그러니까 그게 어딘데요!”
“다녀오면 말해줄게.”
목적지가 켈베티아라고 말하는 순간, 오스턴은 아무리 실비아가 마법에 능숙하다고 해도 미친 짓이라며 펄쩍 뛸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켈베티아로 이동하는 방법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설명하기에도 애매했으니, 대충 얼버무리는 편이 나았다. 다행히 오스턴은 실비아가 티 나게 말을 얼버무린다고 해도 계속해서 그녀를 추궁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실비아가 대답과 시선을 회피하자 오스턴은 답답함에 앓는 소리를 흘리며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이내 끙끙대던 것을 멈추고 체념한 그가 음울하게 되물었다.
“주군께서 아시면 난리가 날 겁니다.”
“델마에게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쪽지를 맡겨뒀으니 괜찮을 거야. 그보다.”
실비아는 오스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가 굳은 얼굴로 경고했다.
“왕세자는 감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야. 왕세자를 미행해서 그가 어둠 벌레들과 결탁한 증거를 찾되,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예, 예. 여부가 있겠…… 아니, 잠깐. 어둠 벌레와 결탁?”
“그럼 잘 부탁해. 시간이 없으니 자네도 바로 출발하고. 나중에 보지.”
“잠시만요! 마님!”
오스턴이 무어라 항의하며 실비아를 붙잡으려 했으나,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이 빨랐다. 흰빛이 반짝이며 시야가 뒤바뀌었다. 벨포르 영지 외곽에 있는 숲 입구에 선 실비아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
고개를 들자 오늘따라 유달리 음울해 보이는 숲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숲 안쪽에 절벽이 있었지.’
이곳은 일전에 벨라와 어둠 벌레 무리가 몸을 숨겼던 곳이었다. 행여 이동 마법진을 열었을 때 무고한 사람이나 짐승이 휘말릴까 싶어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인적이 없는 곳을 생각하니 이곳이 바로 떠올랐다. 벨라 무리가 사라진 이후에도, 사람들은 마족과 어둠벌레가 머물렀던 곳이라며 숲에 발을 들이는 것을 기피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이곳이라면 괜히 다른 사람의 눈에 띌 일도 없고 안전하겠지. 실비아는 클로크 자락을 한 번 더 여미고 숲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인기척 하나 없는 숲에 사박대는 발소리만 울렸다. 제 발소리가 저를 쫓는 듯 이상한 기분에 그녀는 괜스레 팔을 한번 쓸어내렸다. 이윽고 실비아는 숲의 가장 안쪽, 절벽 앞에 다다랐다.
“…….”
실비아는 손을 앞으로 올린 채 잠시 심호흡을 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손끝이 바르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탄식 같은 숨을 흘리며 자조했다.
“……이걸 내 손으로 다시 그리는 날이 올 줄이야.”
오랜 세월을 살면 뭐 하나. 그녀는 여전히 어리석은 인간이며, 이처럼 한 치 앞조차 보지 못하는데. 잠시 실소를 흘리던 실비아는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허공에 흰 선이 그어지고, 얽혔다. 손짓은 음악을 연주하는 것처럼 유려했다. 곧 선들이 하나의 형태를 이루어 빛나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원의 형태로 완성된 이동 마법진을 잠시 바라보았다. 심장이 조금씩 쿵쿵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이번에는 알리사였을 때처럼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밀어 넣어지는 것이 아닌,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머릿속으로 란델의 얼굴을 한번 그린 실비아가 결연히 눈을 떴다. 그리고 절벽 바깥으로 막 한 발을 떼는 찰나.
“실비아!”
숲을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과 동시에, 누군가 그녀의 팔을 휙 잡아챘다. 그 바람에 약간 휘청이며 반강제로 뒤를 돌아보게 된 실비아가 눈을 크게 떴다.
“……란델?”
실비아는 멍하니 란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녀의 등 뒤에 배경처럼 자리한 마법진이 주인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반영하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들켰다는 것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만큼 그녀의 시야에 담긴 란델의 얼굴은 충격적이었다. 실비아는 맹세코 란델의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건국제 때, 그녀에게 울며 고백하던 때조차도 저렇게까지 절망스러운 얼굴은 아니었다. 란델은 얼굴을 온통 엉망으로 일그러트린 채 울고 있었다. 그가 실비아를 붙든 손에 처음으로 강하게 힘을 주었다. 지독한 원망과 절망이 스민 눈으로, 란델이 실비아를 꿰뚫듯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실비아의 팔을 붙든 손에서 잔떨림이 느껴졌다. 그 말에 약간의 이성이나마 되찾은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
하지만 전에 없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설마 또 죽으려는 겁니까?”
쿵. 호흡이 그대로 멎었다. 심장이 그대로 정지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 란델이. 어떻게…….
“……나는.”
란델은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훤히 읽은 듯 자조적으로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나는 결국 당신에게 그 정도의 의미밖에 되지 않았던 겁니까?”
다비드가 갑작스레 벨포르 성을 방문했던 날. 란델은 성으로 돌아오던 길에 다비드가 실비아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홀로 날듯이 말을 몰아 성에 도착했다.
-실비아는?
-응접실에 계십니다. 주인님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찾아달라 말씀 전하셨습니다.
란델은 성 안에 발을 디디자마자 망토를 벗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응접실로 향했다.
-문이…….
그는 응접실 문이 조금 열려 있고, 그 안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모습을 보고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실비아가 저렇게 문을 엉성하게 닫아놓았을 리가 없는데. 혹 다비드가 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것일까?
-내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야. 나는…….
그때 방문 틈으로 실비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란델은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실비아가 왕세자에게 원래 저런 말투를 썼던가.
란델은 문득 떠오른 의문에 조금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다비드야 왕세자의 신분이기도 하고, 타고난 성격 자체가 글러 먹은 인간이니 늘 제멋대로인 말투를 썼다지만. 실비아는 늘 깍듯이,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를 사용했던 것 같은데.
-흠.
아무튼, 다행히 아직까지는 다비드가 실비아에게 별 무례를 저지르지 않은 듯했다. 별일이 있었다면 실비아가 마냥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와 그녀를 잠시라도 같은 방 안에 두는 것조차 불쾌했다. 실제로 다비드는 틈만 나면 실비아에게 집적대곤 했으니 합당한 반응이었다. 숨을 한번 들이켠 란델이 문고리로 손을 뻗는 순간.
-‘죽음’ 말인가?
그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이해할 수 없었다. 실비아가 죽음을 바란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말들이 그러한 믿음과 불신을 차근히 좀먹었다.
-그대가 애초에 벨포르 공작과의 결혼을 결심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 아닌가?
-켈베티아와 맞닿아 있는 땅이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는 최적의 땅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