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 당신이 나 때문에 울 리가 없는데 (83/118)

83. 당신이 나 때문에 울 리가 없는데2022.01.13.

16558820008355.jpg“필요 없으니까 가져가.”

16558820008362.jpg“…….”

16558820008355.jpg“그리고 우연인지는 몰라도, 되도록 나한테 말 걸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결혼을 앞두고 다른 이성과 단둘이 있었다는 말이 돌아서 좋을 게 없으니까.”

필리아는 그 말을 뱉은 후 제프리의 얼굴을 확인하기가 두려워 그에게 재킷을 팍 떠안긴 후 몸을 돌렸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 그녀의 뒤로 곧장 발걸음이 따라붙었다.

16558820008362.jpg“필리아.”

당황이 묻어나는 그 부름에 우습게도 순간 눈물이 솟을 것 같았다.

16558820008355.jpg‘왜 이제 와서 저렇게 부르는 건데.’

필리아는 눈물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고 걷는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그녀를 뒤따르는 발걸음 소리도 빨라졌다. 조금 전보다 한층 커진 부름이 들렸다.

16558820008362.jpg“필리아!”

필리아는 도망치듯 속도를 높였다. 그녀가 공원 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때, 돌연 등 뒤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16558820008355.jpg“제프리?”

필리아는 조금 전까지 그를 피해 도망가던 것조차 잊고 놀라 뒤를 돌았다. 그녀를 쫓다가 넘어지기라도 한 듯, 땅에 주저앉은 제프리의 한쪽 무릎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16558820008355.jpg“미쳤어? 피 나잖아!”

필리아는 기겁해 달려갔다. 제프리의 앞에 풀썩 주저앉은 그녀가 제 속치마를 이로 찢어냈다. 그 탓에 새로 맞춘 드레스가 엉망이 되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필리아는 깨끗한 천으로 제프리의 상처를 눌러 지혈했다. 그녀는 시선을 상처에 고정한 채 울컥해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애써 냉정한 얼굴을 가장하며 말했다.

16558820008355.jpg“그러게 왜 따라온 거야.”

16558820008362.jpg“…….”

16558820008355.jpg“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

필리아는 상처의 피가 어느 정도 멎은 것 같자 손을 떼고, 새로이 찢어낸 천으로 그의 무릎을 동여맸다.

16558820008355.jpg“……이건 임시도 못 되니까 치료는 제대로 받아. 간다.”

딱딱한 말을 내뱉은 그녀는 뒤늦게 제프리와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래서 서둘러 몸을 일으켜 한 걸음을 떼려는 차, 제프리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제자리에 멈춰 서게 된 필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16558820008355.jpg‘확실히 해야 해.’

그녀는 표정을 가다듬고 제프리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얼굴을 눈에 담자마자 무너지려는 마음을 지탱하며 날 선 말을 쏟아냈다.

16558820008355.jpg“왜 잡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말할게. 앞으로는 우연으로라도 너와 마주치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

16558820008362.jpg“…….”

16558820008355.jpg“나도 더 이상 가망 없는 마음 곤란하게 밀어붙일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필리아는 그렇게 말한 후 제프리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그녀의 손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필리아가 얼굴을 왈칵 구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16558820008355.jpg“대체 왜 안 놓는…….”

하지만 직후. 툭- 검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바닥에 동그란 자국을 남겼다. 그 모습을 본 필리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16558820008355.jpg“왜, 왜 울어?”

그 물음에 제프리의 얼굴이 설핏 일그러졌다. 그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16558820008362.jpg“이젠 내가 싫어졌어……?”

그 표정, 목소리에 말문이 턱 막혔다. 당황으로 인해 잠시간 금붕어처럼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리던 필리아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16558820008355.jpg“그, 그렇다니까?”

16558820008362.jpg“왜?”

16558820008355.jpg“왜냐니……. 감정이 변하는 데 굳이 이유가 필요해?”

말을 이어갈수록 이성이 차츰 돌아왔다. 필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하자 끝내 제프리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16558820008362.jpg“……계속 좋아해주면 안 돼?”

16558820008355.jpg“……뭐?”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필리아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사이. 제프리는 그녀를 붙잡지 않은 손을 품에 넣더니 이내 작은 반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16558820036542.jpg-반지…… 살 수 있겠다.

  어릴 적, 진실을 알게 된 이후로 속상함에 엉엉 울며 팽개쳤던 반지. 그러나 끝내는 버리지 못하고 다시 품에 넣어야 했던, 그렇게 언제나 품에 지니고 다녀야 했던 반지. 어린 필리아의 손 크기에 맞춰 샀던 것이라, 기껏해야 엄지손톱 정도의 크기였다. 제프리는 그것을 필리아의 새끼손가락에 걸치듯 끼워주며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16558820008362.jpg“나 계속 좋아해주라…….”

165588200083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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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속인 네가 미운 동시에 사랑스러웠다. 나 같은 놈이 감히 너를 마음에 담아서는 안 된다고 되뇌었음에도. 어느새 내 마음을 전부 차지하고 앉은 너를 차마 내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끝내는 인정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너를 밀어내려 애쓰던 것은 전부 무의미한 발버둥에 불과했음을. 나는 너를 죽는다고 해도 놓을 수 없음을. 하지만 정작 필리아가 그를 놓으려 하니, 속에 담겨 있던 수많은 말들은 전부 두려움에 뒤엉켜 사라지고 볼썽사나운 애원만 입 밖으로 나올 뿐이었다.

16558820008355.jpg“…….”

필리아는 제 새끼손가락에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걸쳐진 반지를 보고 울 듯이 눈매를 찡그렸다. 그녀가 원망이 한가득 담긴 눈길로 제프리를 노려보았다. 마음을 접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가 괘씸해서.

16558820008355.jpg“너 진짜 못됐다.”

16558820008362.jpg“……미안해.”

16558820008355.jpg“……진짜 못돼 처먹었어, 알아?”

16558820008362.jpg“미안…….”

제프리는 필리아의 질책에 꼬박꼬박 사과를 뱉으면서도 그녀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결국 필리아는 헛웃음을 흘리고는 몸을 낮췄다. 제프리의 앞에 마주 쪼그리고 앉은 그녀가 그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16558820008355.jpg“다 큰 녀석이 무슨 떼를 써……. 그래도 귀여우니까 봐준다.”

작게 덧붙여진 뒷말에, 제프리가 끝내 소리 내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에 필리아는 픽 웃음을 흘리고는 제프리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의 등을 다정히 두드려주었다. 물론 울보인 것은 여전하다며 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16558820052691.jpg‘아, 또 이러네.’

오스턴은 멍하니 서 있다가 말고 또다시 불쑥 떠오르는 루베아의 얼굴에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실비아가 떠나기 전 내렸던 명령대로 다비드를 미행하는 중이었다. 다만 다비드는 아직 굉장히 규칙적인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귀족들을 만나 정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곧 있을 정벌을 위해 기사들을 훈련시키고, 그런 것들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오스턴 역시 어쩔 수 없이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졌는데, 그럴 때마다 루베아의 얼굴이 떠오르는 탓에 상당히 고역이었다. 조금 전에도, 대체 란델이 어떻게 실비아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인지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오스턴은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려다가 멈칫했다. 적갈색 눈이 다비드의 등을 흘긋 향했다. 오스턴은 실비아처럼 동시에 여러 가지 마법을 다룰 만한 능력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투명화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결국 소리가 날까 싶어 한숨만 삼키며 마른세수를 했다. 오스턴은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내기 위해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했다.

16558820052691.jpg‘역시 오래 자리를 비운다고 말하고 왔어야 했나…… 아니, 미친놈이야? 그걸 굳이 왜 말해?’

하지만 생각을 지우겠다고 마음먹은 지 일 분도 지나지 않아 루베아에게로 생각이 회귀했다. 오스턴은 제 뺨을 내리치려다가 다비드를 의식하고 애꿎은 허공에 주먹질을 해댔다. 그때 다비드가 몸을 일으켰다. 오스턴은 평소와 다른 그의 움직임에 움찔 긴장했다. 다비드는 창을 통해 주변이 어두워진 것을 확인하더니 긴 클로크를 뒤집어쓰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왕궁 쪽문에서 마찬가지로 긴 클로크를 뒤집어쓴 누군가와 합류한 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16558820052691.jpg‘……어딜 가는 거지?’

다비드의 규칙적인 동선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무언가 심상찮음을 감지한 오스턴이 미간을 설핏 찌푸리고 그 뒤를 쫓았다. 다비드와 그의 일행은 그림자를 밟으며 으슥한 거리로 향했다. 오스턴은 그들이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창문 너머를 흘긋 들여다보았다.

16558820052691.jpg‘비밀 통로인가?’

건물의 1층에는 희한하게도 책장뿐이었다. 다비드가 책장에 꽂힌 책 중 몇 개를 움직이자 책장이 옆으로 밀려나며 숨겨진 문이 드러났다. 두 사람은 그 안으로 향했다. 오스턴은 그들과 거리를 벌리기 위해 잠시 바깥에서 기다리다가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16558820052691.jpg‘두 번째 줄에서 열여섯 번째, 네 번째 줄에서 세 번째…….’

오스턴은 창밖으로 보았던 대로 책을 움직였다. 그러자 아까와 똑같이 새카만 사각형처럼 보이는 문이 드러났다. 그가 그 안으로 한 발을 들이는 순간. 파지직! 옆에서 뻗어나온 손이 오스턴의 멱살을 틀어쥠과 동시에 머리 위로 벼락이 쏟아졌다.

16558820052691.jpg“크아악!”

오스턴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제 멱살을 쥔 손을 움켜쥐었다. 품 안에 넣어둔 보호용 마법석들이 잇따라 깨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오스턴을 붙잡은 상대는 제 손까지 벼락에 지져지고 있음에도 손가락 끝조차 꼼짝하지 않았다.

1655882006756.jpg“뭔가 느낌이 이상하더라니, 진짜로 쥐새끼가 있을 줄이야.”

그때 낯익은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오스턴이 실핏줄 터진 눈을 부릅뜨며 옆을 돌아보았다. 문 옆의 어둠에 몸을 감추고 있던 다비드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등 뒤로 스태프를 쥔 왕궁 마법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마법사는 평소 다비드에게 충성하기로 유명한 이였다.

16558820052691.jpg‘무슨 짐승 새끼도 아니고.’

오스턴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그는 다비드가 평소 왕궁 마법사와 자주 동행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거리를 벌리고 그들을 따랐다. 그러니 상대가 오스턴의 마력을 눈치채고 이런 일을 벌였을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다비드는 오로지 본인의 ‘감’만으로 누군가 제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었다. 다비드는 제 손아귀에서 꿈틀대는 오스턴을 보고 짓궂은 아이처럼 입매를 비틀었다.

1655882006756.jpg“그럼 어디 얼굴이나 볼까.”

다비드가 오스턴을 붙잡고 있지 않은 손을 움직였다.

16558820052691.jpg‘젠장……!’

그가 복면과 후드 자락을 벗기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오스턴이 필사적으로 집중력을 긁어모아 마력을 움직였다.

1655882006756.jpg“……!”

다비드가 이변을 감지하고 왕궁 마법사에게 무어라 명령을 내리려던 차. 흰 빛이 반짝이고는 오스턴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이 사라졌다. 그는 그대로 땅바닥으로 고꾸라졌다.

16558820052691.jpg“쿨럭, 컥! 커헉!”

오스턴은 어딘지 모를 잔디밭 위에 얼굴을 박고서 고통스럽게 기침했다. 그가 기침할 때마다 잔디밭 위로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16558820052691.jpg‘어디지, 여긴?’

오스턴은 정신이 흐릿해져 가는 와중에도 주위를 살피려 애썼다. 다급한 마음에 벨포르 성의 좌표가 아닌, 북부 어딘가의 좌표로 이동해버렸다. 혹시라도 난감한 일이 벌어지면…….

16558820067585.jpg“도슬러 님?”

그때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스턴은 쓰러진 채로 힘겹게 고개만 들어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막 잠에 들려던 참이었는지, 얇은 네글리제 한 장을 걸친 루베아가 창백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16558820052691.jpg‘아, 이제 하다못해 이딴 변태 같은 상상까지 하냐…….’

오스턴은 루베아의 차림새를 확인하자마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는 자신의 추악한 욕망이 환상이 되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얇디얇은 네글리제 너머로 고스란히 비쳤던 루베아의 실루엣이 눈꺼풀에 들러붙은 듯 사라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오스턴이 속으로 마족을 물리치는 기도문을 중얼거리는데, 어째서인지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외려 가까워졌다.

16558820067585.jpg“이게 무슨……! 도슬러 님! 정신 차려 보세요! 집사!”

다급하게 달려온 루베아가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사용인을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오스턴은 가느스름하게나마 눈을 떴다. 희끄무레한 시야 너머로, 손을 덜덜 떨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루베아가 보였다.

16558820067585.jpg“도슬러 님.”

루베아는 오스턴이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는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보랏빛 눈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흘러내렸다. 오스턴은 끝내 헛웃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잇새로 넋 나간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정작 본인은 제 입술이 달싹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였다.

16558820052691.jpg“역시 환상은 환상이네…….”

16558820067585.jpg“……네?”

16558820052691.jpg“당신이…… 나 때문에 울 리가 없는데……. 꺼지라고 하는 거면 모를까.”

오스턴은 제가 말을 꺼내놓고도 그 사실이 우스웠는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비죽비죽 웃음을 흘렸다. 그 말에 루베아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원망으로 일그러졌다.

16558820067585.jpg“나쁜 새끼.”

16558820052691.jpg“어?”

16558820036542.jpg“주인님, 이게 무슨……!”

16558820036542.jpg“주, 주치의 선생님을 불러올게요!”

오스턴은 뜻밖의 말에 얼빠진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집사와 사용인들의 고함에 묻혀 사라졌다. 어라, 이거 정말…… 환상 맞나? 오스턴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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