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내려와2022.02.24.
사실 뮐러의 신하들과 함께 마왕성을 치자는 계획은 상당한 위험을 수반했다.
-지금 상황에서, 뮐러 쉐르트를 비롯한 핵심 인물이 아닌 마족에게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면 자칫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실비아는 덤덤히 설명했고, 란델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지금 마족들은 ‘인간들이 켈베티아와 전쟁을 선포했다’라는 사실에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이 켈베티아에 있다는 소식이 퍼지면, 마족 중 열에 아홉은 그들이 켈베티아를 무너트리기 위한 첩자라고 단정 지을 것이다. 상대가 뮐러 휘하의 평화주의 파벌 마족이라고 해도 그들이 인간임을 알게 되는 순간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베이나스를 저지하기도 전에 다른 마족들에게 섣불리 반감을 사는 일은 막아야 했다.
-우선 뮐러가 준 반지는 정말 방법이 없을 때 쓰도록 하죠. 지금은 바깥을 확인해봐야겠습니다.
그래서 실비아와 란델은 독방을 나선 직후, 둘만으로 마왕성을 쳐 빠르게 마왕의 방까지 올라가자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계획은, 뮐러의 예상대로 세 걸음마다 자리한 경비들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다. 이 정도로 경비가 강화되었다면 아까처럼 얕은 수작으로는 마왕의 방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 베이나스 페룬이 직접 이블린 마왕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말까지 돌고 있었으니. 결국 실비아와 란델은 한숨을 내쉬며 뮐러 쉐르트의 최측근이라는 마족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 * * 그날, 늦은 밤. 마왕성의 주위를 둘러싼 성벽 아래로 검은 그림자들이 은밀히 모여들었다.
‘공작님…….’
쉐르트 공작의 최측근, 빌리 보르트는 초조한 마음으로 닫힌 성문을 바라보았다. 곧 낮에 공모했던 대로, 성안에 간신히 심어두었던 평화주의 파벌 마족 몇이 성문을 열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일행은 곧장 왕성 안으로 침입하여 반은 마왕 이블린 헤이든을 구하러 가고, 반은 지하 감옥에 갇힌 뮐러 쉐르트를 구하러 가기로 했다.
‘어떻게든 내전은 피하고 싶었는데.’
빌리는 탄식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쾌락주의니, 평화주의니 의견이 갈리기는 하지만. 결국 그들은 같은 마족이었고, 평화주의 또한 궁극적으로는 ‘마족’의 무고한 피를 흘리지 말자는 주의였기 때문에 그는 끝까지 내전 없이 쾌락주의 파벌을 설득하고 싶었다. 그러나 쾌락주의 파벌이 먼저 반역을 일으켰고, 급기야 내일 아침 뮐러 쉐르트를 사형에 처하겠다고 공표했다. 그런 상황이니 전투는 불가피했다. 빌리 또한 그 사실을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었으나 동족의 피를 봐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불안한 눈길로 제 앞에서 성벽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믿어도 되는 거겠지?’
빌리의 앞에서 후드와 망토 등으로 온몸을 꽁꽁 싸맨 마족……들은 뮐러 쉐르트가 자신들을 보냈다고 주장했다.
-공작께서 이 반지를 넘겨주시며 자네를 찾아가라 하셨네.
빌리는 난데없이 제 집무실 창문을 박살내고 나타난 두 마족의 모습에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둘 중 체구가 작은 쪽의 어둠에 입이 막혀 그러지 못했다. 이후 반강제적으로 의자에 앉혀져 그들에게 상황에 대한 설명을 주입받은 후, 뮐러 쉐르트의 반지까지 확인한 후에야 그는 어느 정도 진정할 수 있었다.
-……공작님께 내가 모르는 수하가 있었다고?
빌리는 소리를 지르지 않기로 약속했음에도 영 경계심을 거두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빌리는 뮐러 쉐르트의 친아들에 가까운 최측근이었다. 뮐러 쉐르트가 아는 모든 것을 빌리가 알았고, 빌리가 아는 모든 것을 뮐러 역시 알았다. 그런데 뮐러에게 제가 모르는 수하가 따로 있었다니. 그것도 단숨에 저를 제압할 정도로 어둠을 능숙히 다룰 줄 아는 마족이.
‘공작님의 반지와 그 안에 담긴 어둠은 진짜였지만…….’
의심과 경계를 거듭하던 빌리는 내일 아침 뮐러 쉐르트의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새 마왕의 공표를 듣고 나서야 그들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자신들을 ‘비아’, ‘데르’라고 소개한 두 마족은 어째서인지 복면과 후드 등으로 온몸을 꽁꽁 가린 채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러모로 미심쩍은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반지로 인해 뮐러가 보낸 자들이라는 점은 확실했기에 빌리는 그들과 협력했다. 뮐러 쉐르트를 따르는 평화주의 파벌 귀족들과 접촉하고, 혹시 몰라 마왕성 안에 숨겨두었던 평화주의 파벌 마족에게도 은밀히 연락을 취했다. 베이나스가 뮐러 쉐르트의 탈출을 염려해서인지 경비 인력이 배로 늘어나 있어 쉽지는 않았지만. 빌리는 가까스로 성안의 세력에게 자정에 맞추어 성문을 열 것을 지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빌리는 비아와 데르, 평화주의 파벌 마족들을 이끌고 성벽 아래에 몸을 숨기게 된 것이었다.
‘이제 곧이다.’
빌리는 시간을 가늠했다. 이제 곧 성안의 평화주의 마족들이 성문을 열기로 한 시각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애써 초조함을 가다듬었다. 그때 비아가 갑작스레 그를 돌아보았다. 빌리는 반사적으로 흠칫했다.
“빌리 보르트.”
“……왜.”
빌리는 비아가 창문을 깨고 나타나 그의 입을 틀어막았던 기억 때문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가, 그런 자신의 반응이 부끄러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아는 한결같이 덤덤했다. 그녀가 빌리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혹시 몰라서 다시 말하지만. 쉐르트 공작……님은 지하 감옥의 가장 안쪽 독방에 있어. 그래도 통로가 일직선이라 잘 이용하면 큰 피해 없이 독방까지 도달할 수 있을 거야. 명심해.”
“……알았다. 나는 두 번이나 들은 걸 잊을 만큼 멍청한 놈이 아니야.”
“그렇다니 다행이네.”
비아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웃음기가 스민 것도 같았다.
‘방금…… 웃은 건가? 비아 저게?’
빌리는 순간 당황해 눈을 끔벅이다가, ‘데르’가 말없이 자신을 돌아보자 왠지 모를 위압감에 황급히 시선을 돌려버렸다.
‘뭐, 뭐야. 왜 저렇게 봐?’
아무래도 비아와 데르가 연인 관계라는 수하들의 숙덕거림은 어느 정도 사실인 듯했다. 빌리는 왠지 모를 패배감에 잠시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뮐러 쉐르트의 최측근답게, 이내 잡념을 털어낸 빌리가 다른 이들을 둘러보며 재차 작전을 확인했다.
“나를 포함한 1조는 성문 안으로 진입하는 즉시 지하 감옥으로 향해 쉐르트 공작님을 구출한다. 그리고 비아와 데르를 포함한 2조는 곧장 최상층, 폐하의 침실로 진격하여 폐하를 깨운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마족들의 얼굴에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 가운데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지 않게 덤덤한 비아와 데르는 유독 눈에 띄었다. 그리고 백전노장 같은 그들의 분위기는 다른 이들에게 기이한 차분함을 선사했다.
“……시간이 됐다.”
나직이 읊조린 데르가 검을 뽑아들었다. 그에 마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성문 쪽을 향했다. 커다란 성문은 영원히 닫혀 있을 것처럼 굳건해 보였다. 하지만 얼마 후, 성문 너머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성문이 조금씩 열렸다. 끼이익- 열린 성문 틈으로 빌리가 아는 얼굴이 튀어나왔다. 뮐러 쉐르트를 따르는 가신 중 하나였다.
‘지금!’
빌리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비아, 데르, 빌리를 비롯한 평화주의 파벌이 날듯이 성문 쪽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냐!”
“성문이 열렸습니다!”
한발 늦게 경비를 서던 마족들로부터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급하게 성문을 다시 닫으려 애썼으나, 빌리의 세력은 이미 성벽 안쪽으로 모조리 발을 디딘 후였다.
“침입자! 침입자다!”
“평화주의 파벌이 반역을 일으켰다!”
“막아! 폐하께…… 커헉!”
성벽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빌리는 계획대로 난장을 틈타 1조와 함께 공작을 찾으러 옆쪽으로 빠지기 직전, 비아와 데르를 힐긋 돌아보았다.
‘……실력 하나는 소름 끼칠 정도로군.’
데르는 앞서서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마족임에도 어둠을 사용하지 않는 모습이 다소 의아했으나,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쾌락주의 마족들을 보면 굳이 어둠을 다룰 필요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절로 입이 벌어질 만큼 대단한 실력자였으나, 그런 데르조차 비아에는 미치지 못했다. 콰직!
“크아아악!”
비아는 데르와 다르게 어둠을 사용했다. 다만 그녀가 어둠을 다루는 방식의 능숙함, 그 어둠의 크기가 소름이 끼쳤다. 비아의 손짓은 음악을 지휘하듯 유려했다. 하지만 그 손짓에 맞추어 울려 퍼지는 것은 아름다운 선율이 아닌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빌리는 잘 벼려진 어둠의 기운에 살이 에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저 살기의 당사자가 아님에도 목이 달아날 듯한 두려움이 일었다.
‘대체 어디서 저런 녀석이 나타난 거지?’
마족은 타고나기를 호전적이고 호승심이 강하다. 저만한 힘을 갖춘 마족이라면 이미 고위 귀족 자리를 꿰차고 있어야 자연스러웠다. 아니, 사실 비아가 어둠을 다루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쉐르트 공작, 혹은…….
‘……마왕.’
꽤 불경한 생각이었으나 진실이었다. ‘비아라는 저 마족은 쉐르트 공작, 혹은 마왕에 버금가게 강하다’라는 것이 빌리의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결국 빌리는 수족의 재촉을 듣기 전까지 넋을 놓고 비아가 힘을 쓰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간신히 지하 감옥으로 발을 떼었다. 한편 비아, 그러니까 ‘실비아’는 일행을 이끌어 순식간에 본성 앞에 도달했다. 그녀는 발톱을 세우고 제게 달려드는 마족을 무자비하게 쳐내며 란델을 힐끔 일별했다.
‘진짜 괴물이라니까. 혹시 정체를 들킬까 봐 검기도 다루지 못하는 상황인데 저 정도라니.’
그녀는 마력이나 어둠을 다루지 않고, 순수하게 지금까지 자신이 갈고닦아온 무예와 검술만으로 마족을 무너트리는 란델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란델을 보며 기함하는 것은 실비아뿐만이 아니었다. 성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족 병사들 역시 검 한 자루로 주위를 휩쓰는 란델을 보고 기겁했다.
“대체 어디서 저런 놈이……!”
“크헉!”
그들은 다급하게 어둠을 불러일으켜 란델을 공격하거나,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거나, 마물을 불러내어 그를 막아서려 했지만 그 어느 것도 란델에게 닿지 못했다. 실비아는 그의 실력에 감탄과 시기를 동시에 느끼면서도, 결국 그 모든 것이 란델이 상처 입지 않도록 할 것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성을 지키는 마족이 많긴 하지만, 이대로면 곧 성안에 진입할 수 있겠어. 베이나스 페룬은 아직도 이블린 마왕의 방에 있나?’
실비아는 제 다리를 물려 하는 마물을 어둠을 실어 걷어차고 본성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
본성의 정면, 높은 곳에 위치한 발코니에 나와 서 있는 베이나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베이나스는 두 수하를 등 뒤에 둔 채 발코니에 서서 차디찬 눈으로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아악!”
“폐, 폐하를…… 지키…….”
베이나스는 란델과 평화주의 마족에 의해 속절없이 쓰러지는 제 병사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더니 혀를 찼다.
‘멍청한 놈들.’
베이나스가 중얼거리는 입 모양을 읽어낸 순간. 실비아의 안에서 무언가 울컥 치받았다. 그가 저렇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서 있는 동안에도, 아래에서는 수많은 쾌락주의 마족들이 그를 위해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뭐?
‘멍청한 놈?’
실비아의 눈 가운데를 물들이고 있던 붉은 기운이 순간적으로 부피를 키웠다.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베이나스가 흠칫 어깨를 떨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뭐지?’
방금, 거대한 그림자가 이쪽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베이나스는 난간을 짚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러자 혼란한 전장 속, 홀로 가만히 선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는 분명 천으로 얼굴을 포함한 온몸을 가리고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시선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 순간.
“……내려와.”
콰르릉!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귓가를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그가 발 디디고 서 있던 발코니가 굉음을 내며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