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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이런 거 하고 싶었어요? (91/118)

91. 이런 거 하고 싶었어요?2022.02.10.

16558821372291.jpg“꽃 받아 가세요! 알리사 기념일을 축하하며 마왕성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꽃입니다! 감사합니다!”

실비아는 순간 무릎이 꺾여 휘청거렸다. 목 뒤로 소름이 쭈뼛 돋아났다. 무, 무슨 기념일?

16558821372297.jpg“실비아, 괜찮…… 큽.”

란델은 반사적으로 실비아를 붙잡으려다가 결국 큭, 하며 웃음을 흘렸다. 실비아는 그의 손에 붙들린 채 멍하니 마족 꼬마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꼬마는 따분한 얼굴로 꽃을 흔들며 재촉했다.

16558821372291.jpg“안 받을 거예요? 저 이 바구니 오늘 내로 비워야 한단 말이에요!”

16558821372305.jpg“어, 어. 그래…….”

16558821372291.jpg“꽃 받아 가세요! 꽃이요! 알리사 기념일 기념화 필요하신 분!”

실비아가 반쯤 넋이 나간 채로 꽃을 받자마자 꼬마는 미련 없이 몸을 홱 돌리고 거리 반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보아하니 마왕성에서 일정 비용을 지급하고 기념화를 나누어주는 역할을 맡긴 듯했다. 실비아는 손안의 불그스름한 꽃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 꽃이 알리사였을 적 제 눈 색과 똑 닮아 있어 소름이 다 돋았다. 뒤늦게 일말의 이성을 되찾은 실비아가 란델을 돌아보았다. 란델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채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간신히 폭소를 참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눈을 가느다랗게 뜬 실비아가 란델을 노려보았다.

16558821372305.jpg“웃어요?”

16558821372297.jpg“아, 아니. 그럴, 그럴 리가. 크흠.”

16558821372305.jpg“당신 지금 목소리 떨리는데요.”

16558821372297.jpg“긴장해서 그럽니다.”

란델은 간신히 정색하며 고개를 바로 했다. 그러나 실비아의 손에 들린 꽃을 발견하자마자 또다시 입꼬리가 씰룩였다. 실비아는 체념의 의미로 한숨을 푹 내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세히 보니 곳곳에 이 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16558821372305.jpg“아까는 몰랐는데, 이런 것도 있었네요.”

주위를 살피던 실비아가 곧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종이 중 한 장을 집어 올렸다. 발에 밟혀 구깃구깃해진 종이에는 붉은 글씨로 큼지막한 문구가 써 있었다. 「-알리사 기념일을 축하하며- 마족력 966년 10월 6일! 마왕성 앞 중앙 광장에서 기념 연설 진행함! 참석자: 이블린 헤이든 폐하, 뮐러 쉐르트 공작 외 서열 10위까지.」 실비아는 무언가 기시감이 느껴져 가만히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직후 무언가를 떠올린 그녀가 아, 하며 눈을 크게 떴다.

16558821372305.jpg‘뮐러 쉐르트라면…….’

16558821372291.jpg-그렇게 말하기엔 평화주의 파벌의 수장이 쉐르트 공작인데? 이블린 폐하 다음으로 강한 분이라고. 정 그렇게 불만이면 공작부터 없애고 오지 그래?

  분명 켈베티아의 주점에서 들었던, 평화주의 파벌의 수장이었다. 실비아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안 그래도 뮐러 쉐르트의 소재를 알아내고 할 생각으로 막막했는데, 그가 알아서 광장에 나타나 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16558821372297.jpg“오늘은…… 마족력 966년 10월 3일이군요.”

실비아와 함께 종이를 읽어 내린 란델이 눈치 빠르게 근처 노점상의 달력을 확인해 날짜를 말해주었다.

16558821372305.jpg“3일……. 그 정도면 딱 적당한 기간이네요. 쉐르트 공작과의 협상에 필요할 만한 정보도 수집하고, 분위기도 파악하기에는.”

16558821372297.jpg“맞습니다.”

실비아와 란델의 얼굴에 그나마 희망이 깃들었다. 그들은 전보다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여관에 들어섰다.

16558821372291.jpg“아이고, 어서 옵쇼!”

여관의 1층은 주점 겸 식당으로 운영하는 것인지 마족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소란 와중에도 용케 종소리를 들은 중년의 마족 여성이 입구 쪽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온몸을 후드와 장갑, 부츠 등으로 꽁꽁 가리고 있는 실비아와 란델을 한번 슥 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16558821372291.jpg“부부요?”

16558821372305.jpg“네.”

어차피 인간의 향을 가리려면 같은 방을 쓰는 편이 효율적이었기에 실비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축제라서 그런 건지 평소에도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마족이 많아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여주인은 대수롭지 않게 수긍하고는 금붙이를 받아 그들을 2층으로 안내했다.

16558821372291.jpg“며칠이나 머무시려고?”

16558821372305.jpg“3일이요.”

16558821372291.jpg“두 분도 알리사 기념일 때문에 오셨구먼. 방은 하나 쓸 거죠? 마침 부부 전용 방이 하나 비었으니 거길 써요.”

16558821372305.jpg“……네.”

또다시 들려온 ‘알리사 기념일’이라는 말에 실비아는 소름이 돋은 팔을 슥슥 쓰다듬었다. 란델은 뒤에서 웃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숨을 꾹 참고 있었다. 여주인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두 사람을 방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열쇠를 건넨 뒤 사라졌다. 실비아와 란델은 그녀가 건넨 열쇠로 잠금쇠를 풀고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나란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16558821372305.jpg“……이게 대체 무슨.”

실비아의 입에서 당혹한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무언가 반응이라도 내비쳤지, 란델은 선 채로 기절한 듯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주인이 안내해준 이 ‘부부 전용’ 방은 지나치게…… 목적이 노골적이었다.

16558821372305.jpg‘아무리 마족끼리 잠자리를 가져도 아이가 생기지는 않는다지만, 그래도 이건 좀…….’

모든 마족과 마물은 ‘어둠’으로부터 태어나며, 그들은 타고난 본성이 쾌락주의인지라 대체로 문란했다. 평화주의 파벌일지라도 성적 쾌락에 한해서는 문란한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이런…… ‘부부 전용’ 방이라는 것까지 버젓이 운영되고 있다는 게……. 실비아는 우선 방문을 닫고 나서 질린 얼굴로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벽지부터 바닥, 침대까지 죄다 새빨간 색이라는 것은 약과에 불과했다. 방 안쪽에 놓인 전시대에는 부부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각양각색의 물건들이 즐비했다. 실비아는 그것들을 황망한 시선으로 둘러보다가 손을 뻗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집어 든 것은 묶는 용도인지, 가리는 용도인지 모를 흰색의 기다란 레이스 띠였다. 실비아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방을 둘러보다가 란델을 돌아보았다.

16558821372305.jpg“그냥 치워달라고 하는 게 낫겠죠?”

움찔. 그런데 돌아온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란델은 실비아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뭔가 잘못한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그에 실비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얼마간 말없이 란델을 응시하던 그녀의 입꼬리가 서서히 삐딱하게 치솟았다.

16558821372305.jpg“……흠.”

작게 웃은 실비아가 어둠을 끌어 올리며 손을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방 전체에 직육면체 모양으로 어둠이 둘러지며 인간의 향이 차단되었다. 붉은 눈의 실비아가 란델에게 다가가며 짓궂게 고개를 기울였다.

16558821372305.jpg“왜 대답이 없어요? 설마 나랑 이런 거 해보고 싶었어요?”

16558821372297.jpg“……아, 아닙니다.”

16558821372305.jpg“대답도 늦고. 말까지 더듬고. 진짜인가 봐요?”

16558821372297.jpg“정말 아닙니다. 순간 당황해서 대답할…… 그걸 놓친 것뿐입니다.”

란델은 제가 듣기에도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으며 실비아가 다가오는 만큼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다가 무릎 뒤로 무언가 걸리며 몸이 뒤로 휘청 넘어갔다.

16558821372297.jpg“윽……!”

털썩- 침대 모서리에 무릎이 걸린 란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가며 침대에 쓰러졌다. 그의 몸이 반동으로 가볍게 튀어 올랐다가 붉은 이불에 파묻혔다. 실비아는 태연자약하게 그 위로 올라탔다.

16558821372305.jpg“어쩐지 초야가 생각나는 구도네요. 그렇지 않아요?”

16558821372297.jpg“실비아, 내려가십시오.”

16558821372305.jpg“왜요?”

16558821372297.jpg“왜냐니. 지금, 자세가 좀…….”

란델이 눈썹을 찡그리며 시선을 비스듬히 피했다. 실비아는 그의 근육이 긴장하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고는 눈을 접어 웃었다. 그 모습이 꼭 서큐버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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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821372305.jpg“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실비아가 손을 뻗어 란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란델은 맨살 위로 닿아오는 온기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몸을 움찔거렸다. 떨쳐내고 싶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사이, 실비아는 고민 끝에 란델의 손목을 붙잡아 그의 머리 위로 올렸다. 란델은 반사적으로 몸을 들썩였으나 행여 그녀가 다칠까 제대로 뿌리치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실비아는 상체를 숙여 란델과 가까이서 시선을 맞추며 느른히 웃었다.

16558821372305.jpg“왜요. 이런 거 해보고 싶었다며.”

16558821372297.jpg“제가…… 잘못했습니다.”

16558821372305.jpg“그래요? 그럼 진짜로 나랑 이런 걸 해보고 싶었단 소리네요?”

16558821372297.jpg“……예.”

결국 란델은 눈을 질끈 감고 실비아의 말을 인정했다. 물론 그가 바라던 상황은 지금 같은 구도와 정확히 반대되는……. 그런 쪽이긴 했지만, 상상한 것은 상상한 것이었다. 그 말에 실비아가 소리 내어 웃으며 손끝으로 그의 클로크를 벗겨냈다. 그녀가 그의 셔츠 단추를 톡톡 풀며 생각에 잠겼다.

16558821372305.jpg“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겠네요. 뭐가 좋을까……. 아, 그래.”

이윽고 무언가를 떠올린 그녀가 반쯤 붉게 물든 눈을 접으며 손끝을 움직였다. 흰 손끝이 스칠 듯 말 듯 가볍게 란델의 가슴골을 타고 내려갔다. 그의 잇새로 억누른 신음이 흘러나왔다.

16558821372297.jpg“읏…….”

16558821372305.jpg“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무슨 짓을 해도 가만히 있어요. 내 몸에 손대지도 말고. 그러면 상을 줄게요.”

16558821372297.jpg“무, 슨…….”

16558821372305.jpg“글쎄요. 하루 정도 당신이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해주기?”

실비아가 그렇게 말하며 웃자 속에서 불길이 훅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실비아는 란델의 속에 불을 질러놓고 기름을 끼얹듯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그와 입술을 맞댄 채로 키득거렸다.

16558821372305.jpg“그러니까 잘 참아 봐요, 여보.”

란델은 실비아가 제게 입을 맞추며 스스로 옷 단추에 손을 가져가는 것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16558821372297.jpg‘젠장, 신이시여.’

물론, 란델의 모든 생을 통틀어 그 어느 때보다 힘겹고 험난한 몇 시간이 지난 후.

16558821372305.jpg“란델, 잠깐만 진정…….”

그들의 입장은 정확히 반대가 되었다. * * * 그 후로 3일이 흘러, ‘알리사 기념일’의 아침이 밝았다.

16558821372305.jpg“으…….”

실비아는 언뜻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눈꺼풀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마자 창문 너머로 쏟아진 햇살이 곧장 눈을 찔러왔다. 실비아는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감고 이불 속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16558821372305.jpg‘아프네…….’

온몸이 근육통으로 비명을 질렀다. 특히나 허리와 다리가 극심히 아파 왔다. 분명 기념일 연설을 기다리며 정보 수집도 하고, 피로도 풀며 만반의 준비를 갖출 계획이었는데. 여관의 뜻하지 않은 서비스 덕분에 3일을 꼬박 침실에서만 보낸 참이었다. 허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던 실비아의 호흡이 차츰 고르게 변해갔다. 그녀가 다시 잠에 들락 말락 하던 때. 커다란 손이 이불 속에서 슬그머니 움직이더니 그녀의 허리를 슬쩍 휘감았다. 실비아는 허리에 닿는 뜨끈한 열기에 반사적으로 앓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언뜻 뜨겁게 느껴질 정도의 열기가 허리의 쑤시는 부분에 닿아 있으니 통증이 한결 줄어들었다. 실비아는 만족스럽게 몸을 뒤척여 열기가 느껴지는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허리를 휘감은 손이 아닌 다른 쪽 손이 곧 슬그머니 그녀의 등줄기를 훑어 내렸다. 뒷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듯한 감각에 실비아가 눈을 뜨고 란델을 째릿 노려보았다.

16558821372305.jpg“오늘로 3일째잖아요. 내가 약속한 건 하루였는데…….”

16558821372297.jpg“그 뒤의 내기에서도 제가 이겼는데, 기억이 잘 안 나시나 봅니다. 분명 제가 내기에서 이기면 이곳을 나갈 때까지 제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16558821372305.jpg“그런 일이 있었나요? 누구누구 때문에 자고 일어나자마자 체력이 동나서 까무룩 기절한 기억밖에 없네요.”

실비아는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제 허리를 쓰다듬는 란델의 팔뚝을 찰싹 내리쳤다. 그래봤자 아프지도 않은 정도였던지라 란델의 웃음만 자아내고 말긴 했지만. 란델은 이불을 젖히고 실비아의 이마와 코끝,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추며 은근한 목소리를 냈다.

16558821372297.jpg“힘드시면 제가 씻겨드리겠습니다,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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