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강함의 의미2022.02.28.
“큭……!”
“이게 무슨!”
“폐하!”
베이나스와 두 수하가 당황해 휘청였다. 수하들은 당혹한 와중에도 베이나스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베이나스의 시선은 조금 전 ‘내려와’라는 말을 뱉은 인영에게 붙박여 있었다. 그는 한평생 지배하는 자로서 살아왔다. 이제는 켈베티아 유일의 왕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저런 발칙한 말을 꺼내놓은 것도 모자라 발코니를 부수기까지……! 베이나스의 이마에 힘줄이 빠직 돋았다. 급하게 작은 날개를 펼친 두 수하가 그를 붙잡으려는 찰나. 발코니를 부순 그림자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베이나스의 발목을 휘감아 땅으로 패대기치려 했다. 그것이 베이나스의 역린을 건드렸다. 분노한 그가 으르렁대며 날개를 펼쳤다. 불길한 검은 날개가 그의 등 뒤로 넓게 펼쳐졌다.
“감히……!”
베이나스가 목 안을 긁듯이 포효하며 곧장 실비아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손톱을 바짝 세우고 어둠을 실어 손을 휘둘렀다. 콰광! 실비아가 재빨리 자리를 피하자 그가 날린 어둠이 애꿎은 땅을 갈랐다. 거대한 짐승이 발톱으로 땅을 파낸 것 같은 자국이 남았다. 그것을 본 마족들이 쾌락주의, 평화주의 할 것 없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히, 히익!”
그사이 실비아가 움직였다. 그녀는 제 앞으로 쏟아지는 마물들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칼날 같은 바람이 일며 마물들이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죽어라!”
그 사이로 베이나스가 기다렸다는 듯 불쑥 튀어나왔다. 그가 붉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어둠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낫을 휘둘렀다. 실비아는 긴 창을 만들어내 그 공격을 막았다. 카가각! 낫과 창이 부딪치며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 주위로 날카롭게 일어난 어둠이 서로를 공격하듯 부딪쳤다가 깨어지기를 반복했다. 마족들은 행여 그 파편에 목이라도 베일까 두려워하며 점점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어느새 실비아와 베이나스의 주변으로 작은 공터 같은 원이 생겨났다.
“실……비아!”
란델은 저도 모르게 실비아의 본명을 부르려다가 급하게 말을 바꾸며 그녀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발코니에서 전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베이나스의 수하들이 그가 실비아를 돕지 못하도록 앞을 막아섰다. 후드에 가려진 연녹색 눈이 살기로 형형해졌다.
“비켜라.”
란델이 이를 으득 갈고 검을 휘둘렀다. 그 살벌한 일격에 마족들은 순간 본능적으로 굳어질 뻔하였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란델과 공방을 이어갔다. 한편, 실비아는 베이나스의 낫을 쳐내고 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가 날개를 펼쳐 허공으로 피하고는 다시 실비아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본 실비아가 땅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베이나스의 낫이 땅에 박히며 쩌적, 하는 소리가 났다. 베이나스는 낫을 뽑아 들며 광소했다.
“어디서 나타난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만 포기해라. 설마하니 너와 내 격차조차 느끼지 못하는 반푼이는 아니겠지.”
베이나스는 실비아가 치명적인 공격을 하기보다는 그의 공격을 쳐내고 피하는 데 집중했기에 그녀가 자신을 버거워한다고 판단했다. 그가 낫으로 실비아를 가리키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항복한다면 네 목숨을 살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내 수하로 거두어주도록 하지.”
“폐하!”
“어찌 저런 자를……!”
그 말을 들은 쾌락주의 마족 몇몇이 당혹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조금 전 실비아가 현 마왕인 베이나스의 공격을 받아낼 정도의 실력자라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에 그 이상 항의하지는 못했다. 베이나스는 오만하게 턱 끝을 치켜들고 실비아가 제 앞에 무릎을 꿇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실비아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자리에 선 채 가볍게 후드를 끌어 내린 그녀가 덤덤하게 조소했다.
“헛소리를.”
“……뭐?”
베이나스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실비아는 냉정하게 중얼거렸다.
“마족 수준도 많이 낮아졌군그래. 마왕이라는 자의 역량이 이것밖에 안 되다니.”
실비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베이나스의 실력을 어느 정도 파악하기 위해 일부러 그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몸을 지키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드러난 베이나스의 실력은 란델과 제 몸에 어둠을 두르고 있어야 한다는 제약을 제외하고도 상대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녀는 진심을 그득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내가 알던 평화주의 마족이 너보다 강했어.”
랭. 평화주의 마족이자, 언제나 좀 모자란 사람처럼 쉼 없이 웃음을 흘리고 다니던 마족. 타고난 본능을 억누르고, 그로 인해 본인의 목숨을 잃을지언정 누군가를 해치지 않고자 했던 마족. 실비아의 안에서는 적어도 랭이 베이나스보다 몇천 배는 더 강한 사람이었다. 베이나스는 자신을 위한 전쟁에서조차 앞으로 나서지 않고 방관하던 비겁자였으니까. 하지만 그 말을 단순히 ‘무력’에 관한 것으로 알아들은 베이나스는 실비아가 지칭하는 것이 쉐르트 공작인 줄 알고 눈이 뒤집혔다. 평생을 쉐르트 공작과 비교당했던 울분이 목 안에서 치받았다. 베이나스가 쏜살같이 땅을 박차며 낫의 크기를 키웠다. 그가 낫을 가로로 길게 휘두르며 고함을 내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고작 인간 따위를 위해 제 목숨을 내버리는 그런 머저리들이……!”
실비아는 베이나스의 공격을 반으로 갈라 피하다가 그 말을 듣고 울컥했다.
-제 손으로, 누군가를 해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이 설령 인간이라고 해도요.
-가십시오!
죽어가면서도 제 손을 붙잡고 희망을 보았다며 웃던 랭. 베이나스에게 짓밟혀 만신창이가 된 꼴로, 인간인 자신들을 믿고 절실한 눈을 하던 쉐르트 공작.
‘그런데, 뭐?’
그들을 머저리로 지칭하는 베이나스의 태도에 순간적으로 머리에 열이 확 올랐다. 실비아의 눈에 핏방울이 떨어지듯 붉은 기운이 넓게 퍼졌다. 다음 순간, 내내 자리를 피하는 데 집중하던 실비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베이나스의 앞에 다다른 그녀가 그의 멱살을 잡아채 땅으로 처박았다. 쾅!
“크윽!”
당황한 베이나스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실비아가 어둠을 실은 발로 그의 등을 콱 짓밟았다. 그 무게가 마치 태산을 등에 얹은 듯했다.
‘……마음 같아선 혀를 뽑고 싶지만.’
실비아는 랭의 얼굴을 떠올리며 분노를 조금이나마 갈무리했다. 그녀는 그 대신 베이나스의 등 뒤로 넓게 너울지는 검은 날개를 무자비하게 잡아 뜯었다. 등줄기를 관통하는 고통에 베이나스가 눈을 까뒤집고 비명처럼 포효했다.
“크아아악!”
“……!”
실비아는 순간적으로 베이나스에게서 폭발적인 어둠이 터져 나오자 빠르게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베이나스를 중심으로 어둠이 거센 바람처럼 몰아쳤다. 그 바람에 찰나 후드가 넘어가고, 실비아의 몸 주위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그녀의 등 뒤로 날개처럼 확 펼쳐졌다. 그 모습을 본 마족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하늘이.”
베이나스의 날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다란 날개. 그것은 마치 붉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검은 금처럼 보였다. 베이나스의 발악으로 인해 실비아가 지닌 어둠이 흔들린 탓에, 란델 역시 제 본모습을 되찾은 후였다. 후드가 벗겨진 그의 모습을 본 마족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퍼져나갔다.
“이, 인간?”
“인간이라고?”
“말도 안 돼!”
“어떻게 인간이 어둠을 다룬다는……!”
“그런 사람은 지금까지 한 명밖에……!”
하지만 그 소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라앉았다. 실비아에게서 느껴지는 섬뜩한 살의가 모두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베이나스가 헉헉 숨을 몰아쉬며 엎드린 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등 뒤에 어둠을 둔 채 저를 노려보고 있는 흰 얼굴을 보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알리사께서 너를 심판하실 거다.
순간적으로 쉐르트 공작이 퍼부었던 저주가 머리를 스쳤다. 이어진 것은 본능과도 같은 중얼거림이었다.
“알…… 알리사…… 폐하?”
지금 실비아의 눈은 금빛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붉은빛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옆얼굴로 흰 머리카락이 사르륵 흘러내렸다. 그 모습은 분명 알리사가 아닐진대. 어째서인지 인간 출신이었음에도 역대 가장 강한 마왕이라 일컬어졌던 알리사가 겹쳐 보였다. 랭과 쉐르트 공작이 모욕당한 일로 분노한 실비아는 굳이 부정하지 않고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당겼다. 정확히는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돌아볼 정신이 아니었다. 그녀의 웃음에는 온기 대신 살의가 담겨 있었다.
“내가 돌아오면 심판받겠다며 그 잘난 입으로 떠들었었지.”
“폐, 폐하…….”
“감히 켈베티아의 백성들을 기만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한 죄를 물어.”
베이나스는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감히 반항할 생각조차 못 하고 가느다란 부름만 뱉었다. 바닥에 엎어진 그의 아래로 스멀스멀 늪 같은 어둠이 차올랐다. 냉정한 선고가 떨어졌다.
“베이나스 페룬의 목숨을 거둔다.”
그에 베이나스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그의 아래에 진득이 고여 있던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베이나스는 단말마조차 없이 어둠에 먹혀 사라졌다. 베이나스를 삼킨 어둠은 피가 흙바닥에 스며들듯 스르륵 옅어지더니,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제야 실비아의 눈을 8할쯤 차지하고 있던 붉은 기운이 사라졌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고 몸을 돌렸다가 움찔 멈춰 섰다. 어째서인지 인간의 모습인 채 후드까지 벗고 있는 란델이 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란…… 데르? 왜…….”
실비아는 반사적으로 란델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급하게 말을 바꿨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란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자마자 속으로 삼켜졌다.
‘이게 무슨…….’
실비아는 분노가 가신 후에야 자신 역시 란델처럼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그녀가 급하게 다시 어둠을 두르려던 차였다.
“……알리사 폐하를 뵙습니다.”
란델을 막아서던, 베이나스의 수하들이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에 당황할 새도 없이, 물감이 종이 위로 번져가듯 다른 마족들도 하나둘 무기를 내려놓고 공손히 바닥에 엎드렸다.
“알리사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를 뵙습니다!”
“아니, 나는…….”
실비아는 크게 당황한 탓에 평소와 다르게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녀가 ‘마족들에게도 기억을 지우는 마법이 통하나?’라는 생각까지 하는 순간.
“정녕 그대가 알리사이십니까.”
작고 가느다란 말소리가 본성 쪽에서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실비아가 눈을 크게 떴다.
“……이블린 헤이든?”
그녀의 잇새로 멍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본성 안쪽에서 나타난 것은 빌리의 부축을 받고 서 있는 쉐르트 공작, 그리고 조금 지친 기색으로 서 있는 마왕, 이블린 헤이든이었다.
“이게 무슨…….”
빌리와 쉐르트 공작은 실비아가 베이나스를 처단하는 것을 보았는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 반해 이블린은 상대적으로 침착했다. 실비아는 뒤늦게 자신이 알리사가 아니라 변명하려 했다. 하지만 비틀거리며 다가온 이블린이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빌리에게 듣기로는, 제가 정신을 잃은 원인을 당신께서 알아내셨다고 했지요. 제가 정신을 잃은 것은 마법석 때문이었고요.”
“…….”
“제가 알기로, 마왕에 버금가는 어둠과 마법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인간은 역사상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이블린의 눈이 찰나 실비아의 등 뒤, 베이나스가 죽어 사라진 곳을 향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선대 마왕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었지요. 알리사님의 어둠은 우리와 조금 다르다고. 언뜻 칠흑 같으나 그 속에 한 줄기 빛이 깃들어 있노라고…….”
“…….”
“직접 보니 확실히 그렇군요.”
이블린의 눈은 잔잔하게 보일 정도로 차분했다. 그녀가 조금 전 자신이 내뱉은 말을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실비아는 결국 자포자기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금색 눈이 아직도 저를 향해 절하고 있는 마족들을 힐긋 일별했다. 그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들어가서 이야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