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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부질없는 그리움 (87/118)

87. 부질없는 그리움2022.01.27.

그녀는 마치 그가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들을 전부 알고 있는 듯했다. 그조차도 이해한다는 듯 다정하게 웃고 있어서. 한심하게도 울컥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클레온은 눈을 질끈 감고 앓는 소리를 흘리다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왜인지 여자와 시선을 맞추는 것이 심히 부끄러웠다.

16558820630596.jpg“……온.”

16558820630604.jpg“응?”

16558820630596.jpg“……클레온이라고, 내 이름!”

클레온은 여자가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자, 차분히 굴겠다고 결심했던 것을 5초 만에 잊어버리고 버럭 외쳤다. 그러자 여자가 손바닥을 짝 맞부딪치며 웃었다. 알아들었구나, 하고 안심하던 클레온은 다시 한번 황당함에 이마를 짚어야 했다.

16558820630604.jpg“아아, 레오? 레오라고?”

16558820630596.jpg“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 귀먹었어?”

16558820630604.jpg“그래, 레오야. 누나랑 같이 갈까?”

16558820630596.jpg“……아주 내 말은 듣지도 않는구먼. 그래, 내 이름은 이제부터 레오다. 됐어?”

도대체가, 조금 전 마물을 한 방에 해치우던 마법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클레온은 결국 제 이름을 정정할 의지를 잃고 툴툴댔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레오’라는 호칭이 애칭처럼 들려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은 애써 무시했다.

16558820630604.jpg“좋아. 그럼 이제 갈까, 레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클레온의 이름을 들은 것이 신나는지 기분 좋게 웃으며 스태프를 휘둘렀다. 아까 사라졌던 마법진이 다시 허공에 떠올랐다. 이동 마법진을 신기하게 응시하던 클레온은 그 안으로 발을 떼기 전,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 하며 발을 멈췄다.

16558820630596.jpg“……그러고 보니.”

16558820630604.jpg“응?”

16558820630596.jpg“당신 이름은 뭔데?”

16558820630604.jpg“당신이라니. 누나라고 해야지.”

16558820630596.jpg“아, 진짜……!”

꼬마에 이어 누나라는 낯간지러운 호칭까지. 발끈한 클레온이 성을 내자 여자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아무래도 그를 놀리는 데 맛 들린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여자는 별안간 폭소를 그치더니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또다시 클레온의 심장이 덜그럭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16558820630604.jpg“알리사.”

16558820630596.jpg“…….”

16558820630604.jpg“나는 알리사야.”

16558820630596.jpg“……알리사.”

클레온이 알리사를 사랑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에 가까웠다. 누군가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가슴뿐 아니라 몸 전체가, 영혼까지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므로. * * * 클레온이 알리사를 따라 진영에 자리 잡은 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동경과 호감이 사랑으로 변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클레온은 그동안 잘 먹고, 잘 자고, 언젠가는 알리사의 곁에 나란히 서겠다는 일념으로 검술 수련에 죽자 살자 매달렸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어느 순간부터 진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 가장 큰 키를 가지게 되었고, 몸도 확연히 단단해졌다. 퍽!

16558820645322.jpg“아……!”

가령, 지금처럼 그에게 먼저 시비를 걸던 놈들이 무력하게 나가떨어질 만큼. 클레온은 무표정하게 해럴드를 내려다보았다. 고의로 그와 어깨를 부딪쳤던 해럴드는 외려 제가 고통을 호소하며 어깨를 매만지다가 흠칫했다. 그러나 그는 곧 한순간이나마 자신이 클레온에게 겁을 집어먹었다는 사실이 분했는지 사정없이 인상을 쓰며 으르렁댔다.

16558820645322.jpg“눈 똑바로 안 뜨고 다녀?”

16558820630596.jpg“내가 눈을 똑바로 안 뜨고 다니는 거면, 그쪽은 눈이 아예 안 달린 건가? 안타깝네.”

16558820645322.jpg“이, 이……!”

클레온이 지지 않고 맞받아치자 해럴드가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클레온은 그가 또다시 제게 말을 붙이기 전에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그를 지나쳐 걸었다. 매끄러운 미간이 짜증스레 구겨졌다.

16558820630596.jpg‘저 인간들은 도무지 정이 안 간단 말이야.’

이건 자신의 문제일까, 아니면 저들의 문제일까. 클레온은 어렸을 적부터 유구하게 사람들로부터 ‘싸가지 없다.’라는 말을 들어왔기에 섣불리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저들에게서 느껴지는 싸한 기운이 그저 기우인지 아닌지.

16558820630596.jpg‘……뭐, 어차피 저 사람들이 저러는 것도 나뿐이니까. 내가 만만하게 보인 거겠지.’

클레온은 흘긋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해럴드 무리가 무어라 숙덕대며 제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들이 저를 대하듯 알리사를 대했다면 진즉 진영을 뒤집어엎었겠지만, 해럴드 무리는 알리사에게만큼은 한없이 온순하고 유쾌한 동료들이었다. 그래서 클레온은 해럴드 무리를 고까워하면서도 늘 그들의 시비를 받아넘기는 편이었다. 어쨌거나 알리사만 무사하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던 중 알리사의 생일이 가까워졌다. 그간의 훈련과 실전으로 어느 정도 실력을 쌓은 클레온은 진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용병 길드를 찾아갔다. 진영에서 받은 돈이 아닌, 오로지 제힘으로 번 돈으로 알리사의 생일선물을 마련하고 싶어서였다.

16558820630596.jpg“일을 하고 싶은데……요.”

그는 본래 성격을 꾹 누르고 공손히 물었다. 다행히 그는 그간 대외적으로 보기에도 꽤 괜찮은 실력의 검사가 되어 있었기에 일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6558820630596.jpg‘의뢰를 몇 건 정도 해결하면 충분하려나. 두 건? 세 건?’

클레온은 길드장과 간단한 면접을 치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알리사의 선물을 살 생각으로 여념이 없었다. 클레온이 고심 끝에 고른 알리사의 선물은 반지였다. 다만 알리사는 잦은 전투로 인해 손에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으니, 반지에 가죽 줄을 꿰어 목걸이로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16558820645322.jpg“가죽 줄? 선물인데 가죽 줄은 좀 그렇지 않나? 적어도 백금 줄 정도는 되어야 예쁘지. 우리 가게가 또 그런 거 전문이거든.”

그러나 반지를 사기 위해 들른 보석상 주인은 그의 말에 난색 했다. 사실은 클레온에게 다른 상품까지 팔아넘길 생각에 꺼낸 말이었지만, 이런 곳에 물건을 사러 온 것이 처음인 그는 보석상 주인의 상술에 손쉽게 넘어갔다. 결국 클레온은 백금 줄의 대금을 버느라 예정했던 시일보다 조금 늦게 진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선물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얇은 금테에 손톱만 한 루비가 박힌 반지일 뿐이었지만, 루비가 알리사의 눈 색과 똑같았다. 그는 다가오는 알리사의 생일에 이 목걸이를 건네며 제 마음을 고백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작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알리사의 실종 소식이었다.

16558820630596.jpg“……뭐?”

16558820645322.jpg“……말 그대로다. 알리사가 사라졌어.”

클레온은 제 귀를 믿지 못하고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손안에 들린 반지가 손바닥을 파고들어 아릿한 통증이 일었으나 미처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해럴드는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가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더니 클레온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쪽지에 적힌 것은 분명히 알리사의 글씨였다. 「연구에 필요한 재료가 다 떨어져서, 늘 가던 숲으로 재료를 구하러 갈까 해. 그럼 다녀올게.」  

16558820630596.jpg“…….”

클레온은 말없이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바람에 바스락, 소리가 나며 손에 들린 쪽지가 구겨졌다. 해럴드는 자못 침통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클레온의 어깨를 한 손으로 짚었다. 그가 이제껏 보인 적 없는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태도로 클레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16558820645322.jpg“네가 상심했을 거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알리사가 사라진 지도 벌써 이주 째야. 사흘 가까이 돌아오지 않길래 숲을 수색해봐도 찾을 수 없었어.”

16558820630596.jpg“…….”

16558820645322.jpg“아무래도 숲에 원하던 재료가 없어서 더 먼 곳까지 간 모양인데, 그렇다고 해도 그 녀석이 이 주 동안이나 소식 하나 없을 리가 없어. 아무래도 죽은 것 같…….”

16558820630596.jpg“닥쳐.”

클레온은 끝내 쪽지를 엉망으로 구기고 해럴드의 멱살을 잡았다. 우당탕, 하는 소리가 나며 책상 위의 서류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하지만 언제나 그에게 시비를 걸기 급급했던 해럴드는 얼굴조차 구기지 않은 채 측은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꼭, 조금 전 제가 들었던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사실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클레온이 이를 악문 채 말을 짓씹어 뱉었다.

16558820630596.jpg“……그럴 리가 없어.”

16558820645322.jpg“다른 녀석들도 인정했어. 너도 그만 받아들여라. 그 녀석은 죽었어.”

16558820630596.jpg“한 번만 더 죽었다는 소리 입에 올렸다간 그 입을 찢어버릴 줄 알아.”

16558820645322.jpg“…….”

16558820630596.jpg“그녀를 못 찾은 건 너희가 무능했을 뿐이야. 고작 이 주 만에 동료가 죽었다고 단정 짓고, 동료의 목숨을 포기하는 너희는 동료 소리를 들을 자격이 없어. 이 쓰레기들아.”

으르렁대듯 말을 맺은 클레온이 해럴드를 팽개치듯 내려놓고는 막사를 박차고 나갔다. 그는 조금 전 내려놓았던 제 짐을 그대로 챙겨 그녀와 처음 만났던 그 숲으로 향했다. 그것이 진영 사람들과 그의 마지막이었다.

16558820630596.jpg“알리사!”

클레온은 이후 홀로 목소리를 높여 알리사를 찾으며 대륙을 돌아다녔다. 함부로 큰 소리를 냈다가는 마물과 마족을 끌어들일 수 있으니 숲에서는 언제나 조용히 하라는 알리사의 잔소리가 귓가에서 맴도는 듯했지만, 그에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클레온은 알리사를 찾으러 돌아다니느라 빈번히 목숨의 위기를 넘겼고, 그때마다 그의 검술 실력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극한의 상황에 절박함마저 겹친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알리사를 찾아 대륙을 헤맨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처음으로 마력을 다루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가 마력을 검날에 덧입히는 데 성공했을 때도.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그의 마력에 ‘검기’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도. 알리사는 찾을 수 없었다.

16558820630596.jpg“……알리사.”

클레온은 이제는 숨소리와 같아진 이름을 중얼거리며 멍한 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알리사가 사라진 지도 벌써 몇 년째였다. 그동안 클레온은 대륙을 이 잡듯이 뒤지며 세 바퀴 돌았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혼자였다.

16558820645322.jpg-너도 그만 받아들여라. 그 녀석은 죽었어.

16558820630596.jpg‘아니야.’

16558820645322.jpg-알리사? 그, 대마법사라고 불리던 사람 말이죠? 실종된 지 그렇게 오래됐다는데, 벌써 죽었을 게 분명해요.

16558820630596.jpg‘……아니야.’

16558820645322.jpg-……알리사를 찾고 있다고요? 이미 죽은 사람을 어떻게 찾겠다는 거예요? 부질없는 짓은 그만두고 정착해요.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널렸다고요.

  ……아니어야 하는데. 정말로 더는, 당신을 볼 수 없어? 당신을 만나서, 당신의 웃음을 눈에 담고, 그 목소리를 귀에 담고……. 그럴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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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온은 저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알리사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서는 나날이 생기가 사라졌다. 의무감에 발을 움직이고는 있지만 살아 움직이는 시체와 다를 바 없어졌다. 그러던 중, 마왕 바시스의 죽음과 함께 새로운 마왕의 탄생이 알려졌다. 새로운 마왕의 이름은 알리사. 세상에는 동명이인이 많은 만큼, 사람들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여기고 넘어가는 듯했으나 클레온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16558820630604.jpg-다들 인간의 평화를 위해서 청춘을,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야.

16558820630604.jpg-응? 피곤하지 않냐고? 그렇지만 이걸로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족해.

  그는 알리사가 마족에게서 인간을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니까. 우연이라도 그녀와 이름이 같은 마왕이 인간들을 학살하고 다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16558820630604.jpg-우리는 인간을 지켜야 해, 레오.

  알리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클레온은 굳은 얼굴로 검을 단단히 쥐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전장에 뛰어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검기를 다루며 마물들을 쓸고 다니는 그를 ‘용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클레온은 사람들이 자신을 용사라고 부르며 치켜 올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별다른 내색 없이 그들과 어울렸다. 혼자인 것보다는 여럿이 등 뒤를 지켜주는 편이 마왕을 빠르게 죽일 수 있는 길이었고, 알리사가 지키고자 했던 이들이었으니 되도록 그들과 잘 지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클레온은 마침내 마왕 알리사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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