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이번에는 내가 당신에게2022.01.17.
오스턴이 다시 눈을 뜬 것은 달빛조차 들지 않을 만큼 어둑한 밤이었다. 가물가물한 시야에 낯선 천장이 비쳤다. 의식이 깨어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통증이 그를 덮쳤다.
“윽…….”
미약한 신음을 흘린 오스턴이 습관적으로 상체를 일으키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직후,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로 풀썩 쓰러졌다. 전신이 누군가에게 흠씬 얻어맞은 듯한 통증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오스턴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그때, 그가 정신을 잃기 전의 일들이 뒤늦게나마 줄줄이 떠올랐다.
“아, 맞다! 그 개자식…… 아야야.”
오스턴은 저도 모르게 비명 같은 탄식을 내뱉으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가 몸을 앞으로 수그리고 고통을 참아냈다. 어느 정도 통증이 가신 후에야 그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내려 제 몸을 살피니 훤히 드러난 상체에 온통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치료……해준 건가? 누가…….’
-도슬러 님!
그 순간, 정신을 잃기 직전 보았던 루베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스턴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둑한 침실에는 주홍색 촛불만이 희미하게 아롱거리고 있었다.
‘……도망치자.’
적갈색 눈에 결연한 빛이 스쳤다. 오스턴은 방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벨포르 성으로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아직 몸이 회복이 덜 되어서인지 이동마법을 쓰기에는 마력이 다소 불안정했다. 그가 이 꼴을 루베아에게 보이기 전에, 기어서라도 글레버 백작저에서 탈출하려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리려던 차였다.
“누워 있는 게 좋을 텐데…….”
“우아아악!”
돌연 귓가를 파고드는 음산한 중얼거림에 오스턴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양팔로 제 가슴을 가렸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린 그는 소파에 앉아 머리카락을 얼굴 위로 뒤덮듯 늘어트리고 있는 루베아를 발견하고는 횡설수설했다.
“아, 아니. 이게 무슨……! 대체 언제부터 거기 계셨던…….”
‘젠장.’
말을 잇던 오스턴은 루베아가 그의 마지막 기억처럼 네글리제 차림이라는 걸 깨닫고는 곧장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런 상황에조차 저런 게 눈에 들어오다니, 나는 재활용조차 불가능한 쓰레기가 분명하다……. 오스턴이 속으로 자신을 향해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설을 지껄이는 사이.
“…….”
어쩐지 조금 상처받은 얼굴의 루베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켜 오스턴의 가까이 다가가더니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오스턴은 눈을 감고 있다가 침대가 가볍게 출렁이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눈을 뜰 뻔했다. 루베아는 그런 오스턴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조하며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예, 예?”
“갑자기 제집 정원에 나타나셔서는 피를 한 양동이 흘리고 기절하셨으니까요. 집주인으로서 이 정도는 물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 말에 오스턴이 뒤늦게 눈을 떴다. 그는 자꾸만 루베아에게로 돌아가려는 시선을 붙들며 고개를 내렸다. 아까는 루베아에게 들키기 전에 저택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없어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자세히 살펴보니, 상체 전부를 붕대가 뒤덮고 있긴 했지만 비릿한 피 냄새나 외상에서 마땅히 느껴져야 할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온몸이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뻐근하고 욱신거릴 뿐. 오스턴이 의아함에 얼굴을 찡그렸다.
‘어떻게 된 거지? 마님이 돌아오셨나? 시간상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이렇듯 순식간에 외상을 아물게 할 수 있는 건 치유마법뿐이다. 그러나 치유마법으로 자신을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현재 북부에는 오스턴을 제외한 마법사가 없었다. 그를 제외하고 북부에 머물던 유일한 마법사인 실비아가 떠나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스턴은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던 시간을 가늠해보다가 루베아에게 물음을 던지려 했다. 그러나 루베아는 한발 앞서 그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그 의문에 답했다.
“도슬러 님께서는 당장 외상을 치료해 출혈을 막지 않으면 과다 출혈로 목숨을 잃을 게 분명한 상황이셨어요. 그래서 돈은 원하는 만큼 줄 테니, 큐비드 백작가에 연락을 넣어 수도의 치유 마법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잠깐.”
오스턴은 루베아의 덤덤한 설명을 듣다가 문득 불안함에 그녀의 말을 멈춰 세웠다. 그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설마 하며 물었다.
“돈은 원하는 만큼 주겠다고 했다니…… 저를 치료한 마법사가 보수로 얼마를 요구했습니까?”
“출장비와 치료비로 30골드를 요구하길래 내어줬어요.”
“미치셨습니까?”
미처 막을 새도 없이 거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에 루베아의 보랏빛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나 오스턴은 자괴감과 분노로 인해 그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 개자식이……!’
오스턴은 얼굴도 모르는 마법사를 향해 이를 뿌득 갈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었고 거리가 거리라지만 30골드라니. 치유마법 한 번 써준 대가치고는 지나치게 과한 금액이었다. 돈을 밝히기로 정평이 난 오스턴조차 출장, 치유마법에 대한 보수로 5골드를 넘게 요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제 막 글레버 백작으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루베아가, 고작 그 하나 때문에 그런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분노는 지나치게 높은 금액을 부른 그 마법사를 향한 것이었으나. 오스턴은 루베아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자괴감에 다소 날 선 어조의 말을 쏟아냈다.
“백작님 같은 분께서 30골드라는 금액이 터무니없이 과하다는 것을 모르시지는 않았겠죠. 대체 왜 그런 짓을 하신 겁니까?”
“…….”
“안 그래도 글레버 백작가는 가문의 내실과 입지를 다지는 데 온 힘을 다 해도 모자랄 상황인데, 왜 고작…….”
나 같은 것 때문에 당신이 이런 손해를 감수하냐. 그 뒷말은 미처 오스턴의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못했다. 툭-
“저 같은…… 어?”
격앙되어 말을 잇던 오스턴의 기세가 한순간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사그라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얼떨떨한 음성을 흘리며 눈을 크게 떴다. 루베아가, 울고 있었다. 내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오스턴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루베아의 눈에서 끝내 눈물이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녀는 오스턴이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는,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며 차게 실소했다.
“하…….”
“무, 뭐, 왜, 왜 우십니까?”
루베아의 눈물과 함께 오스턴의 심장 또한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스턴은 당황한 나머지 말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루베아의 젖은 얼굴로 손을 뻗다가 급하게 주먹을 말아 쥐며 손을 거두어들였다. 루베아는 스스로 눈물을 닦아내며 오스턴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눈물을 아무리 닦아내도 금세 새로운 물줄기가 볼을 가로질렀다. 결국 루베아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실성한 것처럼 웃었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도 그게 중요한가요?”
-역시 환상은 환상이네…….
-당신이…… 나 때문에 울 리가 없는데……. 꺼지라고 하는 거면 모를까.
오스턴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을 때. 루베아는 순간적으로 숨 쉬는 걸 잊었을 정도로 아득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전 글레버 후작이 반역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로 인해 글레버 후작가가 백작가로 강등되고, 백작으로서 처음 사람들 앞에 나섰을 때조차 이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루베아는 찰나 오스턴이 영영 눈을 뜨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그것이 어떤 마음인지 너무도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지는데. 정작 그 대상이 되는 오스턴은 저딴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것이 미치도록 분했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루베아의 잇새로 짓씹는 듯한 말이 새어 나왔다. 오스턴은 찰나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루베아는 그의 착각을 모조리 부수려는 듯 주먹을 말아 쥐고 그의 가슴팍을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의 눈에서 방울방울 흐르던 눈물이 한꺼번에 왈칵 터져 나왔다.
“나쁜 새끼, 깨어나자마자 한다는 말이 고작, 뭐? 미쳤냐고? 그게 지금 네가 할 소리야? 할 소리냐고!”
“저, 저기. 백작님?”
오스턴은 루베아의 눈물에 한 번,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두 번. 그리고 그녀의 주먹이 하나도 아프지 않다는 데에 세 번 놀라 넋 나간 얼굴을 했다.
‘아무리 외상이 아물었다지만 어떻게 이렇게…… 아무런 느낌도 없을 수가, 아니, 이게 아니라.’
오스턴은 퍼뜩 이성을 되찾고는 막무가내로 저를 때리는 루베아의 팔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우선은 진정을…….”
그는 루베아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그녀는 손을 마구 휘저으며 발버둥 쳤다. 그 바람에 오스턴의 몸이 휘청 기우는 찰나. 그녀가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댄 채 절규하듯 말을 토해냈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
“내가, 내가 얼마나, 무서웠, 는데…….”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들은 갈수록 흐느낌에 가까워졌다. 루베아는 결국 오스턴의 가슴팍에 안기듯이 기대어 오열하기 시작했다. 품 안의 여린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모든 감각을 고스란히 받아낸 오스턴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감각에 끝내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아.’
내가 정말 미쳤나 보다. 아슬아슬하게 늘어져 있던 이성의 끈이 툭,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오스턴은 루베아의 손목을 놓고, 대신 그녀의 등을 깊숙이 끌어안았다.
“……!”
양손까지 고스란히 오스턴의 품 안에 파묻힌 루베아가 눈물 젖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얇은 옷자락과 붕대만을 사이에 둔 몸이 틈 없이 밀착했다. 오스턴은 상체를 숙여 그녀를 감싸듯 끌어안고는 그녀의 등을 어색하게 토닥였다.
“미안……합니다.”
“…….”
“걱정해준 것도, 고맙고…….”
오스턴이 나직이 내뱉은 말에 잠시 멈춰 있던 루베아의 울음이 다시 터졌다. 그는 서럽게 우는 그녀의 머리를 소중히 쓰다듬었다. 그의 입에서 횡설수설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그만 울…… 아, 아니다. 더 때리고 싶으면 때려도 됩…….”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목소리는 무언가에 먹힌 것처럼 잦아들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물기 어린 마음이, 피부가 맞닿는 소리였다. * * *
-설마 또 죽으려는 겁니까?
아니야. 나는 그러려던 게 아니야.
-나는 결국 당신에게 그 정도의 의미밖에 되지 않았던 겁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당신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버렸는데.
-내가 그렇게나 못 미더웠습니까.
-내 사랑은 결국 당신에게 한 줌 믿을 가치도 없었던 거냐고요!
내가 믿지 못했던 건 당신이 아니라……. 반짝.
“……!”
어지럽던 머릿속은 눈꺼풀이 들리자마자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실비아는 의식을 차리자마자 튕기듯 상체를 일으켰다.
“란델?”
숨소리 같은 부름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실비아는 혼란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중 문득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해도, 달도 보이지 않는. 단지 피가 흐르듯 새빨갛기만 한 하늘이.
“아.”
그 순간 이성이 완전히 돌아왔다. 실비아는 붉은 하늘을 눈에 담으며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켈베티아.”
돌아왔구나, 다시 이곳으로.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이 켈베티아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의 얼굴에서 혈색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켈베티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란델과 다른 곳에 떨어지게 된 것 같은데…….
‘여기서는…… 마력을 다룰 수 없어.’
그보다 정확히는, 켈베티아에서는 마력이 극히 불안정했다. 숨 쉬듯 검기와 마법을 다루던 이마저도 한순간에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 법칙이 적용된 땅. 그것이 바로 켈베티아였다. 실비아는 이를 악물고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아직 주위에는 어떤 마물도, 마족도 보이지 않았다. 실비아는 곧장 어둠을 몸 주위로 둘러 인간의 향을 지웠다. 금빛 눈 한가운데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정면을 노려보았다.
‘조금만 기다려요, 란델.’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찾으러 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