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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어느 기다림 (89/118)

89. 어느 기다림2022.02.03.

실비아는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려 애쓰며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눈물 고인 눈으로 자조하듯 말했다.

16558821039656.jpg“……말하려고 했어요.”

16558821039661.jpg“…….”

16558821039656.jpg“정말 말하려고, 했는데…….”

말이 이어질수록 호흡이 가빠졌다. 실비아는 어느새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16558821039656.jpg“당신이 나를 경멸할까 봐, 그래서…….”

말꼬리가 흐려졌다. 실비아는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가다듬으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란델이 대체 어떻게 알리사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지. 그가 혹 제 얘기를 듣고 나서 경멸의 시선을 던지지는 않을지. 여러 의문과 두려움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꽉 메웠다. 심장이 지나치게 빠르게 뛰는 탓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두려움에, 혼란에.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16558821039656.jpg“켈베티아에서 돌아가면. 그때 당신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생각이었어요.”

물기 어린 눈의 실비아가 고통스럽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아슬아슬하게 고여 있던 눈물이 소리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혈색 없는 흰 얼굴 위로 눈물이 빗방울처럼 흘러내렸다. 실비아는 울며 란델을 응시했다. 란델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실비아는 자꾸만 란델에게서 떨어지려는 시선을 애써 그에게 고정했다. 피하고 싶지, 않았다.

16558821039656.jpg“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는 몰라도. 당신을, 당신에게…….”

16558821039661.jpg“…….”

16558821039656.jpg“……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끝내 넝마가 된 실비아가 아픈 웃음을 지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16558821039656.jpg“그만큼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버려서.”

16558821039661.jpg“…….”

16558821039656.jpg“내가 그만큼……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결국엔 속에 담긴 말을 모조리 토해낸 그녀가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꿇은 듯한 모양새로 무너져 내린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하염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16558821039656.jpg“미안해요.”

16558821039661.jpg“…….”

16558821039656.jpg“정말 미안해요…….”

란델은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윽고 걸음을 떼었다. 천천히 실비아의 곁으로 다가온 그가 그녀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양쪽 무릎을 대고 몸을 낮췄다. 란델이 양손을 뻗어 실비아의 얼굴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그녀는 란델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워 버티려 했으나 결국에는 그의 손길에 이끌려 고개를 들었다. 란델은 눈물로 인해 엉망이 된 실비아의 얼굴을 보고는 조금 일그러진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을 눈에 담은 실비아가 놀라 눈을 깜박였다.

16558821039656.jpg‘웃는……다고?’

왜? 어떻게? 너무 놀라 순간적으로 우는 것조차 잊어버린 실비아가 멍하니 란델을 바라보았다. 란델은 그런 그녀와 시선을 맞춘 채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16558821039661.jpg“……제냐.”

담담한, 하지만 다정한 부름이 란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실비아는 상황과 맞지 않는, 동떨어진 이름에 의아해하다가 다음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에 그대로 굳어졌다. 저 이름. 저 이름은, 분명……. 그러나 실비아가 충격을 미처 수습할 새도 없이 란델의 말이 이어졌다.

16558821039661.jpg“당신이 죽고 싶어 하는 이유는 여전히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16558821039656.jpg“…….”

16558821039661.jpg“나와 함께 살아주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 ‘제냐’로서의 삶. 그 삶에서 들었던 고백의 말.

16558821039656.jpg‘저걸 란델이, 어떻게…….’

그러나 실비아의 충격은 이어지는 말에 차츰 다른 감정으로 바뀌어 갔다.

16558821039661.jpg“눈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게 당신의 얼굴이면 좋겠어.”

세 번째 삶에서 들었던 고백.

16558821039661.jpg“그대와 돌아오는 봄을 함께 맞이하고 싶은데. 그대는 어떻소?”

네 번째 삶에서 들었던 고백. 이후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 생에서 실비아가 들었던 고백의 말들이 모두 란델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그녀가 느꼈던 충격은 혼란으로, 깨달음으로, 그리고 종내에 서러움으로 바뀌었다. 실비아는 란델의 팔을 세게 그러쥔 채 손끝을 덜덜 떨었다.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녀를 덮쳤다. 란델의 눈에 차츰 차올랐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툭 흘러내렸다.

16558821039661.jpg“알리사.”

16558821039656.jpg“…….”

16558821039661.jpg“……리사 누나.”

16558821039656.jpg“아…….”

마지막으로 튀어나온 부름에, 실비아는 언제나 툴툴대면서도 제 곁을 떠나지 않던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어쩔 수 없이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너로구나. 전부…… 너로구나. 수없이 많은 생애, 셀 수 없는 마음을 차례로 꺼내놓은 란델이 울며 속삭였다.

16558821039661.jpg“당신을 사랑합니다.”

첫 번째 생. 그가 ‘클레온’일 때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 그것을 이제야, 간신히. 전했다.

16558821039656.jpg“아.”

그 고백을 듣는 순간.

16558821039656.jpg“……!”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실비아는 차마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무게에 숨이 막혀 목 놓아 울었다. 기나긴 삶. 그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남겨지는 사람이었다. 신뢰도, 친애도, 사랑도. 모두 세월에 바스러지거나 바람에 쓸려 처음의 빛을 잃었다. 빛을 잃은 마음을 끌어안고 홀로 남겨지는 건 지독하게 외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실비아는 차라리 마음을 닫는 것을 택했다. 처음부터 누군가를 마음에 들이지 않는다면. 그 누군가가 마음에서 사라졌을 때의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랬는데…….

16558821039661.jpg-당신을 사랑합니다.

  언제나 당신만은. 당신만큼은 나를 믿고 놓지 않았구나. 나는, 혼자가 아니었구나. 실비아는 실성한 것처럼 웃고 울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란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미 이마를 맞대고 있음에도 멀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이 필사적으로 서로를 끌어당겼다. 입 안에서 무수한 말들이 떠돌았다. 그러나 결국 입술 밖으로 나오는 것은 단 하나의 말이었다.

16558821039656.jpg“사랑해요.”

물기가 담뿍 어린 속삭임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실비아가 젖은 눈으로 란델과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그녀가 사랑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재차 말했다.

16558821039656.jpg“사랑해요, 란델.”

그 고백에 란델이 속절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마주 웃어 보였다.

16558821039661.jpg“사랑합니다, 실비아.”

이 말을 듣기까지, 또 전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돌아와야 했을까. 그들은 지금껏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겠다는 듯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의 몸이 서서히 기울어지더니 이내 흙바닥 위에서 완전히 뒤엉켰다. 조금은 거친 감촉의 입술에서는 눈물의 맛이 났다. 동시에 행복의 맛도 났다. 란델과 실비아는 흙바닥 위를 엉망으로 뒹굴며 서로를 위로하듯, 또 기뻐하듯 다정하고 애틋하게 입맞춤을 나누었다. 길디긴 입맞춤 사이사이로 사랑한다는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가, 흩어지고, 다시 숨에 섞여들었다. 사랑이었다. 사랑을 했고.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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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실비아와 란델은 한참이 지나서야 눈물을 그치고 잠시 어색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어색함을 떨치기 위해 이전 생들에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건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첫 번째 삶에서 동료들에게 배신당했다는 실비아의 이야기를 들은 란델이 대번에 살기를 띠었으니까.

16558821039661.jpg“뭐라고…… 했습니까, 방금.”

16558821039656.jpg“음, 그러니까 해럴드가…….”

16558821039661.jpg“해럴드만?”

16558821039656.jpg“그건 아니긴 한데…….”

실비아는 란델이 생각 이상으로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자 눈을 도르륵 굴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 기색을 눈치챈 란델이 얼마 지나지 않아 황급히 살기를 갈무리하긴 했지만, 굳어진 표정은 쉽사리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실비아 역시 마왕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동료들을 찾아가 그들을 응징했을 정도로 그들의 배신에 분노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별개로, 란델마저 그깟 자들 때문에 감정이 상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실비아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16558821039656.jpg“그건 그렇고, 당신은 여기서 대체 어떻게 혼자 살아남은 거예요? 어둠을 다룰 수 없으면 인간의 향이 고스란히 퍼졌을 텐데…….”

실비아는 말을 돌리려던 것도 잊고 진심으로 걱정 어린 기색을 내비치며 란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란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실비아를 흘겨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삼키고 넘어가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해럴드와 동료들의 만행에 대해 잊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16558821039661.jpg“……처음 정신을 차리니 숲 깊은 곳이더군요. 제 냄새를 맡은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들과 마주쳤습니다.”

실비아가 죽으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녀에게 속내를 토해내다가 함께 켈베티아에 떨어졌을 때. 마법진에 갑작스럽게 휘말린 충격 탓인지, 란델은 ‘클레온’으로서의 기억을 모두 되찾고 숲 깊은 곳에서 깨어났다. 클레온으로서의 기억을 되찾았다고는 하나 그는 여전히 인간이었고, 인간의 향을 감출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러니 마물과 마주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6558821039661.jpg“마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피를 좀 많이 뒤집어썼습니다. 그래서 꼼짝없이 둘러싸이겠구나 싶었는데…… 마물의 피는 짐승의 피와 다른 것인지, 외려 피를 뒤집어쓰면 쓸수록 마물들이 다가오지 않더군요.”

란델은 마물들을 처리할수록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이렇게 소란까지 피웠으니 시간이 갈수록 마물들이 떼로 몰려들어야 할 텐데. 외려 그가 피투성이가 되면 될수록 마물들은 비위가 상한다는 듯 코를 킁킁대다가 돌아가 버리기 일쑤였다. 그로 인해 란델은 마물들의 피가 인간의 향을 가려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꽤나 사실에 가까웠다. 마물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머무는 곳 근처에 마물의 피를 뿌려두니 마물들이 섣불리 접근하지 못했으므로.

16558821039661.jpg“그렇게 몸을 숨기고 이동하던 중에, 마족들이 인간을 발견했다며 소란을 피우는 것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현시점에서 켈베티아에 있는 인간이라면 당신과 저뿐일 테니 급히 달려간 겁니다. 그 뒤는 부인께서도 알고 계실 테고요.”

란델이 빙긋이 웃고는 실비아의 입술에 다시 한번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그에 그녀가 볼을 붉히며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이내 그조차 떨쳐낸 실비아가 조금 신기한 기색으로 란델을 바라보았다.

16558821039656.jpg‘하여간 타고난 사람이야.’

그녀가 알리사였을 적에는 몸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싸우기 급급했고. 이후 몇 번의 생을 거치고서야 어둠으로 인간의 향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을 겨우 깨달았는데. 켈베티아를 겪어본 적도 없으면서 본능적으로 마물의 피가 지닌 효과를 깨닫고 그것을 활용한 란델의 능력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역시 신은 불공평하다니까. 실비아는 힐긋 하늘을 흘겨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16558821039656.jpg“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검 한 자루로 반나절을 넘게 버틸 수가 있어요? 여기서는 마력이 극히 불안정해서 검기를 만들어낼 수도 없을 텐데.”

16558821039661.jpg“검기라면 만들어지긴 합니다만. 물론 인간 세상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턱도 없는 수준이지만요.”

16558821039656.jpg“……뭐라고요?”

실비아는 경악으로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하지만 정작 태연하게 답을 내놓은 란델은 그녀의 태도가 이해 가지 않는다는 듯 무구하게 눈을 깜박일 뿐이었다.

16558821039661.jpg“보십시오. 이렇게…….”

검을 집어 든 란델이 잠시간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한, 그러나 확실히 ‘검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그의 검날에 맺혔다. 실비아는 멍하니 그의 검을 바라보았다. 란델은 민망한지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16558821039661.jpg“큼. 평소에 비하면 많이 보잘것없는 정도이긴 합니다.”

16558821039656.jpg“……방금 그 말, 다른 기사들 앞에서 했다가는 그대로 얻어맞아도 할 말 없었을걸요.”

16558821039661.jpg“예?”

16558821039656.jpg“아무것도 아니에요.”

실비아는 조금 허탈한 기분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까지 란델이 싸우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그의 말을 듣고서야 그가 예사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실비아는 대마법사의 자질을 지녔음에도 마력의 불안정함 때문에 제대로 된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황인데. 란델은 작게나마 견고한 검기를 만들고 유지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마법이 범용성이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란델은 적어도 실비아의 수준으로 마력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16558821039656.jpg‘……대체 언제 이렇게 컸담.’

실비아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란델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가 클레온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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