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 어떤 기억 (86/118)

86. 어떤 기억2022.01.24.

16558820455798.jpg

16558820455803.jpg“다들 안 비켜? 저 녀석을 처음으로 발견한 건 나라고!”

동족을 끌어들여 실비아를 막다른 곳까지 모는 데 성공한 록틴이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마족들을 헤치고 가장 앞에 섰다. 록틴은 입맛을 다시며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16558820455803.jpg‘흐흐, 그야말로 다 잡은 먹잇감이로군.’

저 인간을 잡아서 마왕성에 바치면, 공을 인정받아 중급 마족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코앞에 다가온 신분 상승의 꿈에 취해 아껴뒀던 권속을 모조리 불러냈다. 크르릉. 록틴은 하급 마족 중에서도 나름 강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이였다. 그는 자그마치 서른이나 되는 마물을 불러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16558820455803.jpg“이봐, 인간.”

16558820455818.jpg“…….”

16558820455803.jpg“네가 어떻게 어둠을 다룰 수 있게 되었는지, 어떻게 여기에 발을 들이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지금 상황은 네가 보기에도 살아나기는 요원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16558820455818.jpg“…….”

16558820455803.jpg“그러니 순순히 항복하면, 적어도 고통 없이 끝내줄게.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록틴은 사뭇 다정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그러나 그의 발치에서 침을 흘리며 실비아를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는 마물들은 제 주인과 생각이 같지 않아 보였다.

16558820455818.jpg“…….”

실비아는 말없이 록틴을 바라보았다. 눈 위로 피가 흘러내렸다. 어둠도, 치유 마법도 본인에게는 쓸 수 없다는 점 때문에 피는 멎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16558820455818.jpg‘좀 어지럽네.’

피가 멈추지 않아서인지 시야 끄트머리가 조금씩 흐릿해졌다. 숨을 후 내뱉은 그녀가 록틴을 또렷이 노려보았다. 뚜렷한 금빛 눈이 생에 대한 의지로 형형히 빛났다. 그에 록틴은 다시 한번 전율을 느끼며 광소를 뱉었다.

16558820455803.jpg“그래, 무력한 사냥감의 숨통을 끊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재미있겠군. 아주 좋아!”

록틴을 비롯한 마족, 마물들이 일제히 실비아에게 달려들었다. 실비아는 최선을 다해 그들에게 맞섰으나 눈가로 흐르는 피가 그것을 방해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을 향해 혀를 찼다.

16558820455818.jpg‘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단련이라도 해두는 건데.’

벌써 체력이 다 된 것인지 팔다리가 차차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콱-!

16558820455818.jpg“윽…….”

그때 마물 하나가 실비아의 팔에 깊숙이 이빨을 박아 넣었다. 곧장 어둠을 사용해 마물을 뿌리치긴 했으나 새로이 생긴 상처에서는 또다시 피가 흘러나왔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순간적으로 시야가 핑그르르 돌았다. 거꾸로 뒤집힌 시야에 기괴하게 웃는 얼굴로 제게 달려드는 록틴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16558820455803.jpg“으아악!”

록틴의 뒤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놀란 록틴이 반사적으로 동작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이 그의 의지로 행할 수 있던 마지막 동작이었다.

16558820455803.jpg“무슨…….”

서걱- 단 한 번의, 가장 기본에 가까운 세로 베기. 날카로운 검 끝이 록틴의 등을 길게 내리그었다.

16558820455803.jpg“으아악!”

록틴은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으로 무너졌다. 그는 온몸을 뒤덮은 통증에 꿈쩍도 하지 못하고 신음만 뱉었다. 실비아는 록틴을 벤 검에 서린 옅은 검기, 그리고 그 검을 쥔 사람의 모습에 눈을 부릅떴다.

16558820455818.jpg“……란델?”

흩날리는 핏방울 사이로 섬뜩한 눈빛을 한 란델이 보였다. 그녀가 제 눈을 의심하는 사이, 란델은 차례로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다른 마족과 마물을 처치해 나가기 시작했다. 케에에엑!

16558820455803.jpg“인간이 또……!”

16558820455803.jpg“대체 뭐가 어떻게 된……!”

란델 역시 다른 마족들의 팔 혹은 다리에 상처를 입히는 식으로 그들을 행동 불능으로 만들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에 서린 검기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일까? 무릎에 휘청 힘이 빠지는가 싶더니 란델의 검기처럼 몸이 흔들렸다. 균형이 등 뒤로 쏠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16558820455818.jpg“아……!”

몸이 허공으로 기우뚱 기울어졌다.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뱉으며 란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그 소리에 마족을 베다 말고 그녀 쪽을 바라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란델이 실비아를 향해 땅을 박차며 마주 손을 뻗어왔다. 입술이 벌어진다. 경악 서린 비명이 튀어나왔다.

16558820512103.jpg“알리사!”

16558820455818.jpg‘……뭐?’

실비아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미처 찾아내기도 전. 실비아의 몸이 계곡으로 추락했다. 풍덩-! 물보라가 일며 실비아의 몸이 푸른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녀는 물거품으로 어지러운 시야에 언뜻 아른거리는 검은 그림자를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16558820455818.jpg‘저 이름을, 란델이 어떻게……?’

그 생각을 끝으로 그녀의 의식이 수면 아래로 훅 가라앉았다. * * * 바야흐로 때는 마물 대범람의 시대. 마물과 마족으로 인해 고아가 된 아이들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았다. 후일 용사라고 불렸던 클레온의 과거 또한 별다르지 않았다.

16558820455803.jpg“야, 흰머리! 제대로 안 할래? 너 때문에 걸렸잖아!”

클레온은 부모를 잃은 후 살아남기 위해, 저처럼 고아가 되어 거리를 떠도는 도둑패 아이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다. 하지만 도둑패는 유달리 곱상한 외모에, 체구도 자그마한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얌전하기라도 하면 또 모르겠는데 성질마저 특출 나게 지랄 맞았다. 하지만 그 끈질김이 가상하여 마지못해 무리에 끼워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클레온은 허구한 날 주어진 몫을 채우지 못하기 일쑤였다. 어디 그뿐이랴. 다른 아이들의 일까지 방해하니 도둑패로서는 심사가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털썩-!

16558820455803.jpg“따라오지 마라, 짐 덩이.”

16558820455803.jpg“쓸모없는 놈. 그냥 여기서 죽어버려.”

결국 도둑패는 클레온을 흠씬 패서 마물들이 득시글한 숲에 버려두고 도망쳤다. 클레온은 바닥을 기어서라도 아득바득 그들의 뒤를 따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클레온은 어쩔 수 없이 숲 한가운데에 드러누워 한쪽 팔로 눈가를 가렸다. 고운 입술 새로 험악하기 짝이 없는 욕지거리가 중얼중얼 흘러나왔다.

16558820512136.jpg“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죽으라고 내버려 두고 가냐, 버러지 새끼들……. 아, 나도 버러지구나.”

하지만 욕설은 이내 자조로 바뀌었다. 클레온은 한쪽 팔로 눈을 가린 채 먼 곳에서부터 들리는 마물의 울부짖음을 멍하니 귀에 담았다.

16558820512136.jpg“아…….”

나는 왜 이렇게 쓸모가 없는 거지.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신께서 곱상한 외모 대신 티 나지 않게 물건을 훔칠 수 있는 능력을. 가느다란 체구 대신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은 몸뚱어리를 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클레온은 대자로 드러누운 채 그런 실없는 상상에 잠겼다. 사실 현실이 버거워 상상으로 도피했다는 것이 옳았다. 키이이익-!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마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울음을 듣는 순간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등줄기가 싸하게 식어 내리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클레온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들려온 반대 방향으로 죽어라 뛰기 시작했다.

16558820512136.jpg‘죽고 싶지 않아.’

등 뒤로 마물이 수풀을 빠르게 헤치며 그의 뒤를 쫓는 것이 느껴졌다. 끝까지 센 척을 하긴 했지만, 결국 그의 본심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클레온은 창백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헐떡이는 숨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16558820512136.jpg‘죽고 싶지 않아……!’

키이이이익! 그때 그의 뒤를 쫓던 마물이 크게 뛰어올라 그의 등을 덮쳤다. 콰당! 그 무게에 클레온의 몸이 엉망으로 바닥을 굴렀다. 그는 제 위에 올라탄 마물을 향해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16558820512136.jpg“으아아악! 꺼져! 꺼지라고!”

키익! 키이익! 마물은 제 몸뚱이의 절반도 되지 않는 크기의 먹잇감이 발악하는 것이 우습다는 듯 킬킬거렸다. 거미와 비슷한 모양새의 마물은 다리를 이용해 너무도 쉽게 클레온의 손목과 발목을 고정했다. 마물이 고개를 마구 휘젓는 클레온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16558820512136.jpg“흐윽, 젠장……!”

녹색 점액으로 점철된 마물의 입 안을 본 클레온이 턱을 덜덜 떨며 눈물을 흘리는 순간. 푹-! 키이이익! 어디선가 날아온 불꽃의 화살이 마물의 몸을 그대로 관통했다. 마물은 대번에 비명을 지르며 클레온을 놓고 날뛰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다리를 바르르 떨고는 배를 까뒤집고 숨을 거뒀다.

16558820512136.jpg“이게 어떻게 된…….”

클레온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때 마물의 몸통에 꽂혀 있던 화살이 스르륵 사라지며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1655882053425.jpg“이런 곳에 어린애가 있을 줄은 몰랐네……. 괜찮니?”

어린애라니. 클레온은 도둑패가 툭하면 자신을 애새끼라고 까내렸던 것이 생각나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린 채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여자가 있었다. 보랏빛 음산한 숲과는 어울리지 않는, 상당히 귀여운 인상의 여자가. 긴 검은색 머리카락, 루비 같은 붉은 눈을 가진 여자가 클레온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58820534254.jpg“어머, 울었구나. 괜찮아. 저 마물은 완전히 죽었어. 더는 너를 잡아먹으려 하지 못할 거야.”

16558820512136.jpg“……!”

클레온은 그 말에 뒤늦게 제 얼굴에 눈물자국이 남아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돌리며 소매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그사이 여자가 클레온의 가까이 다가왔다. 노란 보석이 박힌 긴 스태프를 손에 든 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16558820534254.jpg“이름이 뭐야, 꼬마야?”

16558820512136.jpg“꼬마라고 부르지 마!”

클레온은 뭔지 모를 수치심으로 인해 여자의 시선을 피하다가 울컥해 외쳤다. 그러나 여인은 꿋꿋했다.

16558820534254.jpg“그럼 꼬마를 꼬마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르니?”

16558820512136.jpg“나 어린애 아니야! 잘 못, 못 먹어서 키가 좀 작긴 하지만……! 벌써 열다섯 살이라고!”

16558820534254.jpg“세간에서는 그걸 어린애라고 부른단다.”

16558820512136.jpg“이익……!”

클레온은 반박할 말을 잃고 분한 듯 숨만 몰아쉬었다. 입술을 벙긋대던 그는 결국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몸을 홱 돌렸다. 그러나 여자는 그를 졸졸 쫓아왔다.

16558820512136.jpg“……저리 가! 안 알려줄 거니까!”

16558820534254.jpg“이름이 뭐냐니까. 마물한테 먹힐 뻔한 걸 구해줬는데 그 정도도 못 알려줘?”

16558820512136.jpg“누가 구해달라고 했어? 관심 끄고 갈 길 가라니까?”

16558820534254.jpg“그래? 알았어. 잘 있으렴.”

거듭 여자에게 꺼지라고 외치던 클레온은 생각보다 선뜻 돌아온 긍정에 움찔했다. 여자가 스태프를 휘두르자 허공에 복잡한 문자들로 뒤얽힌 원이 나타났다.

16558820512136.jpg‘……설마, 마법사인가?’

클레온은 그것이 말로만 듣던 ‘마법진’임을 깨닫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녀가 정말로 떠나려 한다는 사실도 동시에 깨달았다. 클레온은 저도 모르게 여자 쪽으로 다급히 손을 뻗었다.

16558820512136.jpg“자, 잠깐! 진짜 가게?”

16558820534254.jpg“네가 가라며?”

16558820512136.jpg“여기 마물의 숲인데?”

16558820534254.jpg“그래서?”

16558820512136.jpg“…….”

여자는 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클레온은 무의식중에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16558820512136.jpg‘……가지 마.’

미안해, 잘못했어. 날 버려두고 가지 마. 혼자는 싫어. 무서워. 나는…….

16558820512136.jpg‘살고 싶어.’

두서없는 말들이 입 안을 맴돌았다. 그것은 그를 버리고 떠나던 도둑패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애원이었다. 그러나 클레온은 끝내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16558820512136.jpg‘하긴, 나 같은 짐 덩이를 데려가줄 리는…… 없겠지.’

클레온은 체념하며 고개를 떨궜다. 분하지만 도둑패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그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그저 남들에게 빌붙어 살기 급급한 기생충일 뿐이었다. 심지어 목숨을 빚진 이런 상황에조차 고맙다는 말도, 살려달라는 말도 내뱉지 못하는 허울뿐인 자존심까지. 아주 삼박자를 다 갖춘 버러지가 아닌가. 그가 그리 생각하며 여자의 눈치를 보듯 시선을 힐끗 들어 올렸을 때.

16558820512136.jpg“……!”

클레온이 목격한 것은 조소가 아닌 미소였다. 그 미소를 눈에 담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16558820512136.jpg‘아.’

여자는 클레온이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을 빼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로 인해 동료들에게 버림받았다는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가 입을 열지 않았으니 기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그가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들을 전부 알고 있다는 듯, 그런 그조차 이해한다는 듯 다정하게 웃고 있어서. 그래서 한심하게도 울컥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16558820564431.jpg

16558820564434.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