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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이게 왜 여기 있지? (85/118)

85. 이게 왜 여기 있지?2022.01.20.

혼란스러울 만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은 소름 끼칠 만큼 명료했다.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리를 지배했다.

16558820313789.jpg‘란델을 찾아야 해.’

대마법사 칭호를 달았던 실비아조차 켈베티아에서는 제대로 된 마법을 쓸 수 없었다. 다행히 그녀에게는 마법 외에도 켈베티아에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어둠’이라는 힘이 있었지만, 란델에게는 그조차도 없다. 그가 뛰어난 실력의 기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검기도 없이 검 한 자루로 마물과 마족이 득시글한 이 땅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가 지닌 인간의 향은 끊임없이 마물과 마족들을 끌어들일 텐데. 그래서 실비아는 지금, 후드를 푹 눌러쓴 채 켈베티아 외곽 마을의 한 주점에 들어와 있었다. 란델은 인간의 향을 감출 방법이 달리 없는 만큼, 얼마 지나지 않아 마족들에게 발각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소식이 들려올 곳이 바로 주점이었고.

16558820313796.jpg“여기 맥주 한 잔 더!”

16558820313796.jpg“이봐, 시킨 지가 언제인데 음식이 아직도 안 나오는 거야?”

16558820313796.jpg“아이고, 죄송합니다! 지금 가져다드리겠습니다!”

16558820313796.jpg“똑바로 하란 말이야, 똑바로!”

술에 거나하게 취한 마족들로 가득한 주점 내부는 귀가 멀 것처럼 소란스러웠다. 실비아는 구석에서 술 한 잔을 앞에 놓은 채 마족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마족 둘이 술과 함께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16558820313796.jpg“이봐, 록틴. 요즘 들어 평화주의 파벌 녀석들이 죽거나 사라졌다는 말이 많이 들리는구먼.”

16558820313796.jpg“흥, 그게 뭐 어때서? 난 평화주의 파벌 놈들이 최근 들어 활개 치고 다니는 거 마음에 안 들었다고. 평화라는 건 결국 나약한 놈들이 대는 핑계일 뿐이잖아?”

눈썹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지닌, 록틴이라 불린 마족이 코웃음 치며 술을 벌컥 들이켰다. 그러자 그의 맞은편에 앉아 말을 꺼냈던 마족이 혀를 끌끌 차며 그의 손을 술잔으로 툭 쳤다.

16558820313796.jpg“그렇게 말하기엔 평화주의 파벌의 수장이 쉐르트 공작인데? 이블린 폐하 다음으로 강한 분이라고. 정 그렇게 불만이면 공작부터 없애고 오지 그래?”

16558820313796.jpg“젠장,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나 같은 하급 마족이 그런 놈을 어떻게 이겨?”

16558820313796.jpg“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이 새끼야.”

16558820313796.jpg“제기랄.”

록틴이 씩씩대며 이를 갈자 상대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 대화를 가만히 귀에 담던 실비아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조용히 미간을 좁혔다.

16558820313789.jpg‘이블린 폐하……라고?’

16558820313796.jpg-우리의 왕이신 베이나스를 위하여!

16558820313796.jpg-베이나스를 위하여!

  분명, 현 마왕의 이름은 ‘베이나스’일 텐데? 실비아는 국왕의 탄신연 때 어둠 벌레들이 외쳤던 말을 상기하고는 의문에 휩싸였다. 어둠 벌레들은 마족을 숭배한다. 그러니 따지고 보자면 그들의 왕은 인간의 왕이 아닌 마왕일 터인데.

16558820313789.jpg‘어둠 벌레들이 잘못 알고 있던 건가?’

실비아는 도통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의문에 집중하는 것보다 란델의 소식을 알아내는 것이 더 급했다. 실비아는 이후 눈에 띄지 않게 자리를 옮겨가며 마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으나, ‘인간’에 관한 화제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어둑한 창밖을 초조한 눈길로 응시했다.

16558820313789.jpg‘이미 시간이 꽤 흘렀는데.’

실비아와 란델이 켈베티아에 발을 들인 지도 벌써 반나절이 지났다. 그녀가 알리사였을 적, 켈베티아에 떨어진 지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물과 마족이 몰려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쯤은…….

16558820313789.jpg‘아냐, 생각하지 말자.’

실비아는 순간 저도 모르게 떠올린 핏빛 잔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란델이 아무리 제대로 된 검기를 다룰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그는 뛰어난 검사였다. 그러니 이렇듯, 아무런 소리 소문 없이 비명횡사했을 리는 없다. 분명 그럴…….

16558820313796.jpg“이 새끼가 진짜!”

우당탕! 그때, 주점 한가운데서 다른 소란을 모조리 덮을 만큼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깨를 흠칫 떤 실비아가 반사적으로 소음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술기운으로 얼굴이 벌게진 마족 둘이 서로의 멱살을 잡고 마구잡이로 고함을 치고 있었다.

16558820313796.jpg“뭐? 새끼라고 했냐, 지금?”

16558820313796.jpg“그럼 내가 처리한 놈의 전리품을 빼앗아가겠다는 놈한테 경칭이라도 붙여주랴?”

16558820313796.jpg“처리는 무슨! 내가 다 잡아놓은 놈에 마지막으로 검을 찔러 넣은 것뿐이면서!”

16558820313796.jpg“뭐가 어쩌고 어째?”

16558820313796.jpg“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서 해결하십시오, 나가서!”

두 마족은 험악한 기세로 몸싸움을 시작했다. 사장이 짜증스럽게 인상을 찌푸리며 외쳤지만 이미 흥분한 두 마족과 그 싸움을 관전하는 다른 마족들은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외려 싸움을 부추기느라 신이 나 있었지. 핑그르르- 한편, 두 마족이 싸움에 정신이 팔린 사이. 그들이 싸움을 벌이는 원흉으로 보이는 ‘전리품’이 바닥을 굴러 실비아의 발치까지 굴러왔다. 실비아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녀는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작은 물체를 눈에 담은 순간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숨을 멈추었다.

16558820313789.jpg‘……이게.’

이게 왜, 여기 있지? 실비아는 잠시간 멍하니 제 손바닥 위의 전리품을 내려다보았다. 포효하는 사자가 조각되어 있는 금장식. 그것은, 란델의 검을 장식하고 있던 벨포르 가문의 문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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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족들이 떠들어댔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과 동시에, 실비아의 신형이 튕기듯 움직였다. 곧장 바닥을 박찬 그녀가 막 주먹을 내지르려던 마족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너무도 가볍게 허공에 들리게 된 마족이 발을 버둥거렸다.

16558820313796.jpg“커헉, 컥! 젠장, 이 새끼는 뭐……!”

16558820313789.jpg“누굴 처리해?”

서늘한 음성이 귓가를 파고드는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주점 안의 공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마족들은 온몸을 꽁꽁 싸맨, 정체불명의 인영으로부터 느껴지는 흉흉함에 저도 모르게 손을 벌벌 떨었다. 마족, 록틴이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중얼거렸다.

16558820313796.jpg“뭐, 뭐야. 설마…… 상급 마족이라도 되는 거야……?”

그와 동시에, 실비아의 손에 붙잡힌 채 버둥거리던 마족이 후드 아래로 그녀의 얼굴을 스치듯 확인하고는 충격으로 눈을 부릅떴다. 마족과는 확연히 다른 희디흰 피부. 흰 눈자위.

16558820313796.jpg“이, 인간……?”

숨죽이고 있던 마족들이 그 말에 봇물 터지듯 웅성거렸다.

16558820313796.jpg“뭐?”

16558820313796.jpg“저게 무슨 헛소리야.”

16558820313796.jpg“인간이 켈베티아에 어떻게 들어온다는 거야?”

16558820313796.jpg“만약 저 말이 진짜라고 해도, 인간 따위가 어떻게 어둠을……?”

그러나 실비아는 그러한 웅성거림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행동했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하나에 쏠려 있었다. 실비아가 제 손에 들린 벨포르 가문의 문양을 내보이며 마족을 윽박질렀다.

16558820313789.jpg“이걸 누구한테서 빼앗았냐고!”

16558820313796.jpg“크윽! 다들 뭘…… 보고만 있는 거야! 인간이라고! 잡아!”

추하게 버둥거리던 마족은 뒤늦게 본능적인 공포와 경외에서 벗어나 눈에 핏발을 세우며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그 외침으로 대치가 깨어졌다. 마족들은 인간이라는 말에 너 나 할 것 없이 실비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16558820313796.jpg“죽어라!”

16558820313796.jpg“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인간을 잡아다 바치면 나도 중급 마족이 될 수 있겠지!”

16558820313796.jpg“젠장, 저리 가! 저건 내 거라고!”

마족들이 눈을 까뒤집고 실비아에게 어둠을 휘둘렀다. 주점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콰직!

16558820359155.jpg“으아악!”

쿵!

16558820313796.jpg“이, 인간이 어떻게……! 커헉!”

그러나 실비아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호기롭게 그녀에게 달려들었던 마족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판단이 남김없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16558820313796.jpg‘대체 이게 무슨……!’

록틴은 허공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검은 화살들을 피해 바닥을 굴렀다. 간발의 차를 두고 쏟아진 화살이 무자비하게 주점의 바닥과 마족들의 발목을 꿰뚫고 사라졌다. 그는 찰나 주점 안에 벌어진 참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상황에 맞지 않게 심장이 둥둥 울렸다.

16558820313796.jpg‘……압도적이다.’

마족은 그 어떤 종족보다 순수하게 힘을 숭상하고 그 힘을 따르는 종족. 록틴은 실비아의 주위로, 더 나아가 주점 전체를 뒤덮다시피 한 어둠에 전율을 느꼈다. 마치 전성기 때의 마왕 알리사가 저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길게 감탄할 새는 없었다.

16558820313796.jpg“……!”

록틴이 구석에서 실비아의 능력에 감탄하던 차. 시선을 느낀 실비아가 손에 쥐고 있던 마족의 옷깃을 팽개치며 그가 있는 쪽을 응시했다. 금빛 눈 한가운데에 자리한 붉은 광채가 섬뜩했다. 록틴은 본능적인 섬뜩함에 땅을 박찼다. 직후 그가 있던 자리에 검은 창이 퍽,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가 흩어졌다. 그는 공포인지 즐거움일지 모를 감정으로 입꼬리를 늘이며 어둠을 끌어 올렸다.

16558820313796.jpg‘하는 수 없지. 경쟁자를 더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된 이상……!’

콰앙! 굉음과 함께 주점의 벽이 부서졌다. 록틴은 실비아의 힘이 미치지 않는 아주 작은 틈으로 몸을 굴려 주점을 빠져나갔다. 그는 바깥으로 빠져나가자마자 마을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목소리로 외쳤다.

16558820313796.jpg“주점에 인간이 있다! 다들 이쪽으로 와! 중급 마족이 될 기회다!”

16558820313796.jpg“뭐?”

16558820313796.jpg“인간이라고?”

16558820313796.jpg“기회!”

처음에는 록틴의 말을 믿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리던 마족들은, ‘중급 마족이 될 기회’라는 말에 혹시나 하는 희망을 놓지 못하고 그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실비아는 창밖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마족들을 무표정하게 일별하고는 주점을 벗어났다. 록틴이 실비아가 사라진 방향을 손가락질하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16558820313796.jpg“쫓아라! 숲으로 갔다! 저 인간을 잡아 왕성에 가져가면 중급 마족이 될 수 있다!”

16558820313796.jpg“저리 비켜!”

16558820313796.jpg“내가 먼저야!”

16558820313796.jpg“사냥 시간이다! 다 나와!”

실비아는 몰려드는 마족들을 피해 숲으로 달려갔다. 어지간해서는 피하지 않고 맞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같이 권속을 불러내고 다른 마족을 끌어들여 그 수가 급격하게 불어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16558820313789.jpg‘이 몸으로는 안 돼.’

실비아는 숲 안쪽을 향해 달리며 힐긋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알리사였을 적에는 나름의 훈련과 전투로 인해 어느 정도 단련된 몸이었기에 밀려드는 마족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란델이 보양식을 들이붓듯 차려낸 것 때문에 예전보다는 건강해졌다고 한들 겨우 ‘건강’한 정도에 그쳤다. 그런 몸으로 마을 한가운데서 싸움을 이어갔다가는 끝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차라리 숲으로 도망가 따라오는 마족들만 저지하고 자취를 감출 생각이었다.

16558820313796.jpg“크아악!”

키이이익! 실비아는 숲 안쪽으로 파고드는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며 손을 휘둘렀다. 그녀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적어도 마물 셋, 마족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물론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마족들과의 평화협정을 위해서 켈베티아에 온 것인데, 섣불리 마물이나 마족들을 죽였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마족을 하나둘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이, 그녀의 몸에도 상처가 하나둘 늘어갔다. 누군가의 화살이 머리를 스친 탓에 눈 위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마족이 발전했다는 것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더불어 라폴드가 얼마나 허접한 마족이었는지도 다시금 깨닫게 되었지만.

16558820313789.jpg“…….”

그러다 보니 어느새 숲의 끝에 다다랐다. 실비아가 발을 멈추고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발밑은 까마득한 낭떠러지였다. 절벽 아래로 계곡물이 위협적으로 흐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16558820313796.jpg“잡았다!”

16558820313796.jpg“다들 안 비켜? 저 녀석을 처음으로 발견한 건 나라고!”

동족을 끌어들여 실비아를 막다른 곳까지 모는 데 성공한 록틴이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마족들을 밀어내고 가장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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