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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93/118)

93. 처음이자 마지막으로202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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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비아는 침대에 죽은 듯 누운 인영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16558821730558.jpg‘저자가…….’

그녀는 잠시 침대 위에 누운 마왕을 바라보았다. 어둑한 방 안.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은은한 불꽃이 침대 위로 흐릿한 불빛을 드리웠다. 실비아는 발소리를 죽이고 침대 곁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흠칫했다.

16558821730558.jpg“……!”

마왕은 두 눈을 멍하니 뜬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16558821730558.jpg‘……정신을 차린 건가?’

실비아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긴장시켰다. 그녀는 란델을 향해 다급하게 손짓하여 상황을 알린 후 그와 함께 조심스럽게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들이 침대 지척에 다다를 때까지 마왕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붉은 눈이 깜박임조차 없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이 조금 섬뜩했다. 실비아는 의아함에 미간을 찌푸린 채 마왕을 바라보았다.

16558821730558.jpg‘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그녀는 그런 생각에 살짝 고개를 숙여 마왕의 심장 박동을 확인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마왕의 심장은 정상적으로 뛰고 있었다. 호흡도 있었고. 하지만 그 외에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미동 없는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감기지 않은 두 눈이 특히나.

16558821730576.jpg“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까 베이나스 페룬과 그 측근이라는 자는 분명, 쉐르트 공작이 마왕을 공격하다가 붙잡혔다고 했는데…….”

그때 실비아와 마찬가지로 마왕을 살피던 란델이 조용히 속삭였다. 그의 손이 마왕이 덮은 이불을 살짝 걷어냈다.

16558821730576.jpg“외상의 흔적 자체가 없습니다. 치유마법이나 그와 유사한 효과로 치료한 것과는 느낌이…… 달라요.”

마치 처음부터 다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불 아래로 드러난 마왕의 차림새는 말끔했다. 붕대를 감은 흔적도, 피가 묻어 있지도 않았다. 여러모로 왕성에서 나왔던 마족들의 설명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16558821730558.jpg“잠시만요.”

실비아는 혹시 그들이 놓친 부분이 있을까 싶어 마왕의 얼굴 부근으로 손을 뻗다가 움찔 굳어졌다. 란델이 고개를 갸웃했다.

16558821730576.jpg“실비아?”

그리고 다음 순간. 실낱같은 속삭임이 실비아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16558821730558.jpg“……마력.”

16558821730576.jpg“예?”

16558821730558.jpg“마력의 흔적이 느껴져요.”

16558821730576.jpg“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란델이 실비아의 말에 반발하듯 눈썹을 찡그렸다. 마족은 마력을 다룰 수 없다. 게다가 현재 켈베티아에 넘어와 있는 인간은 란델과 실비아뿐이었다. 그런데 마력의 흔적이라니? 하지만 실비아는 조심스럽게 마왕의 볼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금빛 눈에 확신이 스몄다.

16558821730558.jpg“확실해요. 아무래도 정신계 마법에 당한 것 같은데.”

16558821730576.jpg“하지만 누가……. 게다가 켈베티아에서는 마력이 극히 불안정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란델의 말은 객관적 사실이었다. 미간을 좁힌 채 고민에 잠겼던 실비아의 머릿속으로 퍼뜩 한 가지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16558821730558.jpg“마력을 ‘직접’ 다루는 게 아니라.”

16558821730576.jpg“……!”

16558821730558.jpg“마력을 고정해둔 ‘마법석’ 같은 것을 이용한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죠.”

실비아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고 마력을 느끼는 데 집중했다.

16558821730558.jpg‘마법석을 이용한 정신계 마법의 효과를 지속시키려면 반드시 몸에 마법석을 지니고 있어야 하니까. 마법석을 찾아내 부순다면 마왕을 깨울 수 있을지도 몰라.’

물론 현존하는 마족 중 가장 강한 어둠의 힘을 지닌 마왕이다 보니 마력보다 어둠이 짙게 느껴져 흔적을 찾는 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실비아는 어둠과 마력을 동시에 느끼고 다룰 수 있었다. 집중한 탓에 이마에 미약하게 땀이 배어 나왔다. 실비아가 가까스로 마왕의 주위를 둘러싼 어둠 사이로 마력을 감지해내는 순간이었다.

16558821730558.jpg‘찾았……!’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란델과 실비아가 그대로 굳어졌다.

16558821761451.jpg“……선대 폐하. 베이나스 페룬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베이나스 페룬. 두 사람이 그 이름을 인지하는 것과 동시에 철컥,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돌아갔다. 란델과 실비아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불을 제대로 덮어두고 창가로 내달렸다. 그들은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창밖으로 몸을 날려 베이나스와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혹시나 베이나스가 그들의 흔적을 알아낼까 봐, 란델과 실비아는 성의 외벽을 타고 2층 근처까지 내려와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들은 성의 지붕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빠르게 속삭임을 주고받았다.

16558821730576.jpg“찾았습니까?”

16558821730558.jpg“네. 입속에 감춰뒀더라고요.”

실비아는 지독하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혀를 쯧 찼다. 마법석을 장신구 등으로 위장하여 몸에 지니게 할 줄 알았는데, 마력은 마왕의 입속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졌다.

16558821730558.jpg‘하긴. 몸에 달리 이상이 생긴 것도 아니고, 단순히 누워만 있는 마왕의 입속을 뒤져볼 미친놈은 없을 테니까.’

마법석의 위치를 찾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현재 마왕의 침실에 베이나스 페룬이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란델과 실비아는 최대한 빨리 뮐러 쉐르트 공작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두 사람은 어차피 베이나스 페룬이 마왕의 침실에 머무는 동안은 돌아갈 수 없으니, 그사이 쉐르트 공작을 찾아가자 결정했다. 미리 합을 맞춰본 덕인지, 마왕의 침실로 향하는 것보다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길이 수월했다. 마왕성의 지하 감옥은 굉장히 넓었다. 마족들이 날뛸 것을 우려한 것인지 철창 하나하나에서 어둠의 기운이 짙게 느껴졌다. 란델과 실비아는 지하 감옥의 입구 부근 방부터 가장 안쪽의 방까지 차례로 훑어보았다. 감옥의 안쪽에 가까워질 때마다 돌벽을 타고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그들은 감옥의 가장 안쪽 독방에 갇혀 있던 한 늙은 마족을 발견했다. 알리사 기념일을 맞아 죄인들을 상당수 사면한 것인지, 그 외에 다른 수감자가 없었기에 그가 뮐러 쉐르트라는 것을 알아보기는 쉬웠다. 끼익- 독방의 문을 열자 철창 너머의 뮐러 쉐르트가 어깨를 크게 흠칫했다. 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번에 시선에 날을 세웠다.

16558821761451.jpg“누구요?”

16558821730576.jpg“……당신이 뮐러 쉐르트인가?”

16558821761451.jpg“누구냐고 물었소. ……설마 베이나스 페룬의 수족이냐?”

뮐러는 란델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그것은 자신이 뮐러 쉐르트가 맞다는 확언이나 다름없었다. 란델과 실비아는 잠시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것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 느껴졌는지, 뮐러가 별안간 몸을 일으키더니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콰앙! 굉음과 함께 철창이 크게 흔들렸다. 란델은 뮐러가 땅을 박차는 것과 동시에 실비아를 제 뒤로 잡아당겼으나 뮐러는 철창을 붙들고 멈춰 섰다. 뮐러는 철창 사이로 란델과 실비아를 노려보며 조용히, 그러나 살벌하게 경고했다.

16558821761451.jpg“괜한 짓거리 하지 말고 돌아가라. 이 안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온다면 곧장 숨통을 끊어놓을 테니.”

마족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기백이었다. 란델과 실비아는 다시 한번 눈을 맞췄다. 그에 뮐러가 얼굴을 구기며 입을 열려던 차. 그들이 돌연 깊이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뮐러의 눈에 경악이 스쳤다.

16558821761451.jpg“……인간?”

그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복면 위로 드러난 피부색과 눈. 그것은 분명 마족이 아닌 ‘인간’의 것이었으므로.

16558821761451.jpg“인간이 대체 여기에 어떻게…….”

무의식중에 중얼거리던 뮐러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흠칫 어깨를 떨었다. 스스로 답을 찾아낸 그가 조금 전과 달리 다급한 목소리로 실비아와 란델에게 말을 붙였다.

16558821761451.jpg“호, 혹시 벌써 인간들과의 전쟁이 시작된 거요? 그래서……!”

16558821730576.jpg“그건 아니니 안심하게, 공작. 우리는 전쟁을 막기 위해 자네를 찾아온 거니까.”

16558821761451.jpg“정말이오?”

16558821730576.jpg“그래.”

란델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와 표정은 상대를 침착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 태도에서 그들이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게 느껴졌는지 뮐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긴장이 풀렸는지 철창을 쥔 채로 스르륵 주저앉았다. 하지만 뮐러의 평정은 얼마 가지 못했다. 인간이 나타났다는 충격, 그리고 벌써 전쟁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시고 나니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사실이 보였다. 뮐러는 실비아와 란델의 주위를 휘감고 있는 어둠을 눈치채고는 작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인간의 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슬슬 이 모든 게 다 제 헛된 망상은 아닌지 의심하면서 중얼거렸다.

16558821761451.jpg“설마 마족인데 인간 분장을 하고 나를 농락하는 것은 아니겠지.”

16558821730558.jpg“원한다면 잠시 어둠을 걷어 향을 확인하게 해줄 수는 있지만, 그건 흔적이 남아서 안 될 것 같네.”

16558821761451.jpg“…….”

뮐러는 떨리는 눈으로 실비아를 응시했다. 그가 철창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6558821761451.jpg“……어둠을 다룰 줄 아는 인간은 역사상 단 하나뿐이었소.”

16558821730558.jpg“…….”

16558821761451.jpg“그대는 대체 어떻게 어둠을 다룰 수 있는 것이오? 설마 그분의…….”

16558821730558.jpg“그것까지는 자네가 알 필요 없는 문제야.”

하지만 실비아는 뮐러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냈다. 마족과의 평화 협정에 그녀가 ‘알리사’였다는 사실은 필요 없었으니까. 실비아는 철창을 쥐고 무릎을 꿇고 있는 뮐러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낮췄다. 한쪽 무릎을 감옥 바닥에 대고 앉은 그녀가 진중하게 눈을 빛냈다.

16558821730558.jpg“뮐러 쉐르트. 정말로 자네가 이블린 헤이든 마왕을 해쳤나?”

16558821761451.jpg“절대 아니오!”

뮐러는 커다랗게 목소리를 높이며 부정했다. 실비아와 란델은 역시 예상대로라는 생각에 힐긋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사이 뮐러가 쉰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 * *

16558821761451.jpg-……뮐러. 우리가 과연 평생 본능을 억누르고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 오히려 본능을 억지로 억누르는 것이 나중에 더 끔찍한 일을 불러일으키는 것 아닐까?

  마왕, 이블린 헤이든은 마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도, 그 후에도 평생 쾌락주의와 평화주의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녀가 태어나는 순간을 함께했던 뮐러 쉐르트는 평화주의 파벌의 수장이었다. 하여 그는 이블린이 평화주의를 수용해주길 바라면서도 그녀와 친밀하다는 이유로 제 사상마저 강요하고 싶지 않아 최대한 말을 아꼈다. 이블린이 하는 말에도 분명 일리가 있었으므로. 그러던 중, 며칠 전 어둠 벌레들을 통해 인간들이 켈베티아 정벌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은밀히 이블린과 뮐러에게 전달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은 크게 당황했다.

16558821761451.jpg-전쟁……이라고?

16558821761451.jpg-예. 듣기로는 인간들의 왕세자가 모든 마족을…… 없애 이 지지부진한 갈등을 끝내겠다며 나섰다는군요.

  정보를 전하던 마족은 차마 자신의 왕에게 ‘죽여 없앤다’는 표현을 쓰지 못하고 황급히 말을 고쳤다. 이블린은 심각한 얼굴로 소식을 전해 듣고 조용히 수족을 돌려보냈다. 그녀는 이후 한참이나 소식을 듣던 자세 그대로 고민에 빠졌다.

16558821761451.jpg-전쟁…….

  이블린이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뮐러 역시 갑작스러운 전쟁 소식에 당황해 그녀의 곁에서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던 중, 무언가를 결심한 눈의 이블린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16558821761451.jpg-쉐르트 공작.

16558821761451.jpg-……예, 폐하.

16558821761451.jpg-신하들을 모아주게. 전쟁이 일어나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인간들과 회담을 열겠네.

  뮐러는 그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블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블린이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16558821761451.jpg-대전쟁 이후 긴 세월이 흘렀네. 이제는 우리도 그들을 배척해야 할지, 아니면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할 때야. 피를 흘리는 것은 회담 이후에 마음껏 해도 늦지 않으니 부탁하겠네.

16558821761451.jpg-……알겠습니다.

  뮐러는 잠자코 자신의 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베이나스 페룬을 비롯해, 자신의 아래로 강한 마족을 차례대로 알현실로 불러 모았다.

16558821761451.jpg-이리 급하게 회의를 소집하시다니. 어쩐 일이십니까, 폐하.

  베이나스 페룬이 이블린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이블린이 차분하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16558821761451.jpg-인간들이 마족과의 전쟁을 선포했다고 하네. 켈베티아와 이어지는 마법진을 만들어냈다는군.

16558821761451.jpg-……!

16558821761451.jpg-그래서 나는 인간들이 켈베티아의 땅을 밟고, 무고한 마족들이 피를 흘리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어볼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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