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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심판 (94/118)

94. 심판2022.02.21.

이블린의 말에, 알현실에는 소름 끼치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숨을 한번 고르고 말을 이으려던 순간.

16558821913823.jpg-……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폐하.

  차디찬 목소리가 한발 먼저 침묵을 깼다. 이블린은 분노한 베이나스 페룬을 발견하고 난처한 얼굴을 했다.

16558821913823.jpg-베이나스.

16558821913823.jpg-지금 제가 들은 것이 사실입니까? 인간들이 먼저 저희를 공격하겠노라 나섰는데, 폐하께서는 평화회담을 여시겠다고요.

  하, 실소한 그가 한 손으로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명백한 적의였다. 베이나스는 형형한 눈길로 이블린을 노려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16558821913823.jpg-당신은 마왕의 자격이 없어.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이블린은 알현실 안의 공기가 기이할 정도로 날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녀가 무언가 심상찮음을 깨닫고 몸을 일으키는 것보다 베이나스가 품 안에서 작은 보석을 꺼내 들고 이블린에게 달려드는 것이 빨랐다.

16558821913823.jpg-이게 무슨……!

16558821913823.jpg-마족의 긍지를 저버린 이블린 헤이든을 끌어내라!

16558821913823.jpg-쉐르트 공작도 한 패다! 잡아!

  동시에 알현실 안에 있던 마족의 7할 정도가 뮐러에게 달려들었다. 이블린은 제게 접근하는 베이나스를 보고 크게 손을 휘둘렀다. 몸을 숙여 공격을 피한 그가 재빨리 손을 뻗어 이블린의 발등에 보석을 가져다 댔다.

16558821913823.jpg-됐다……!

  베이나스가 희열에 찬 중얼거림을 뱉었다. 그러자 이블린이 별안간 고장 난 인형처럼 멍한 표정으로 움찔 멈춰 섰다. 직후 그녀의 몸이 휘청하더니 속절없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제게 달려드는 마족들을 쳐내던 뮐러가 그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16558821913823.jpg-폐하!

  그러나 뮐러는 오래지 않아 베이나스와 다른 마족들에 의해 온몸을 포박당했다. 제아무리 켈베티아의 서열 2위인 그라지만, 3위인 베이나스를 비롯한 마족들이 우르르 달려드는 것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16558821913823.jpg“그 모든 일련의 일들이 꼭, 예전부터 준비해온 것처럼 일사불란하고 빨랐소. 게다가 폐하를 기절시킨 그 보석은 대체 어디서 구해온 것인지…….”

뮐러가 창살을 붙들고 처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을 듣던 실비아는 추측에 확신이 더해지는 듯했다.

16558821946307.jpg‘다비드의 최측근 중에 왕성 마법사가 있었지.’

그리고 현재 인간 세상에서 정신계 마법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건 왕성 마법사들뿐이었다. 다비드가 베이나스와 모종의 거래를 하여 그에게 마법석을 건넸다고 하면 아귀가 맞았다.

16558821946307.jpg‘안 그래도 어떻게 어둠 벌레들을 제 수족처럼 다룰 수 있나 궁금했는데…….’

어둠 벌레들의 신은 어디까지나 ‘마족’이다. ‘다비드’가 어둠을 다룰 수 있다고는 하나, 그는 인간의 몸을 하고 있었다. 이는 곧 어둠 벌레들이 그를 선뜻 따를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고위 마족이 직접 나서서 그를 도우라 명령이라도 하지 않은 이상은. 그래서 다비드는 베이나스의 입을 빌려 어둠 벌레들을 회유한 듯했다. 그 대가로 베이나스에게 마왕을 끌어내릴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 것이고. 대체 베이나스와는 언제, 또 어떻게 접촉한 것일까. 실비아는 다비드를 참 음흉한 작자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쯧 찼다. 뮐러가 고개를 숙인 채로 울분을 토했다.

16558821913823.jpg“페룬은 그렇게 비겁한 수단으로 폐하를 끌어내려놓고, 정작 나와 평화주의 파벌 마족들에게 누명을 씌워 전쟁을 일으킬 생각인 거요! 쾌락주의 마족들에게 전쟁이란 축제나 다름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대로라면 무고한 마족들까지……!”

그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마족들이 피를 흘릴 것을 걱정하는 듯 절절 끓고 있었다. 란델과 실비아는 그를 앞에 두고 시선을 한 번 교환한 후 입을 열었다.

16558821946322.jpg“우리도 자네와 같은 생각이야.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볼 생각은 없네. 그것이 누군가의 사리사욕으로 일어난 전쟁에서라면 더더욱.”

란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음성에 뮐러가 고개를 들었다. 실비아가 그와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어받았다.

16558821946307.jpg“그러기 위해선 왕세자가 마족과 내통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아마 베이나스 페룬이 마왕의 자리를 대가로 거래한 듯싶은데, 짐작 가는 곳이 있나? 거기에 마왕의 지장이 찍힌 평화회담 요청서도 있어야 해.”

켈베티아와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왕세자 다비드가 마족과 내통했다는 확실한 증거, 그리고 마왕이 공인한 평화회담 요청서. 뮐러는 실비아의 말을 듣고 고민에 잠겼다.

16558821913823.jpg“베이나스 페룬은 천성이 남을 믿을 줄 모르고 음흉합니다. 그런 놈이라면 아마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왕세자와 접촉했다는 흔적을 남겨두긴 했을 텐데, 그 증거를 품에 넣고 다닐 가능성이…….”

그때였다. 바깥이 돌연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누군가의 경악한 외침이 지하 감옥을 울렸다.

16558821913823.jpg“폐, 폐하를 뵙습니다!”

16558821946342.jpg“……!”

란델과 실비아, 뮐러가 나란히 흠칫 굳어졌다. 이블린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폐하’라고 불릴 만한 마족이라면 하나뿐이었다.

16558821946307.jpg‘베이나스……!’

실비아는 입술을 깨물고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뮐러가 갇힌 이곳은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돌벽으로 막힌 독방이었고, 나갈 곳은 지하 감옥과 이어지는 문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로 미루어보아 베이나스는 이미 지하 감옥에 발을 들인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저 문을 열고 나가는 건 자살행위였다.

16558821946307.jpg“란델, 이쪽으로 와요!”

실비아는 결국 란델의 손을 잡아채 창살과 벽이 직각으로 맞닿는 구석으로 향했다. 란델을 끌어안고 몸을 최대한 웅크린 그녀가 이를 악물고 그의 어깨 너머로 마력을 움직였다.

16558821946307.jpg‘할 수 있어.’

완벽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란델만큼은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한때나마 달았던, ‘대마법사’라는 칭호가 부끄러우리라. 실비아는 그렇게 믿으며 마법진을 간신히 마무리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지워지는 것과 동시에, 개인 감옥의 문이 벌컥 열렸다.

16558821913823.jpg“…….”

독방의 문을 열어젖히고 나타난 베이나스 페룬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독방 안을 샅샅이 살폈다. 란델과 실비아는 베이나스의 시선이 그들이 몸을 숨긴 곳을 스쳐 지나가자 어깨를 떨었으나, 곧 숨을 죽이며 상황을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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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겁처럼 느껴지는 몇 초가 지나고. 베이나스가 탐색하던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손짓했다. 철컹- 그러자 그를 섬기는 마족들이 빠르게 움직여 독방 철창의 문을 열었다. 뮐러는 구속구까지 찬 상황에서 수적인 열세라는 것을 인지했는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주저앉아 있었다.

16558821913823.jpg“다들 나가서 대기하도록.”

베이나스의 명령에 마족들이 빠르게 독방의 문을 닫고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문 바로 앞에서 대기하는 수십의 기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베이나스는 뮐러가 갇혀 있는 철창 안쪽으로 한 발 걸어 들어가며 입술을 뗐다.

16558821913823.jpg“뮐러 쉐르트.”

16558821913823.jpg“…….”

16558821913823.jpg“혹시 누가 찾아오지는 않았나? 전대 폐하의 방에 이질적인 기운이 남아 있던데.”

그 말에 란델과 실비아가 소리 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실비아가 속으로 혀를 찼다.

16558821946307.jpg‘나름대로 어둠을 갈무리한다고 했던 건데.’

이러나저러나 켈베티아에서 세 번째로 강하다는 칭호를 거저먹은 것은 아닌 듯했다.

16558821913823.jpg“크큭…….”

뮐러는 ‘전대 폐하’라는 말에 미친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가 얼굴 한가득 조소를 띄운 채 비아냥댔다.

16558821913823.jpg“있다고 한들 내가 그것을 네놈에게 말해줄 것 같으냐?”

16558821913823.jpg“…….”

뮐러의 말에 베이나스의 눈이 한층 가늘어졌다. 다음 순간, 그가 망설임 없이 발을 움직여 뮐러를 걷어찼다. 퍽!

16558821913823.jpg“커헉!”

뮐러가 새된 숨을 뱉으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와 대조되게, 베이나스는 조금 전 뮐러를 걷어찬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아하고 느긋한 모습으로 말했다.

16558821913823.jpg“새 마왕에겐 마땅한 예의를 갖춰야지.”

16558821913823.jpg“……더러운 반역자 같으니.”

뮐러는 고통스럽게 숨을 헐떡이는 사이로도 꿋꿋이 베이나스를 모욕했다. 베이나스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는 땅바닥에 얼굴을 댄 채 고통스럽게 헐떡이는 뮐러의 얼굴을 우악스럽게 쥐어서 들어 올렸다. 뮐러와 코앞에서 시선을 맞춘 베이나스가 형형한 눈으로 웃었다.

16558821913823.jpg“아니지.”

16558821913823.jpg“…….”

16558821913823.jpg“우리는 원래부터 가장 강한 자가 왕위를 이어받아 오지 않았나. 친애하는 전대 마왕께선 산송장이 되어 누워계시고, 너도 내일 해가 뜨면 목이 잘리게 될 테니…….”

베이나스가 은근한 어조로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손톱이 뮐러의 얼굴을 파고들어 상처를 냈다. 뮐러가 옅은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순간. 실비아와 란델의 주위를 아슬아슬하게 두르고 있던 마력이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16558821913823.jpg“켈베티아에서 가장 강한 건 바로 나다.”

실비아가 이를 악물고 마력을 통제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력의 통제가 힘들어졌다. 마력이 흔들림에 따라 실비아와 란델의 몸이 희미하게 드러날락 말락 한 상태를 반복했다. 고통으로 신음을 삼키다가 시야 한구석에 란델과 실비아의 모습이 비치는 것을 확인한 뮐러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16558821913823.jpg“……?”

그 광경을 목격한 베이나스가 의아한 기색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동시에 찰나 마력이 크게 흔들리며,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실비아와 란델의 모습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16558821946322.jpg‘이런……!’

란델이 낭패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그가 살벌하게 눈을 빛내며 검 손잡이로 손을 가져가는 순간이었다. 퉤. 작은 소리와 함께 베이나스의 얼굴에 침이 튀었다. 정확히는 뮐러가 그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그의 얼굴에 침을 뱉은 것이었다.

16558821913823.jpg“이게 무슨…….”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베이나스가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뮐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뮐러는 그 얼빠진 얼굴을 보며 보란 듯 웃었다.

16558821913823.jpg“알리사께서 너를 심판하실 거다.”

16558821913823.jpg“…….”

그 말에, 독방에 들어선 이후로 줄곧 여유롭던 베이나스의 얼굴이 무너졌다. 그 후 이어진 것은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퍽! 퍼억! 베이나스는 뮐러를 죽일 것처럼, 그러나 죽지는 않을 만큼 폭행했다. 폭행이 이어지는 내내 란델은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실비아의 귀를 가려주었다.

16558821913823.jpg“후…….”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베이나스가 긴 숨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말아 쥔 주먹에서 그의 것이 아닌 피가 뚝뚝 떨어졌다. 베이나스는 엉망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진 뮐러를 보며 입매를 뒤틀었다.

16558821913823.jpg“글쎄.”

16558821913823.jpg“…….”

16558821913823.jpg“그건 이미 뒤져버리신 우리 초대 폐하께서 다시 나타나신다면, 그때 가서 생각해보도록 하지.”

베이나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철창의 문을 닫고 독방을 나가버렸다. 바깥에서 잠시 소란이 일었다.

16558821913823.jpg“폐하, 피가……!”

16558821913823.jpg“내 피가 아니다. 닥치고 닦을 것이나 가져와.”

16558821913823.jpg“예, 예!”

기척들이 점차 멀어졌다. 란델과 실비아는 저 멀리 지하 감옥의 문이 철컹, 소리를 내며 닫히는 것을 확인한 즉시 몸을 일으켜 뮐러를 살폈다. 실비아가 다급하게 어둠을 일으켜 뮐러의 상처를 지혈했다.

16558821946307.jpg“……쉐르트 공작.”

실비아는 뮐러에게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그것은 란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꾸조차 하지 못하던 뮐러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는 벌써 2대째 마왕의 곁을 지키는 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형형한 기운을 내뿜으며 소리 죽여 외쳤다.

16558821913823.jpg“가시오!”

16558821946307.jpg“……!”

16558821913823.jpg“폐하만, 이블린 폐하만 깨우면 되오. 폐하께서 깨어나시면 베이나스 저놈을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니, 가서 폐하를 깨워주시오.”

뮐러는 그 말을 하며 필사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몇 번 헛손질한 그가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내어 실비아에게 건넸다.

16558821913823.jpg“조금 전 베이나스가 했던 말로 미루어보아, 이블린 폐하께서 계신 방 주변의 경비가 강화되었을 거요. 둘만으로는 무리일 게 분명하니 내 신하들과 접촉해 협조를 받으시오. 이 반지를 보여주면 될 겁니다. 반드시 폐하를 깨워주시오!”

그 간곡한 외침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실비아와 란델은 철창 사이로 뮐러의 손을 한 번 꾹 그러쥔 후, 독방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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