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예상치 못한 상황2022.02.14.
란델은 이불을 젖히고 실비아의 이마와 코끝,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추며 은근한 목소리를 냈다.
“힘드시면 제가 씻겨드리겠습니다, 부인.”
“……안 돼요. 오늘이 기념일 당일이잖아요.”
순간 그의 얼굴과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홀렸던 실비아가 한발 늦게 이성을 찾고 몸을 일으켰다. 란델은 아쉬워했으나 실비아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기에 시무룩하게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실비아가 며칠 내내 미동도 없던 커튼을 살짝 젖혀 바깥을 확인했다. 그러자 광장은 물론이고 여관 인근까지 인파가 넘치는 광경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현실감이 조금 돌아왔다.
‘……여기 온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되니까.’
실비아와 란델이 켈베티아에 온 이유는 어디까지나 전쟁을 막기 위해서였다. 깊이 숨을 삼킨 실비아가 란델을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슬슬 씻고 출발할까요?”
“아, 씻는 건 제가 도와드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요.”
* * * 란델과 실비아는 여관을 벗어나 연설이 이루어질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중앙 광장은 벌써 수많은 마족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나! 나 올려줘!”
“나부터!”
아직 어린 마족들은 다른 마족의 목 위에 올라타 단상을 구경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다가 시비가 붙는 경우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조심해요.”
실비아는 란델의 팔을 잡아당겨 막 소란을 일으키는 마족 둘에게서 그를 떼어놓았다. 란델은 감사의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실비아와 란델은 단상에서 적당히 떨어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실비아는 슬쩍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단상 너머,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검은 성이 눈에 들어왔다. 마왕성이었다. 실비아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높디높은 첨탑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검은 탑이 흡사 피 웅덩이에 잠긴 관처럼 보였다.
‘……어쩐지 불길한데.’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실비아가 기이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떠는 순간. 마왕성의 정문 안쪽에서 한 무리의 마족이 나타났다. 단상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마족들은 그들을 발견하고 흥분해 웅성거렸다.
“젠장, 드디어 나왔다!”
“저리 비켜!”
“……어? 그런데 폐하께서는?”
“뮐러 쉐르트 공작도 안 보이는데.”
“저건…… 서열 3위인 베이나스 페룬 아냐?”
‘……베이나스 페룬?’
실비아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베이나스라는 이름은 분명……. 그때, 왕성에서 나타난 마족들이 단상에 다다랐다. 가장 앞에 선, 아마도 3위 베이나스 페룬으로 보이는 마족이 근엄한 얼굴로 구름 떼처럼 모인 마족들을 둘러보았다. 마족은 힘을 따르는 종족인 만큼 그 시선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는지, 단상 앞쪽의 마족들이 찔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누군가 그 두려움에 저항하듯 손을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폐, 폐하는 어디 가시고 당신들만…… 나온 거요?”
“마, 맞아!”
“우리는 이블린 폐하의 연설을 들으러 와 있는 거라고!”
그러자 다른 마족들 역시 용기를 얻었는지 한 마디씩을 보탰다. 드넓은 광장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때 베이나스의 곁에 서 있던 마족이 앞으로 한 발 나섰다. 날카로운 인상의 그녀가 차가운 눈길로 마족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이블린 헤이든 폐하께서는 간밤에 뮐러 쉐르트 공작의 공격으로 중태에 빠지셨고, 공작은 그 죄로 인해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러니 현 마왕은 베이나스 페룬 님이시다. 경솔한 언행은 삼가도록.”
“……뭐?”
조금 전의 소란이 무색하게도 쥐 죽은 듯한 고요가 번졌다. 실비아와 란델 역시 경악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실비아가 혼란스럽게 마왕성 쪽을 바라보았다.
‘뮐러 쉐르트 공작이…… 마왕을 공격했다고?’
란델과 여관에 틀어박혀 있느라 자세한 이야기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의 편린만으로도, 평화주의 파벌의 수장인 뮐러 쉐르트가 마족치고 얼마나 온화하고 점잖은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마왕을 공격할 만한 이유가……. 실비아와 란델, 광장의 모든 마족이 혼란에 빠진 사이. 베이나스 페룬의 측근이 이어 말했다.
“간밤, 인간들이 켈베티아 정벌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뭐라고?”
“저, 정벌?”
“그 사실을 어떻게 안 거요?”
“확실한 겁니까?”
마족들은 갑작스럽게 떨어진 날벼락 같은 소식에 웅성거렸다. 여러 말이 한 번에 뒤엉킨 탓인지 측근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실비아와 란델은 소란 속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본능적인 깨달음이 그들의 머릿속에 같은 얼굴을 떠오르게 했다.
‘설마…….’
-우리의 왕이신 베이나스를 위하여!
어둠 벌레들이 숭상하던 것은 ‘베이나스’, 즉 쾌락주의 파벌의 수장임이 확실했다.
‘하긴, 어둠 벌레들은 궁극적으로 파괴와 혼란, 살육 등을 찬양하는 족속이니. 평화주의 마족까지 포용할 리는 없겠지.’
인간 세상과 켈베티아를 잇는 수단이 불규칙적인 비틀림과 이동 마법진 하나뿐인 것을 고려하면. 마족들에게 ‘켈베티아 정벌’ 소식이 이렇게 빠르게 전해질 수 있던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다비드.’
어둠 벌레들과 협력하고 있는 그놈의 짓이다. 후드 아래로 연녹색 눈이 사납게 빛났다. 란델이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그때 베이나스 페룬이 측근을 뒤로 물리고 앞으로 나왔다. 그가 자못 참담한 얼굴로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고 말을 이었다.
“뮐러 쉐르트 공작은 그간 인간과의 화합을 주장해 왔지. 그런 상황에서 인간들이 켈베티아로의 진격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자신의 권력에 흠이 날 걸 걱정한 것인지, 이블린 폐하를 죽여 입을 막으려 들었다.”
“어찌 그런……!”
“하찮은 인간 따위가!”
마족들은 뮐러 쉐르트가 인간의 편을 들기 위해 마왕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베이나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목소리에 한층 힘을 더했다.
“듣기로는 인간들이 켈베티아로 이동할 수 있는 마법진을 개발했다고 하더군.”
“허……!”
“평화주의라고 했나.”
분통을 터트리는 마족들 사이로 베이나스의 조소 어린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헛웃음을 흘린 그가 눈을 번뜩이며 고함쳤다.
“저들이 우릴 먼저 공격하겠다는데,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맞이하는 게 평화주의인가? 개소리! 그건 그저 비겁함일 뿐이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광장을 뒤흔들었다. 베이나스의 등 뒤로 어둠이 망토처럼 일렁였다.
“나는 그따위 거지 같은 신념에 기대어 목숨을 저버릴 생각이 없다! 전사라면 무릇 전장을 무덤 삼아야 하는 법! 마왕의 명이다! 모두 일어나 싸워라!”
베이나스의 열변이 끝나자마자 흥분한 마족들이 양손을 치켜들고 그에 호응했다.
“와아아아!”
“옳소! 우리 쪽에서 인간이랑 잘 지내려 하면 뭐 하나! 정작 인간 쪽에서 저렇게 나오는데!”
“평화주의라니, 역시 바보 같은 생각이었어!”
“우리를 더 경멸하는 건 인간이라고! 나가서 싸웁시다!”
거대한 함성이 광장을 뒤흔들었다. 마족들은 알리사 기념일을 위해 준비해두었던 종이가루, 꽃을 흩날리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 광경이 가히 ‘축제’와도 같았다.
‘젠장……!’
한편, 물결치는 마족들의 한가운데. 실비아와 란델만은 사색이 된 채 입술을 짓씹었다. 상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 * 실비아와 란델은 우선 자리를 피했다. 그들은 마족이 없는, 한산한 공원 구석에서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로 뮐러 쉐르트 공작이 그런 이유로 마왕을 공격한 걸까요?”
실비아는 한숨을 쉬다가 란델이 던진 물음에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흰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뮐러 쉐르트 공작은 그간 인간과의 화합을 주장해 왔지. 그런 상황에서 인간들이 켈베티아로의 진격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자신의 권력에 흠이 날 걸 걱정한 것인지, 이블린 폐하를 죽여 입을 막으려 들었다.
베이나스는 뮐러 쉐르트가 평화주의 파벌을 위해 마왕을 해하려 들었다고 했다. 마족들의 입을 통해 들은 뮐러 쉐르트는 마족치고는 굉장히 점잖은 이이긴 했지만. 실비아는 인간이 권력 앞에서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고. 켈베티아에 와서 마족이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인정했다. 그러니 혹시나, 뮐러 쉐르트가 정말로 평화주의 파벌을 위해 인간의 켈베티아 정벌 소식이 퍼져나가지 않도록 막았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
고민하던 실비아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 란델을 바라보았다.
“……쉐르트 공작의 말도 들어보고 판단해야 할 것 같아요. 일단 공작을 만나러 가죠. 가는 김에 마왕의 상태도 한번 확인하고요.”
실비아와 란델이 원하는 것은 마족 전체와의 평화협정이고,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마왕뿐이었다. 하지만 베이나스는 쾌락주의 파벌의 수장 격인 마족이었다. 그런 그가, 켈베티아 정벌 소식까지 들은 지금 인간과의 평화협정에 동의할 리가 없었다.
‘이블린……이라는 마왕이 말이 얼마나 통하는 상대일지는 모르겠지만.’
베이나스가 아닌 마왕이 협상 타결의 가능성이 크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실비아의 말을 들은 란델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쉐르트 공작은 지하 감옥에 투옥되어 있다고 했지만, 마왕의 거처에 관한 이야기는 들은 것이 없는데. 혹 마왕성 안의 구조를 알고 계십니까?”
“……아뇨. 사실 나는 평야에서 바시스의 목을 따자마자 인간 세상으로 뛰어나가서, 마왕성 안은 구경도 못 해봤어요.”
“아…….”
“…….”
“…….”
실비아와 란델은 잠시 나란히 침묵했다.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왕성에 숨어들어 마왕의 거처를 알아내고, 마왕의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쉐르트 공작을 찾아 지하까지 내려갈 생각을 하니 조금 암담해서였다. 잠시간의 정적이 지난 후. 란델이 애써 표정을 밝게 하며 입을 뗐다.
“……일단 갈까요.”
“좋아요. 함께라면 어떻게든 되겠죠.”
“방금 그 말은 약간 감동이었습니다.”
“조금 더 감동해도 돼요.”
“무척이나 영광입니다, 부인.”
실비아가 란델의 손깍지를 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란델이 씩 웃으며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 부부는 나들이라도 가듯이 마왕성을 향해 걸음을 뗐다. 나란히 걷고 있자니 어쩐지 핏빛 하늘도 노을처럼 느껴졌다.
* * * 마족이 마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은 실비아와 란델에게 의외의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두 사람은 우선 실비아의 어둠으로 인간의 향을 감추고 마왕성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경비병들의 대화를 통해 마왕 이블린이 성 꼭대기의 침실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위층으로 향했다. 이따금 경비병들이 그들이 몸에 두르고 있는 어둠을 눈치채고 다가오려 하면, 란델은 작은 검기를 만들어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의 반대 방향으로 날렸다. 가령 지금처럼. 쾅! 작은 소리와 함께 복도 저편의 벽이 부서졌다. 그 소리에, 실비아와 란델이 몸을 숨긴 모퉁이 쪽으로 다가오던 경비병이 놀라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야!”
“웬 놈이냐!”
“저쪽 복도다!”
경비병들이 소란스럽게 부서진 벽 앞으로 몰려들었다. 실비아와 란델은 그 틈을 타 슬쩍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실비아의 어둠으로 향을 숨기고, 란델의 검기로 시선을 돌리기를 몇 번. 이윽고 두 사람은 상당히 수월히 마왕의 침실에 다다랐다.
“……아래가 왜 이렇게 시끄러워?”
“그러게. 확인해보고 올까?”
“아서라. 무슨 일이 있으면 어련히 말해주러 오겠지. 베이나스 님께서 이 앞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것 잊었어?”
실비아와 란델은 아래층에서의 소란으로 인해 경비병들이 잡담을 나누는 틈을 타 마왕의 침실로 숨어들었다. 달칵. 등 뒤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방은 아늑하다는 감상이 들 정도로 적당히 어둑했다. 실비아는 침대에 죽은 듯 누운 인영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저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