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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그대가 언젠가는 나를 사랑하기를 (82/118)

82. 그대가 언젠가는 나를 사랑하기를202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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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819850745.jpg-그대가 애초에 벨포르 공작과의 결혼을 결심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 아닌가?

16558819850745.jpg-켈베티아와 맞닿아 있는 땅이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는 최적의 땅이로군.

  다비드의 말을 듣다가 보니, 기억 속에서 손끝의 거스러미처럼 느껴졌던 일들이 하나둘 되살아났다.

16558819850753.jpg-마, 마, 마물이다!

  결혼 후 북부에서 열렸던 첫 연회에서, 실비아가 주저 없이 루베아의 앞을 가로막았던 일.

16558819850757.jpg-저는 제 긍지를 지키겠습니다.

  글레버 후작의 반역 사건 때. 제프리와 함께 숲속 깊은 곳까지 걸어 들어왔던 일.

16558819850763.jpg-저 때문에 마물 토벌 일정에까지 지장을 드려 면목이 없습니다. 사과드려요.

  길에서 만난 마족 ‘벨라’를 서슴없이 따라나섰던 일.

16558819850763.jpg-혹시 잠들면 깨워줘요.

  실비아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눈에 담을 때마다, 어쩐지 금방이라도 그녀가 숨을 쉴 것 같지 않아 불안함을 느꼈던 일까지. 무의식 한구석에서 ‘이상하다’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준비된 것처럼 연쇄적으로 떠오르며 머릿속을 배회했다.

16558819850777.jpg-……만약.

  만약에 정말로……. 그 모든 일이, 실비아가 제 의지로 행한 행동이었다면? 애초에 그녀가 죽기 위해서, 그와의 결혼을 받아들였던 것이라면? 그녀에게 그는 그저…… ‘죽음’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인가? 실비아가 그에게 보여주었던 눈빛, 표정, 행동, 목소리마저.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연기였나?

16558819850777.jpg-욱.

  순간적으로 욕지기가 치밀었다. 갈 곳을 잃은 배신감과 절망감이 온몸을 휘저었다. 하지만 동시에, 란델은 그 모든 의심을 지워내고 싶었다. 그저 다비드의 터무니없는 헛소리라 치부하며 잊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다비드의 어깨 너머로 실비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16558819850763.jpg-……란델?

  란델은 그녀의 얼굴이 찰나 무너져 내리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16558819850763.jpg-언제…… 왔어요?

  실비아는 감추려고 노력한 것 같지만, 란델은 어느새 자그마한 숨소리만으로도 그녀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게 된 상태였다. 꼭 죄를 지은 사람처럼 초조하게 제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니 더 이상의 부정이 무색했다. 그것을 인정하니 외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혼란했던 머릿속에 한 가지 확신만이 남았다.

16558819850777.jpg-미안합니다. 막 도착해 문을 열려던 차에 왕세자 전하께서 나오시는 바람에 조금…… 놀라서.

  실비아가 아무 이유도 없이 저런 선택을 했을 리가 없다. 내가 아는 실비아 플로레트 벨포르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란델은 그렇게 되뇌며 필사적으로 자신을 다잡았다. 실비아의 눈에서 느껴지는 모든 애정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기다렸다. 도대체 왜 죽음을 바라는 것인지. 언젠가는 설명해주겠지. 언젠가는 나를 믿어주겠지. 언젠가는 나를……. 사랑해주겠지. 하지만 기다림의 대가는 처참했을 뿐이었다.

16558819850753.jpg-주인님?

  조금 전. 란델은 평소보다 일찍 성으로 돌아왔다. 그런 그를 본 델마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며 달려 나왔다. 란델은 본능적으로 그녀가 당황한 것이 단지 자신의 이른 귀가 때문이 아님을 눈치채고 그녀를 추궁했다. 결국 델마는 조금 전, 실비아에게서 꼭 한 시간 뒤 란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받았다는 쪽지를 꺼내놓았다. 「……내가 없어도 잘 지내야 해요. -실비아 플로레트 벨포르」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문구를 읽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실비아가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죽음’이니, 이렇듯 티 나게 죽음을 예고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란델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새도 없이 무작정 땅을 박찼다. 쾅!

16558819870245.jpg-아, 깜짝아!

  부부침실의 문을 여는 순간, 비명을 지르는 오스턴의 앞에서 미약하게나마 마력의 잔 흔들림이 느껴졌다. 마치 조금 전 누군가 이 방에서 이동마법을 통해 사라진 것처럼. 란델은 일전에 벨라를 체포하려 했던 그날 밤, 그녀를 도주시킨 것이 실비아라는 것을 비로소 확신했다.

16558819850777.jpg-어디로 갔나.

16558819870245.jpg-예? 그,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잘…….

16558819850777.jpg-실비아가 이동 마법으로 이동한 곳, 어디냐고 물었다. 설령 모른다고 해도 추적해.

16558819870245.jpg-주, 주군께서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란델은 오스턴이 실비아의 마법 실력에 대해 아는 기색을 내비치자 끝내 헛웃음을 흘렸다. 오스턴을 들볶아 실비아가 향한 곳을 알아내고, 그의 마법으로 숲 입구에 도착해서 실비아의 흔적을 쫓았다. 그렇게 그가 마주한 것은 절벽 너머로 발을 뻗는 실비아의 뒷모습이었다.

16558819850777.jpg-실비아!

  란델은 그 순간 처음으로, 진심으로 실비아에게 분노했다. 란델은 분노와 절망에 저며진 웃음을 띤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천천히 실비아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물린 그가 입을 열었다.

16558819850777.jpg“……불안했습니다.”

진실을 알게 된 이후로 매분, 매초. 실비아가 언제고 자신을 버리고 떠날까 두려웠다. 실비아가 진실을 이야기해주길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자신이 모르는 그녀의 모습이 늘어만 갔다. 몸을 섞고, 살을 맞대고, 입을 맞대면서도 불안감은 그림자처럼 사라지지 않고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16558819850777.jpg“하지만 당신이 말해주길 기다렸습니다. 나는 당신이 그 어떤 허무맹랑한 소리를 늘어놓는다고 해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란델은 처절한 울음을 토해내며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16558819850777.jpg“내가 그렇게나 못 미더웠습니까.”

16558819850763.jpg“…….”

16558819850777.jpg“내 사랑은 결국 당신에게 한 줌 믿을 가치도 없었던 거냐고요!”

란델은 끝내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거세게 고함쳤다. 그 울음 섞인 고함에, 내내 멍하던 실비아의 정신이 돌아왔다.

16558819850763.jpg“……아니에요.”

숨이 울듯이 가빠졌다. 실비아는 란델의 우는 모습에 심장이 천 갈래로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실비아는 가쁜 숨 사이로 필사적으로 말을 이으려 노력했다.

16558819850763.jpg“아니야. 나는 당신을 믿지 못한 게 아니라…….”

그저 내 추악한 모습을 당신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실비아가 뒷말을 꺼내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차였다. 쩌적- 돌연 땅이 울리더니 란델과 실비아가 서 있는 절벽 끄트머리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발밑의 땅에 붓으로 그은 듯 선명한 선이 생겨났다. 란델과 실비아의 시선이 약속한 것처럼 마주쳤다. 직후, 실비아가 서 있던 땅이 무너져 내리며 그녀의 몸이 휘청 뒤로 기울었다.

16558819850777.jpg“실비아!”

란델이 대경하며 손을 뻗었다. 그가 실비아의 손목을 붙잡으려는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던 마법진이 한순간 밝게 빛나더니, 두 사람의 몸을 함께 집어삼켰다. * * * 덜컹.

16558819887507.jpg“……!”

필리아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다가 마차의 흔들림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분명 조금 전, 마차에 탔을 때까지만 해도 아직 한낮이었던 것 같은데. 그 잠깐 사이에 세상이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16558819887507.jpg“아, 넋 놓고 있었네.”

작게 중얼거린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홀로 마차에 타고 있는 필리아는 평소보다 한껏 신경 쓴 차림새였다. 입고 있는 드레스는 새것이었고, 평소 그녀가 선호하는 ‘단순한’ 디자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기에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까지 빠지지 않고 착용해 몸이 무겁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16558819887507.jpg“피곤하다…….”

필리아는 마차의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상념을 지워내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외려 눈을 감자 오늘 있었던 일이 또다시 머릿속을 장악했다.

16558819887507.jpg-아빠. 저 림버트 영식과 약속을 잡아주세요.

  이틀 전. 벨포르 성에서 실비아를 만나고 온 이후, 제 방에 틀어박혀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필리아가 후작에게 찾아가 한 말이었다. 필리아는 놀란 얼굴의 후작에게 덤덤히 말했다.

16558819887507.jpg-엄마, 아빠 말씀이 맞아요. 제가 너무 이기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림버트 영식과 결혼을 전제로 만나볼게요.

16558819850753.jpg-……필리아, 정말 괜찮겠느냐.

16558819887507.jpg-……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어차피 처음부터 필리아 본인만 놓으면 끝날 관계였다. 더 정확히는, 진작 놓았어야 할 관계였다. 진작 놓았어야 할 관계를 필리아 홀로 미련과 죄책감 등의 감정을 이유로 붙잡았다. 그 행동이 제프리의 상처를 들쑤시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제야 비로소 하게 됐다.

16558819850753.jpg-처음 뵙겠습니다, 세이크린 영애. 오스몬드 림버트라고 합니다.

  그렇게 만나게 된 오스몬드 림버트는 미안할 정도로 좋은 청년이었다. 그는 약속 장소인 카페에서 먼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가 도착하자 일어서 정중히 인사하고는 의자를 빼주었다. 림버트는 필리아가 이 혼담을 불편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관련한 주제를 피하며 그저 그녀에 관해 물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녀는 어떤 사람인지. 그저 친한 친구를 대하는 듯 부담스럽지 않은 태도에 필리아 또한 경계심을 조금 풀고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오스몬드 림버트는 정말이지 그린 듯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불편했다. 그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16558819850753.jpg-저택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16558819887507.jpg-아, 아니에요. 그건 제가 좀…….

  카페에서 나온 후, 오스몬드가 건넨 말에 필리아는 반사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내 버리고는 아차 했다. 하지만 오스몬드는 무안한 기색 하나 없이,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16558819850753.jpg-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시길, 영애.

16558819887507.jpg‘좋은 사람이었지.’

주홍빛으로 물든 마을이 천천히 멀어지는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필리아는 감았던 눈을 떠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16558819887507.jpg‘……저런 사람과 살다 보면.’

나도 자연스럽게 저 사람을 좋아하게 되진 않을까. 애닳고, 안달하고, 불꽃처럼 타오르는 마음은 아닐지라도. 그저 곁에 있는 것이 익숙하고 편안한, 그런 마음으로 사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필리아는 마차의 창문 너머로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걷는 오스몬드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려 애썼다. 그러나 머릿속이 백지가 된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16558819887507.jpg“윽.”

필리아는 돌연 가슴이 답답해져 얼굴을 찡그리며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아무리 호흡을 가다듬어 보아도 숨이 꽉 막힌 듯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16558819887507.jpg“잠시만. 근처에 공원 없어?”

결국 필리아는 마차 벽을 두드리며 마부에게 근처 공원으로 목적지를 바꾸라고 명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멀지 않은 곳에 한적한 공원이 있었다. 마차에서 내려 땅을 디디고서야 숨 쉬는 것이 한결 편해졌다. 그러나 가슴이 갑갑한 감각은 여전했다.

16558819887507.jpg“여기서 기다려.”

16558819850753.jpg“하지만 아가씨, 곧 해도 질 텐데 혼자서…….”

16558819887507.jpg“괜찮아. 정말 금방 돌아올게.”

마부가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필리아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홀로 공원에 들어섰다. 공원을 거닐며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나서야 기이한 감각이 사라졌다.

16558819887507.jpg‘이제야 좀 낫네. 조금 추운 것 같기는 하지만…….’

약속을 위해 치장한 차림 그대로였던지라 조금 쌀쌀했다. 필리아는 무의식중에 손으로 팔을 쓰다듬으며 멍하니 걸음을 옮겼다. 그때.

1655881992578.jpg“필리아.”

나직하지만 또렷한 부름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필리아는 순간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음성에 제 귀를 의심했다.

16558819887507.jpg‘이 정도면 집착이네.’

짧게 자조하며 뒤를 돌아본 그녀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16558819887507.jpg“……제프리?”

환상이 아니라 실제였다. 그녀의 환상 속 제프리는 늘 웃는 얼굴이지만, 눈앞의 청년은 그저 담담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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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프리는 천천히 발을 움직여 필리아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앞에 멈춰 선 그가 조용히 그녀를 나무랐다.

16558819942262.jpg“이렇게 하녀도 없이 혼자서 다니면 어떻게 해.”

제프리는 고저 없이 말하고는 제 재킷을 벗어 필리아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멍하니 서 있던 필리아는 순간 가까워진 제프리의 향기와 체온에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볼 안쪽을 세게 짓씹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16558819887507.jpg‘안 돼.’

끊어내야 해. 이제는 정말로, 끊어내야 해. 필리아는 제 어깨에 걸쳐진 재킷을 세게 움켜쥐었다가, 그것을 벗어 제프리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은 표정 없이 서늘했다.

16558819887507.jpg“필요 없으니까 가져가.”

16558819942262.jpg“…….”

16558819887507.jpg“그리고 우연인지는 몰라도, 되도록 나한테 말 걸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결혼을 앞두고 다른 이성과 단둘이 있었다는 말이 돌아서 좋을 게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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