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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용서하소서 (88/118)

88. 용서하소서2022.01.31.

사실 클레온은 처음으로 ‘마왕 알리사’와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는 일말의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알리사가 어둠을 연구하던 중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16558820789723.jpg-……그나저나, 연구는 잘 되어가? 요즘 그것 때문에 바쁘다고 잘 만나주지도 않았잖아.

16558820789731.jpg-글쎄? 아마 지금까지 해온 정도만 더 하면 되지 않을까?

16558820789723.jpg-뭐야,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다는 소리잖아.

16558820789731.jpg-절반밖에 안 남은 거지. 내가 뭐 못하는 거 봤어?

  이제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느껴지는 알리사와의 대화가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당신은 아니겠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비난하는 ‘그’ 마왕 알리사가. 당신은, 아니겠지? 무표정한 얼굴 탓에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클레온은 전투 내내 그 누구보다 긴장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러한 우려가 무색하게도. 전투 도중, 어둠으로 이루어진 검은 날개를 펼치고 나타난 ‘알리사’는 그야말로 ‘마족’ 그 자체였다.

16558820789743.jpg“저, 저기! 마왕입니다!”

16558820789743.jpg“마왕 알리사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별안간 머리 위로 쏟아지는 벼락에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클레온은 사람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저도 모르게 질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16558820789723.jpg“……저토록 불길한 기운이라니.”

꽤 거리가 있는데도 숨이 턱턱 막혀올 정도로 짙은 악의와 살의. 보랏빛 피부, 흰자위가 보이지 않는 눈, 이마 위로 돋아난 두 개의 뿔까지. ‘마왕’은 그야말로 모든 마족의 정점에 선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마왕에게서는 그가 사랑하던 여인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나마 마왕이 ‘알리사’는 아닐지 의심했던 것이 멍청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안도와 분노가 동시에 찾아왔다. 클레온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16558820789723.jpg‘너 따위가.’

감히 너 따위가 그녀의 이름을 더럽히는가. 망설임이 사라진 보랏빛 눈이 살기를 띠었다. 그는 곧장 검날의 다섯 배쯤 되는 크기의 검기를 만들어낸 채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이후로는 지난한 싸움이었다. 마왕은 클레온이 지금까지 마주했던 그 어떤 마족보다도 강했고, 또 끈질겼다. 그렇게 기나긴 전투 끝에. 클레온은 마침내 마왕 알리사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는 데 성공했다.

1655882078976.jpg“커헉……!”

검날이 심장을 꿰뚫는 감각이 느껴지는 것과 함께 마왕의 입에서 신음과 피가 왈칵 터져 나왔다. 그러나 클레온은 방심하지 않고 검을 한 번 더 비틀어 상처를 넓혔다. 그에 마왕의 입에서 전보다 더 많은 양의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1655882078976.jpg“흐, 흐…….”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오싹한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때 마왕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한차례 크게 일렁였다.

16558820789723.jpg“무슨 수작을……!”

클레온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물리려 했다. 일렁이는 어둠 사이로 한순간 드러난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마왕’ 알리사가 철판을 긁는 듯한 목소리로 조소를 흘렸다.

16558820789731.jpg“빌어 처먹을, 인간 새끼들, 같으니…….”

쿵. 그 순간 심장이 그대로 멈추는 기분이었다. 저 목소리. 아무리 지워내려 애써도 한평생 귓가에 눌어붙어 사라지지 않을 듯한, 저 목소리. 그리고 검은 안개처럼 보이는 어둠 사이로 한순간 드러난. 눈감을 때까지 결코 잊지 못할 그 얼굴을 눈에 담은 순간. 충격으로 굳어진 머리를 뒤로하고 혀가 먼저 움직였다.

16558820789723.jpg“알…….”

알리사? 그러나 클레온이 미처 제대로 된 부름을 내뱉기도 전. 죽기 전의 마지막 발악인 듯 일렁이던 어둠이 알리사의 몸을 둘러싸고 잠잠히 가라앉았다. 그와 더불어 한순간이나마 ‘대마법사 알리사’의 모습이 되었던 외양 역시 다시금 마왕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왕의 눈꺼풀이 내려앉으며 온기를 잃은 몸이 스르륵 기울어졌다. 챙그랑- 용사의 검이 아무렇게나 땅바닥을 굴렀다. 클레온은 저도 모르게 검 손잡이를 놓고 그 몸을 양팔로 받쳐 안았다. 양팔에 익숙하게 폭삭 들어오는 몸. 직후 본능에 가까운 깨달음이 온몸을 관통했다.

16558820789723.jpg“아.”

아아.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서서히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몸이 천천히 바닥을 향해 무너져 내렸다. 클레온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왕, 아니, 알리사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는 목구멍이 턱턱 막히는 듯한 기분에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16558820789723.jpg“알, 리사.”

알리사. 알리사. 알리사……. 내가,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바로 그때. 사방에서 귀가 먹먹할 정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16558820789743.jpg“마왕이 죽었다!”

16558820789743.jpg“마왕이 용사의 손에 죽었다!”

16558820789743.jpg“용사님 만세! 클레온 님 만세!”

16558820789743.jpg“클레온 님께서 마왕 알리사를 물리치셨다!”

16558820789743.jpg“와아아아!”

문자 그대로, 대지를 울릴 정도로 커다란 함성이 대륙을 뒤덮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16558820789723.jpg“……!”

그사이, 정작 함성의 주인공인 용사는 마왕의 시체 위로 몸을 숙인 채 소리 없는 비명을 쏟아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함성이 마치 무수한 바늘, 혹은 화살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그랬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모든 건 현실이었다. 꿈보다 지독하고 생생한, 현실.

16558820789723.jpg“아…….”

용사, 클레온은 그 순간 진정으로 제 목을 꺾어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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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클레온은 마왕 알리사가 제가 찾던 ‘알리사’라는 것을 알아챈 후 내내 넋이 나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왕’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관해 너나없이 입을 놀리느라 그런 그의 상태를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16558820789743.jpg“사지를 자르고 불에 태울까요?”

16558820789743.jpg“그것도 괜찮긴 한데, 역시 장대에 매달아 까마귀들에 뜯어 먹히게 하는 것이…….”

16558820789743.jpg“불에 태우는 건 너무 인도적입니다. 광장에 며칠 매달아두었다가 오체분시 하여…….”

16558820789743.jpg“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동족이나 다름없는 마물들의 밥으로…….”

패자는 말이 없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마왕의 시체를 조금 더 잔인하게, 조금 더 통쾌하게 처리할 수 있을지 경쟁하듯 의견을 내놓았다. 대전쟁이 끝난 후. 내내 넋을 놓고 입을 다물고 있던 용사 클레온이 나선 것은 그때뿐이었다.

16558820789723.jpg“……마왕의 심장을 벤 것은 저입니다. 그러니 시체의 처분 또한 제게 맡겨주십시오.”

일부는 그의 말에 반발했으나, 대부분은 그의 말이 옳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외려 용사인 그야말로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마왕의 시체를 모독할 수 있는 이가 아니겠냐며 입을 모았다. 그렇게 클레온은 간신히 알리사의 시신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알리사는 그가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던 그 순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마족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녀의 시신이 담긴, 낡아빠진 관을 제집 근처의 작은 신전에 안치하고 그곳을 뜨지 않았다. 클레온은 서서히 몸을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는 그저 관 앞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알리사의 얼굴을 들여다보거나, 간혹 손끝으로 그녀의 얼굴을 덧그렸다. 마족의 시신은 불태우기 전까지는 썩거나 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16558820789723.jpg“…….”

텅 빈 눈의 클레온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다. 알리사가 죽은 이후, 어둠으로 된 뿔과 날개는 사라졌다. 피부가 마족과 같은 보랏빛이 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꼭 알리사가 관 안에 누워 조용히 잠을 청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킬 것만 같은 그 모습에 클레온은 차마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처음에는 마왕의 처분에 대해 궁금해하던 이들조차 흥미를 잃을 때까지. 클레온은 알리사의 관 옆을 지키며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했다.

16558820789723.jpg‘신이시여.’

저는 알리사가, 그녀가 대관절 어떤 이유로 마왕이 된 것인지. 그렇게 되기까지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는 미처 모릅니다. 사실 아직도 누구보다 앞장서 마족에게서 사람들을 지켜내던 그녀가 마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16558820789723.jpg‘만약에…….’

알리사가 정말 마왕이 되었던 거라면, 그렇다면. 그 모든 건 그녀가 마왕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한 저의 책임입니다. 그녀가 마왕이 되기까지 그 곁을 지키지 못했던 저의 잘못입니다. 그러니 제발 알리사가 아니라. 제게…….

16558820789723.jpg“……제게 벌을 내려주십시오.”

바싹 마른 입술이 희미하게 달싹였다. 퀭한 눈에서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클레온은 끝내 관 위로 엎어져 숨죽여 오열했다.

16558820789723.jpg“제, 흐으, 제발. 신이시여, 제발……!”

항상 밝게 웃으며 사람들을 위로하면서도 홀로 남몰래 눈물짓던 그녀를. 언제나 씩씩한 척하지만, 전장에 나서기 전 떨리는 손을 망토 아래로 감추던 그녀를. 사랑하는, 그녀를. 용서하소서. 또한 저를 벌하소서. 부디 그렇게 하소서……. 관 위의 눈물은 마를 새가 없었다. 클레온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쏟은 지 100일이 되던 날.

16558820789743.jpg<……그 말, 감당할 수 있겠느냐.>

신이, 응답했다. * * *

16558820850648.jpg“……헉.”

실비아는 별안간 물 밖으로 끌려 나오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자마자 폐부로 급하게 공기가 밀려들었다.

16558820850648.jpg“흐, 콜록!”

그녀는 몸을 뒤틀며 가볍게 기침을 뱉었다. 그러던 중 피부 위를 스치는 간지러운 감각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16558820850648.jpg‘……뭐지?’

실비아는 반사적으로 경계심을 세우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털가죽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실비아는 털가죽 아래의 제 몸이 나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급하게 가죽을 잡아당겼다. 그녀가 혼란스럽게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탄식 같은 중얼거림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16558820850648.jpg“이게 무슨…….”

실비아는 홀로 작은 동굴 안에 있었다. 가까운 곳에는 모닥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있었고, 그 곁에 그녀의 옷이 가지런히 널려 있었다. 꼭 누군가 그녀가 감기에 걸릴 것을 염려하여 옷을 말려둔 것처럼. 그것을 눈에 담은 순간.

16558820850667.jpg-알리사!

  기억이 한순간에, 모조리 돌아왔다. 금빛 눈이 저도 모르게 부릅떠졌다.

16558820850648.jpg“……란델.”

그리 중얼거린 직후. 실비아는 털가죽을 내팽개치며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조금 덜 마른 제 옷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그녀가 비틀대며 동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 바람에 온몸의 근육이 욱신거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16558820850648.jpg“란델.”

실비아는 정신없이 란델의 이름을 되뇌며 수풀을 손으로 젖히고 숲을 뒤졌다. 우둘투둘한 나뭇가지에 손이 쓸려 생채기가 생기고 피가 배어 나왔다.

16558820850648.jpg“……!”

그때 별안간 숲 안쪽에서 모종의 기척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실비아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기민하게 그것을 눈치채고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녀가 마력을 휘감은 손을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수풀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왔다. 파삭-!

16558820850667.jpg“실비아? 왜 여기…….”

그는 당황한 얼굴의 란델이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저를 향해 휘둘러지는 실비아의 손목을 붙든 채 어리둥절한 음성을 냈다.

16558820850648.jpg“……아.”

손목에서부터 느껴지는 홧홧한 열기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동시에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식어 내렸다. 탁- 실비아는 혈색이 모조리 빠져나간 얼굴로 란델의 손을 쳐냈다. 그녀가 휘청거리며 란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란델은 그 모습에 당황하며 품에 지니고 있던 검을 내려놓았다. 그가 늘 사용하던 검이었다. 란델은 겁 많은 야생동물을 진정시키듯 상체를 낮추고 천천히 실비아에게 다가갔다. 그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았다.

16558820850667.jpg“많이 놀랐습니까? 미안합니다. 아까 당신을 추적하던 마족들이 이 근처까지 따라와서……. 다른 마족들을 불러들이지 못하게 뒤처리를 하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놀랐다면 미안하…….”

16558820850648.jpg“말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직후. 란델은 불쑥 튀어나온 실비아의 말에 멈칫하며 입을 닫았다. 실비아는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려 애쓰며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눈물 고인 눈으로 자조하듯 말했다.

16558820850648.jpg“……말하려고 했어요.”

1655882085066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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