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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혼자가 아니다 (90/118)

90. 혼자가 아니다2022.02.07.

16558821184121.jpg‘……대체 언제 이렇게 컸담.’

실비아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란델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가 클레온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16558821184128.jpg“왜 그렇게 보십니까.”

란델은 실비아가 감출 생각도 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자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다. 그럼에도 한참이나 그를 눈에 담던 실비아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16558821184121.jpg“그런데.”

16558821184128.jpg“예?”

16558821184121.jpg“그럼 당신도…… 나와 똑같은 일을 겪은 거예요? 신의 명으로, 계속 기억을 가진 채로…….”

생각해보면, 란델은 실비아가 이전 생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분노하거나, 안타까워하거나, 맞장구를 쳐주었을 뿐. ‘어쩌다가’ 그녀처럼 생을 반복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클레온은 ‘용사’였으니 신에게 벌을 받을 만한 이유는 없다고 하지만. 이유가 어찌 되었건, 실비아는 홀로 기억을 가진 채 삶을 반복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란델 또한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었을까 걱정스러웠다. 자신처럼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걸 기억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살아가다가 문득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울 테니까. 실비아의 물음에 란델이 멈칫했다. 잠시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민하던 그가 이내 담담히 답했다.

16558821184128.jpg“마왕이었던 당신이 죽은 후.”

16558821184121.jpg“…….”

16558821184128.jpg“매일같이 신께 기도했습니다. 당신이 아니라 내게 벌을 내려달라, 그것이 안 된다면 적어도 그 짐을 함께 나누어지게 해달라.”

16558821184121.jpg“…….”

16558821184128.jpg“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달라.”

말끝에 란델이 애처롭게 웃었다.

16558821184128.jpg“그렇게 빌었습니다.”

실비아는 심장이 아릿해지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꾹 움켜쥐었다. 란델은 행여 그녀가 손에 힘을 주다가 다칠까 염려하여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제 쪽으로 잡아 끌어오며 말을 이었다.

16558821184128.jpg“그렇게 한참이 지났을 때, 신께서 응답하셨습니다.”

16558821198836.jpg-……그 말, 감당할 수 있겠느냐.

  란델이, 그러니까 ‘클레온’이 신에게 벌을 내려달라 빌고 빈 지 100일째가 되던 날. 별안간 머릿속으로 천둥 같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반쯤 시체 같은 몰골로 관 위에 엎어져 있던 클레온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상체를 일으켰다.

16558821198839.jpg-누구…….

  하지만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국왕의 목 옆에 검을 꽂으며 제집 주변에 접근하지 말라 으름장을 놓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또다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이인지, 노인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8821198836.jpg-너희는 흔히들 나를 신이라 부르더군.

  신. 그에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이 일었다. 그 직후 클레온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경외의 말도, 겸양의 말도 아닌.

16558821198839.jpg-제게 벌을 내려주러 오신 겁니까?

  알리사를 위한 말이었다. 클레온은 신이 알리사를 대신해 제게 벌을 내려주는 줄 알고 난생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 바람에 메마른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모습에, 무감정하기만 하던 신의 목소리에서도 살짝 질린 기운이 묻어났다.

16558821198836.jpg-……역시 너 정도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이내 다시 무덤덤한 목소리로 돌아온 신은 설명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마력’은 곧 신의 숨결과 같다. 하지만 어둠은 신이 아닌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힘이었으므로 마력과 정확하게 반대가 된다. 마족이 마력을 감지하지 못하고, 마력을 다루는 인간이 어둠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두 힘이 정확히 상극이기 때문에.

16558821198836.jpg-알리사라는 영혼은 이미 어둠에 새까맣게 물들었다. 하지만 내 힘으로는 그 영혼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어. 어둠에서 빠져나오려면 스스로 제 죄를 뉘우치며 점점 어둠을 옅어지게 하는 방법뿐이다.

  하여 신은 알리사에게 벌을 내렸다. 그녀가 생을 반복하며 제가 해친 생명의 무게를 깨닫고, 그를 뉘우치길 바랐다. 끝에는 어둠에 물들어버렸다고 해도, 그녀가 마족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려 한 사실이 없던 것이 되는 건 아니었으므로. 그것이 신의 자비였고, 신의 사랑이었다. 하지만 알리사는 도무지 제 잘못을 뉘우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녀가 지닌 어둠은 점점 더 짙고 깜깜해졌다. 고민하던 신의 귀에 클레온의 기도가 닿은 것은 그때였다.

16558821198836.jpg-저 아이…….

  기특하게도 제 뜻을 거스르는 ‘마왕 알리사’를 막아낸 아이. 용사. 그런 아이라면, 알리사의 곁에서 그녀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본인 역시 알리사의 짐을 나누어지겠다며, 알리사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 빌고 있으니.

16558821198836.jpg-나쁘지 않군.

  그래서 신은 클레온을 찾아가 제안했다.

16558821198836.jpg-알리사를 다시 만나게 해주마.

16558821198839.jpg-……!

16558821198836.jpg-너는 알리사와 함께 계속해서 생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것은 죄인만이 가질 수 있는 저주이자 축복. 너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그녀는 너를 알아보지 못할 텐데. 그래도 상관없느냐?

16558821198839.jpg-상관없습니다.

  클레온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신은 놀란 듯 잠시 말을 멈췄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한 클레온은 알리사의 시신을 보며 눈물 젖은 눈으로 웃었다.

16558821198839.jpg-어차피 저는 또다시 그녀를 사랑하게 될 테니까요.

  그렇게 클레온은 알리사를 따라 환생했다. 두 번째 삶.

16558821198836.jpg-이, 이봐요! 정신 차려봐요! 당신 이러다가 죽습니다!

  클레온은 우연히 알리사, ‘제냐’를 다시 만났고, 운 좋게 그녀와 가정까지 꾸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클레온이 용병들의 보복으로 목숨을 잃자, 알리사는 이후의 생에서 그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았으므로.

16558821198836.jpg-눈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게 당신의 얼굴이면 좋겠어.

16558821198836.jpg-그대와 돌아오는 봄을 함께 맞이하고 싶은데. 그대는 어떻소?

  하지만 클레온은 기억이 없는 와중에도 모든 생에서 다시, 또다시 그녀를 사랑했다. 신에게 말했던 대로였다.

16558821184128.jpg“그런데 왜 갑자기 이번 생에서 모든 기억을 되찾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란델은 실비아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그녀의 손등에 입 맞췄다. 그가 애틋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16558821184128.jpg“그 덕에 당신은 언제나 혼자가 아니었다는 걸 알려줄 수 있었으니까.”

16558821184121.jpg“…….”

16558821184128.jpg“저는 그것만으로도 족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듯 마음이 울렁거렸다. 실비아는 조용히, 그러나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마음에 조금은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맞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16558821184121.jpg‘이 사람은 정말…….’

사랑스럽다는 말 한마디로는 제 마음을 다 담을 수 없다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실비아는 그가 제게 그랬듯, 그의 손등 위에 입술을 내려 애정의 파편이나마 표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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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821184128.jpg“무, 무슨. 실비아.”

란델은 손등에 실비아의 입술이 닿자 불에 덴 듯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실비아는 그의 귀며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다가 문득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16558821184121.jpg‘그러니까 란델이 레오…… 클레온이다, 이거지.’

그녀가 무릎걸음으로 란델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제 쪽으로 돌렸다.

16558821184128.jpg“실비아?”

란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실비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그를 보며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16558821184121.jpg“그러고 보니까, 아까 그거 기분 좋았는데. 한 번만 더 해주면 안 돼요?”

16558821184128.jpg“뭘…… 말씀하시는 건지.”

란델은 그렇게 되물었으나 시선은 반사적으로 실비아의 입술을 향했다.

16558821184121.jpg-사랑해요.

  그렇게 말하며 제게 입을 맞추던 실비아의 모습을 상기하니 겨우 가라앉혀둔 열기가 몸 안에서 되살아났다. 그의 머릿속에서 또다시 엄한 기억들이 재생되려던 찰나.

16558821184121.jpg“누나.”

16558821184128.jpg“……?”

16558821184121.jpg“‘리사 누나’라고 불렀었잖아요. 그거 한 번만 더 해줘요.”

16558821184128.jpg“아.”

정신이 없던 와중 내뱉었던 말을 기억해낸 란델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져나갔다. 그와 대조되게 실비아의 얼굴에는 언뜻 사악하게까지 보이는 미소가 떠올랐다. 클레온이 커가며 점점 그녀를 피했던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녀를 마음에 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괜스레 마음이 간질거려 장난을 치고 싶어져서였다. 란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실비아를 올려다보았다.

16558821184128.jpg‘……놀리는 건가?’

지금은 어디까지나 ‘란델’이지만, 그녀의 말에 ‘클레온’일 적의 기억과 감정이 되살아난 그가 삐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16558821184128.jpg“실비아.”

16558821184121.jpg“네.”

16558821184128.jpg“지금은 제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습니다만. 먼저 ‘오빠’라고 불러주시면 저도…….”

16558821184121.jpg“그래요, 오빠.”

16558821184128.jpg“……예?”

16558821184121.jpg“자, 이제 당신 차례에요.”

방금 뭐가 지나간 것 같은데? 란델은 어안이 벙벙해져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실비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16558821184121.jpg“내가 하면 당신도 하겠다면서요. 설마 약속을 안 지킬 생각은 아니죠?”

16558821184128.jpg“아니, 그.”

16558821184121.jpg“빨리요.”

실비아는 언젠가 란델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얼굴 곳곳에 짧게 입을 맞추며 그를 독촉했다.

16558821184128.jpg“아, 알겠습니다. 알았으니 조금만 떨어지십시오.”

결국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오른 그가 실비아를 밀어내고 머뭇머뭇 입술을 달싹였다.

16558821184128.jpg“누…….”

16558821184121.jpg“누?”

16558821184128.jpg“……누나.”

란델이 개미처럼 작은 목소리로 재빠르게 호칭을 내뱉었다. 실비아는 순간 웃음을 터트릴 뻔한 것을 꾹 참고 고개를 갸웃했다.

16558821184121.jpg“뭐라고요?”

16558821184128.jpg“한 번 했으니 된 것 아닙니까.”

16558821184121.jpg“저는 못 들었는데요. 너무 작아서.”

실비아는 뻔뻔하게 못 들었다고 주장하며 그를 지긋이 응시했다. 그러자 란델이 자포자기하듯 한숨을 푹 내쉬고는 책을 읽듯 입을 움직였다.

16558821184128.jpg“리사 누나. 됐습니까?”

16558821184121.jpg“너무 무뚝뚝하잖아요. 조금만 더 동생답게 불러 봐요.”

16558821184128.jpg“아, 진짜…….”

결국 란델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실비아는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사랑스러움에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클레온이건, 란델이건. 결국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새삼스레 마음을 울렸다. * * * 이후 실비아와 란델은 어둠으로 인간의 향을 감춘 후 마왕성을 향해 길을 떠났다. 전생의 일들로 인해 잠시 잊고 있었으나 애초에 그들이 켈베티아에 온 이유는 국무회의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국무회의가 시작되기 전까지 평화주의 마족과 협상을 마치고 그 증거를 가져가야 했다.

16558821198836.jpg“여기! 고기 한 근에 5렌!”

16558821198836.jpg“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없을 기회!”

마왕성 근처는 그야말로 마족들로 바글바글했다. 실비아와 란델은 행여 지나가는 마족과 부딪쳐 후드가 흘러내리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하며 걸음을 옮겼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하관은 복면으로 가린 상태였다.

16558821184121.jpg‘……그때는 여유롭게 둘러볼 상황이 아니라 몰랐는데.’

실비아는 묘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리를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노점들, 노점들의 지붕 사이사이로 연결된 가랜드. 작은 광장에서 흥겹게 악기를 연주하는 마족들까지. 마치…….

16558821184121.jpg“……인간 세상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군요.”

16558821184128.jpg“……그러게요.”

그때 란델이 실비아의 속내를 고스란히 읽은 것처럼 말을 꺼냈다. 실비아는 조금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6558821184121.jpg‘정말…… 다르지 않네.’

인간이 없는, ‘마족’들만의 세상은 이처럼 평화로웠다. 물론 기본적으로 마족들은 호전적인 성격인 탓에 곳곳에서 싸움도 이따금 벌어졌지만. 어쨌거나 그들 역시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을 뿐인 하나의 ‘종족’이라는 게 새삼스럽게 실감 되어 기분이 묘했다. 란델과 실비아가 사람들을 피해 걸으며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나눴다.

16558821184128.jpg“우선은 숙소를 알아볼까요.”

16558821184121.jpg“그럴까요. 혹시 몰라서 금붙이를 좀 챙겨 왔으니까……. 우선 하루 이틀은 근처에 머물면서 소문도 수집하고 평화주의 파벌과 접촉할 방법을 찾는 게 좋겠어요.”

두 사람은 빠르게 합의를 마치고 ‘여관’이라는 팻말이 걸린 건물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들의 앞에 불쑥 나타난 마족 꼬마가 꽃송이를 내밀며 외쳤다.

16558821198836.jpg“꽃 받아 가세요! 알리사 기념일을 축하하며 마왕성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꽃입니다! 감사합니다!”

실비아는 순간 무릎이 꺾여 휘청거렸다. 목 뒤로 소름이 쭈뼛 돋아났다. 무, 무슨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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