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신호탄2022.03.03.
어느새 인간 세상에서는 약속한 국무회의 날이었다. 제자리에 착석한 귀족들은 외려 이번 국무회의의 주인공이라고 할 법한 란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웅성거렸다.
“벨포르 공작이 보이질 않는군요.”
“허어. 정벌이 시작되면 군사들을 이끌어야 할 자가 어찌…….”
“이 정도로 늦는다는 건 참석할 의사가 없다는 뜻 아닙니까?”
귀족들은 국무회의가 시작된 지 30여 분이 지나도 란델이 나타나지 않자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불편함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다비드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입꼬리를 꾹 내리눌러야 했다.
‘신께서도 날 돕는가 보군.’
다비드는 만족스러운 눈길로 천장을 힐긋 일별했다. 그는 침통한 신음을 흘리는 척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비웃음을 띠었다.
‘벨포르 공작 부부의 부재로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불안해한다는 것은 확인했는데. 설마 정말 어디서 죽어 나자빠졌나?’
실비아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 입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간의 감정일 뿐이었다. 다비드는 표정을 추스른 후 손을 내렸다. 다시금 마왕의 자리를 되찾겠다는 그의 계획에 사사건건 방해가 되던 란델과 실비아가 사라졌다면 그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다비드는 란델이 자리를 비운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못 걱정스러운 얼굴로 귀족들의 웅성거림에 불을 붙였다.
“확실히 기이하군. 정작 재회의를 요청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줄은…….”
“우리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허 참.”
“원래 같았으면 지금쯤 안건 3개쯤은 처리하고도 남았을 텐데 말입니다. 누군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는 건지…….”
다비드가 은근슬쩍 말을 흘리자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보란 듯 표정을 구기고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러지 말라며 말리는 척하는 다비드의 어깨 너머, 왕좌에 앉아 있는 왕은 내내 멍한 눈빛이었다.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란델을 경계하던 왕이 아무런 말도 없다는 사실이 다소 의아한 듯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왕에게 나서서 벨포르 공작을 험담하기에는 부담스러웠기에 곧 왕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그들의 관심은 회의 시작 시각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란델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플로레트 백작만은 무표정한 얼굴로 왕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비드는 그것이 못내 신경 쓰였다.
‘……눈치 빠른 작자 같으니.’
플로레트 백작은 마법사도, 마족도 아니니 다비드가 왕에게 걸어놓은 세뇌를 눈치챌 일은 없겠지만. 저렇듯 의미심장한 눈길로 왕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으니, 자칫 그런 그의 모습이 다른 귀족들의 시선마저 끌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일부러 귀족들의 불만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다비드는 어느 정도 귀족들의 분위기를 제가 원하는 대로 이끈 후 말문을 뗐다.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없지.”
듣기 좋은 목소리에, 저들끼리 떠들던 귀족들이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다비드가 안타까운 듯 웃어 보였다.
“벨포르 공작의 부재를 기다리는 것도 정도가 있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족의 손에 목숨을 잃는 백성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지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다비드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그가 마족의 손에 스러지는 사람들을 언급하자 귀족들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멍청한 위선자들 덕을 다 보는군.’
그 모습을 본 다비드는 속으로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
그 순간. 벌컥! 다소 거친 소리를 내며 회의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귀족들은 그 몰상식한 행동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어떤 놈이냐!”
“누가 감히 신성한 회의장에……!”
그러나 열린 문 너머로 드러난 인영을 본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말을 멈추었다. 더 정확히는 자신이 본 광경을 믿지 못해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있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었다. 눈을 부릅뜬 다비드 역시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늦었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처럼 회의실을 울렸다. 란델이 작게 숨을 몰아쉬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뒤로 실비아가 조용히 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귀족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란델, 혹은 실비아가 아니었다.
“저건…….”
란델과 실비아의 등 뒤. 양손에 구속구를 찬 채 실비아를 따라 태연히 회의실에 걸어 들어오는 사람.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보랏빛 머리카락과 피부. 흰자위가 보이지 않는, 형형한 붉은색의 눈. 그는 누가 보아도 ‘마족’이었다.
“마, 마족이 어떻게 여기……!”
“제정신입니까, 벨포르 공작!”
“기사들은, 아니, 왕성 마법사들은 저자들을 막지 않고 대체 뭘……!”
귀족들은 대번에 사색이 되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들은 썰물처럼 마족에게서 물러나며 소리를 질러댔다. 다비드는 그들처럼 소란하게 굴지는 않았다. 다만 차게 분노하는 척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벨포르 공작? 회의에 늦은 것도 모자라 마족을 왕성에 들여?”
그러자 란델과 실비아의 시선이 다비드를 향했다. 그들의 시선에는 살의도, 적의도 담겨 있지 않았으나 그것이 외려 다비드를 오싹하게 했다.
‘뭐지?’
그들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불안하게 뛰던 심장 박동이 점차 거세졌다. 이윽고 그 고동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란델이 다비드를 직시한 채 단호히 말을 뱉었다.
“켈베티아로부터 평화회담 요청서가 도착했습니다.”
“……뭐?”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모든 계획이 근간부터 흔들리는 소리이자.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은 말이었다.
* * * 며칠 전. 켈베티아에서 한바탕 소란이 수습된 후. 실비아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자신이 알리사의 환생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알리사의 환생이 아니야. 단지 그 사람의 재능을 고스란히 닮은, 일개 인간일 뿐이지.
-…….
실비아의 말을 들은 이블린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비아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듯한 기색이 역력한 태도였지만, 이블린은 결국 엷게 웃으며 수긍했다.
-……당신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마족들에게는 그렇게 말해두겠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블린은 실비아가 알리사의 환생이라는 것을 확신한 듯 보였음에도 선선히 다른 마족들에게 거짓말을 퍼트려주었다. 그 덕에 ‘알리사 폐하께서 재림하셨다’라는 여론은 생각보다 빠르게 가라앉았다. 까딱하다간 마족 전체에게 기억을 지우는 마법을 사용할 뻔했던 실비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달칵. 실비아가 찻잔을 내려놓자 응접실에 작은 소음이 울려 퍼졌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블린이 시선만 들어 실비아를 응시했다. 실비아는 가장 강한, 어쩌면 가장 ‘마족’다운 마족임에도 기이하게 차분해 보이는 시선을 마주하며 입술을 뗐다.
“이렇게 순순히 소문을 가라앉혀 준 건 선대 마왕의 재림이 당신에게 치명적이어서, 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
“설마 그것뿐만은 아니겠지.”
이블린은 묘한 눈길로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저분이 알리사 님이라는 것을 알아서일까.’
평소 같았으면 아무리 인간 세상에서 신분 높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마왕인 그녀에게 하대를 사용하는 것이 무례라 생각했겠지만. 눈앞의 상대가 까마득한 선조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자 오히려 저런 태도가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실비아가 공대를 사용했다면 외려 이블린이 난감해 견딜 수 없었으리라. 이블린은 속으로 상념을 갈무리하고 빙긋 웃었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원하는 게 뭐지?”
“이미 알고 계시면서 짓궂으시군요. 그나저나 그걸 말씀드리기 전에.”
이블린은 말을 잇던 중간에 별안간 몸을 일으켰다. 그에 실비아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긴장시키던 차였다.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블린이 그대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실비아는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블린은 고개를 깊이 숙인 채로 담담하게, 그래서 더욱 진심처럼 들리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신께서 알리사이시든, 아니든. 제 목숨을 구해주신 데다가 반역자들마저 제압해주셨죠. 조금만 늦었다면 수많은 마족이 무고한 피를 흘리게 되었을 겁니다.”
“…….”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블린의 말에 거짓이라고는 한 점도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
실비아는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에 한동안 가만히 이블린을 응시하다가, 이윽고 입술을 움직였다.
“……쉐르트 공작에 듣기로는, 인간과의 평화회담을 원한다고 했었지.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나? 당신을 그렇게 만든 게 인간의 왕세자인데도?”
실비아는 일부러 이블린을 시험하듯 불편한 화제를 꺼내들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소란을 정리한 후, 어둠이 삼켰던 베이나스의 시신에서 발견한 편지들의 내용이었다.
-……이건.
쉐르트 공작의 말대로, 베이나스는 중요한 증거들을 품 안 깊숙이 넣고 다녔다. 그 덕에 실비아가 발견한 편지에서는 의도치 않게 코에 익어버린 향기가 풍겼다. 다비드의 향이었다. 「그쪽으로 들여보낸 내 수하의 어깨에 남아 있는 기운이 어떤 것인지, 자네는 알고 있겠지. 당신이 인간임에도 어둠을 다룰 수 있는 자가 둘이라 생각할 마족은 아니리라 믿어.」 실비아는 그 문구를 보고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교활하네.
다비드가 적은, ‘인간임에도 어둠을 다룰 수 있는 자’라는 말만 보면 꼭 그가 알리사의 환생이라고 무언중에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베이나스가 그래봤자 고작 인간에 불과한 다비드와 손을 잡은 이유가 저것 때문인 듯했다. 혹시나 다비드가 알리사의 환생일 거라는 가능성 때문에. 「내 뜻은 간단해. 어둠 벌레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면, 당신이 마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지. 내가 어둠 벌레들을 이용해 견제하고자 하는 인간이 벨포르 공작이니, 어찌 보면 마족인 당신에게는 두 가지 이득이 되는 거래 아닌가?」 다비드는 베이나스가 어둠 벌레들을 움직여주면, 그 대가로 마왕을 영원히 잠에 빠뜨릴 수 있는 마법석을 제공하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그 마법석은 현재 온갖 천과 사슬로 둘러싸여 쉐르트 공작의 엄중한 감시하에 있었지만. 그로써 실비아는 다비드가 켈베티아와 내통하여 인간 세상을 어지럽히고자 했다는 증거를 손에 쥐게 되었다. 실비아와 함께 있음으로써 그 모든 것을 알게 된 이블린은 조용히 답했다.
“……베이나스 페룬의 뜻이 모든 마족의 뜻과 같지 않듯.”
어조는 차분했으나 눈빛은 단호했다. 이블린이 실비아를 또렷이 직시하며 말했다.
“왕세자라는 자의 뜻이 모든 인간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
“실제로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켈베티아까지 찾아와주신 분들도 계시고.”
그녀가 지나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슬쩍 웃었다. 그러나 곧 목을 가다듬고는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쉐르트 공작에게 이미 들었다고 하셨으니, 더 끌 필요는 없겠죠.”
붉은 눈과 금색 눈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블린이 마침내 선언했다.
“저는 더 이상 피를 흘릴 필요가 없는 켈베티아를 원합니다.”
“…….”
“그를 위해서는 인간들과의 회담이 필수적이겠죠.”
이블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와 깃펜, 그리고 손가락 길이 정도의 작은 나이프를 가지고 돌아와 앉았다. 종이에 인간과의 평화회담을 요청한다는 이야기를 정갈한 필체로 써 내려간 그녀가 깃펜을 내려놓았다. 나이프를 들어 엄지를 가볍게 베어낸 그녀가 종이 우측 하단에 엄지를 꾹 눌렀다. 그러자 붉은 지장 한가운데 검은 왕관 같은 문양이 피어났다. 그녀가 마왕임을 증명하는 문양이었다. 이블린은 종이를 반듯이 접어 봉투에 넣고 실비아에게 건네주었다.
“이 요청서와 빌리 보르트를 함께 보내겠습니다. 혹시 필요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켈베티아에서 사용하는 구속구도 제공해드리죠.”
봉투를 바라보던 실비아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블린이 다짐하듯 말했다.
“부디 이것이 새 시대를 열 수 있는 열쇠가 되길 바랍니다.”
봉투가 실비아의 손으로 완전히 넘어왔다.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봉투를 응시하던 실비아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