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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안개가 걷히고 (98/118)

98. 안개가 걷히고2022.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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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현재. 왕성 회의실은 란델이 던진 말에 조금 전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16558822661523.jpg“펴, 평화회담이라니!”

16558822661523.jpg“그 무슨 말도 안 되는……!”

16558822661533.jpg“말도 안 되는 일처럼 느껴질지라도 전부 사실입니다.”

그때 란델의 뒤쪽에 서 있던 실비아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명료한 목소리를 냈다. 동시에 발밑,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그녀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사자 한 마리가 테이블 아래를 가로질러 소리 없이 국왕의 그림자로 뛰어들었다. 실비아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품에서 꺼내든 종이들을 테이블 위로 돌렸다.

16558822661533.jpg“이 마족이 가져온 평화회담 요청서의 사본입니다. 하단에 찍혀 있는 것이 마왕의 직인이 확실하다는 것도 확인했고요.”

16558822661523.jpg“그런……!”

16558822661523.jpg“하지만 여기 보십시오. 정말로 고서에 표기되어 있던 마왕의 직인입니다. 오직 현 마왕의 피로만 증명되는 직인…….”

다비드를 따르는 귀족들이 요청서의 사본을 내팽개치며 거세게 반발했으나,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귀족들은 마왕의 직인을 알아보고 다른 의미로 술렁였다. 그때 조용히 서 있던 마족, 빌리 보르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에 귀족들이 반사적으로 움찔하자, 그가 웃으며 양 손목을 들어 올려 보였다. 쩔그렁, 하는 쇳소리와 함께 구속구에 달린 쇠사슬이 달랑였다.

16558822661523.jpg“걱정 마십시오. 저희 폐하께서 이런 일이 생길까 봐 친히 제게 구속구까지 채워주셨으니까요.”

16558822661558.jpg“웃기는 소리.”

그때 비소 섞인 말이 소란을 갈랐다. 양손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듯 짚은 다비드가 살기등등한 눈으로 란델과 마족을 노려보았다.

16558822661558.jpg“저 구속구도 눈속임일지 어떻게 아나. 감히 마족 따위가 사지 멀쩡하게 왕성에 발을 디디다니. 반역죄로 그대를 체포하기 전에 당장 저 마족의 목을 베는 게 좋을 걸세, 벨포르 공작.”

그 흉흉한 기세에 요청서를 보고 흥분했던 귀족들조차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짤막한, 하지만 더없이 숨 막히는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때 다비드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가 대꾸했다.

16558822687029.jpg“아무리 마족이고, 또 적이라고는 하나 타국의 사절이나 다름없는 이에게 말이 지나치십니다, 전하.”

그 말을 뱉은 것은 무표정한 얼굴의 플로레트 백작이었다. 다비드는 반사적으로 이를 뿌득 갈았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기 때문에 달리 반박할 구석이 없었다.

16558822661523.jpg“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냥하시군요.”

그사이 빌리가 진심으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는 플로레트 백작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곧 자세를 바로 한 그가 귀족들을 한번 빙 둘러보고는 진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16558822661523.jpg“오늘 제가 이곳에 온 것은, 벨포르 공작님께서 말씀해주셨다시피 이블린 헤이든 폐하께서 평화회담을 요청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귀족들은 빌리가 마족이라는 사실에 본능적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그의 말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플로레트 백작이 차분한 어조로 되물었다.

16558822687029.jpg“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가 뭡니까.”

16558822661523.jpg“며칠 전, 켈베티아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바람에 현 마왕이신 이블린 헤이든 폐하의 목숨이 위태로웠죠.”

거기까지는 귀족들이 굳이 궁금해할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그들은 빌리가 자칫하면 켈베티아의 위신이 상할 수도 있는 반란 이야기를 왜 꺼내는 것인지 의아해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을 듣는 순간. 그들의 의문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16558822661523.jpg“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반역자 베이나스 페룬이 반역을 일으키도록 어둠 벌레를 통해 부추기고 조력한 인간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16558822661523.jpg“뭐……!”

16558822661523.jpg“그, 그게 무슨!”

16558822661523.jpg“그 말에 책임질 수 있습니까! 헛소리를 하는 거라면……!”

귀족들은 란델이 빌리를 데리고 나타났을 때보다 더욱 격하게 반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긴 세월, 마족의 손에 덧없이 사라진 목숨이 대체 몇이던가. 인간이라면 마족에게 득 될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었다. 적어도 이 자리의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인간이 마족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도왔다니. 어둠 벌레들을 움직였다니? 그것은 그 자체로 마족의 손에 목숨을 잃은 이들을 모욕하고, 기만하는 행위였다. 귀족들의 얼굴이 전과 비교할 수조차 없이 험악해졌다. 그러나 빌리는 자신의 말이 옳다 소리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찬찬히 고개를 돌려 한 곳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 자리에 그 당사자가 있다는 것처럼. 그가 말없이 어딘가를 응시하는 모습을 본 귀족들이 하나둘 ‘설마’ 하며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빌리의 시선 끝에 서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왕세자 다비드였다.

16558822661558.jpg“…….”

다비드는 수많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한결같이 담담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받아내던 그가 이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뒤틀었다. 다비드가 더없이 멀끔한 낯으로 조소했다. 그 태도만으로 판단하자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듯 보였다.

16558822661558.jpg“감히 증거도 없는 마족의 말 따위를 믿는 건가, 지금?”

16558822711887.jpg“증거는 있습니다.”

그러나 란델이 곧장 반박했다. 다비드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란델이 품을 뒤져 편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피가 묻어 있고, 조금 낡았으나 그것이 자신이 베이나스에게 보냈던 것임을 눈치챈 다비드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16558822711887.jpg“왕세자 전하께서 베이나스 페룬에게 보내셨던 편지와 그 사본입니다. 그자 역시 왕세자 전하를 완전히 신뢰한 것은 아닌지 품에 지니고 있더군요. 그리고…….”

란델이 역시나 미리 준비해온 편지의 사본을 귀족들에게 돌리며 등 뒤를 힐긋 일별했다. 그러자 타이밍 좋게 나타난 오스턴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해맑게 웃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천으로 감싸인 마법석이 창으로 흘러 들어온 햇빛에 반짝 빛났다.

16558822711897.jpg“왕성 마법사 로베리치와 그 일당을 신문한 후 포박해두었습니다. 본인이 마왕을 해하기 위해 만든 마법석이 맞다고 증언하더군요. 원하신다면 이곳까지 끌고 오지요.”

16558822711887.jpg“수고했다, 오스턴.”

왕성 마법사 로베리치. 그는 다비드의 손발이나 다름없는 자였다. 귀족들의 얼굴이 한층 창백해졌다. 다비드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16558822661558.jpg‘무능한 새끼. 명색이 왕성 마법사라는 게 일개 공작가 소속 마법사 하나도 제압하지 못하고!’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다비드는 애써 심호흡을 해 이성을 되찾고는 매끄러운 미소를 자아냈다. 그가 귀족들을 돌아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16558822661558.jpg“자네들은 저 말을 정말 믿나? 이건 저 마족이 벨포르 공작과 공작 부인을 세뇌해 인간들을 분열시키려는 수작질에 불과해. 설마 거기에 넘어갈 셈은 아니겠지.”

16558822661523.jpg“하지만…….”

16558822661523.jpg“로베리치 님이 맞다고 하셨다면, 그건…….”

귀족들은 여전히 다비드를 믿어야 할지, 란델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갈팡질팡했다. 다비드가 입 안으로 혀를 쯧 차고는 내내 인형처럼 앉아 있던 국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국왕과 시선을 맞춘 그가 국왕의 그림자에 심어뒀던 ‘뱀’을 움직이며 속삭였다.

16558822661558.jpg‘내 말이 맞다고 해.’

일이 이렇게까지 되기 전에 국왕이 먼저 나서서 란델이 헛소리를 한다고 바람잡이를 해주었다면 좋았겠지만. 전에 국무회의를 다시 열기로 한 것처럼, 국왕이 또다시 허튼짓을 할까 봐 세뇌의 강도를 높여두었더니 국왕의 행동이 조금 부자연스러워졌다. 뜻밖의 상황에 잠시 평정을 잃긴 했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국왕을 위시로 이 모든 것이 마족의 계략이라고 주장한다면 귀 얇은 귀족들 절반 정도는 이쪽으로 돌아설 것이 분명했다. 긴 세월 마족을 배척해왔던 인간들이 고작 이런 일 하나로 쉽게 마음을 바꿀 리는 없으니까. 다비드가 그리 생각하며 다시 한번 국왕을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16558822661558.jpg“……!”

대리석 타일 위. 국왕의 그림자 바깥으로 입에 뱀을 문 사자가 뛰쳐나왔다. 그림자 사자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는 뱀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러자 뱀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는 스르륵 흩어졌다.

16558822661558.jpg“커헉!”

동시에 다비드의 입에서 피가 울컥 터져 나왔다. 그는 강제로 세뇌를 거두게 된 여파로 인해 바닥으로 휘청 무너졌다. 회의실이 순식간에 고함으로 가득 찼다.

16558822661523.jpg“왕세자 전하!”

16558822661523.jpg“전하! 괜찮으십니까!”

바닥에 쓰러진 다비드가 핏발 선 눈으로 국왕의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할 일을 마친 그림자 사자가 유유한 걸음걸이로 실비아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16558822661558.jpg‘알리사……!’

그때 내내 멍하니 있던 국왕이 얼굴을 크게 찌푸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두통으로 괴로워하던 왕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이내 완전히 정신을 되찾은 왕이 신음을 삼키며 혼란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16558822661523.jpg“내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다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왕의 말을 들은 귀족들이 당황했다. 플로레트 백작이 미간을 설핏 구긴 채 그에게 되물었다.

16558822687029.jpg“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폐하?”

16558822661523.jpg“그래. 나는 분명,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이…….”

16558822661558.jpg-이번은 플로레트 백작, 그 작자가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미처 막을 시간이 없었다지만.

16558822661558.jpg-다음에도 또, 겨우 그깟 놈의 기에 밀려 멋대로 내 일을 망쳤다간 네놈의 목부터 따버릴 줄 알아.

  다비드.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아 있던, 제 얼굴을 부서트릴 듯 그러쥐고 폭언을 퍼붓는 아들의 모습. 그것을 떠올린 국왕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다비드를 바라보자 다비드가 이를 악물었다.

16558822661558.jpg‘……젠장.’

더 물러설 곳이 없다. 그리 판단한 다비드가 재빨리 제 옷에 달려 있던 보석 하나를 떼어내 손에 쥐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왕성 마법사 로베리치를 시켜 만들어 두었던 이동 마법석이었다. 그가 그것을 바닥에 내던져 발로 깨트리려던 순간이었다.

16558822661533.jpg“어딜 도망가려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무형의 힘이 그를 바닥으로 찍어 눌렀다.

16558822661558.jpg“크윽……!”

그 바람에 바닥에 엎드리듯 처박힌 다비드가 고통에 신음했다. 이동 마법석이 그의 손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애처롭게 바닥을 굴렀다. 이곳에는 마법사가 되지는 못했을지언정, 마력 정도는 느낄 수 있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숨통을 조일 만큼 위압적인 마력에 경악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들이 목격한 것은 한 손에 흰빛을 휘감은 채 싸늘하게 다비드를 노려보고 있는 실비아의 모습이었다. 오스턴이 아니라.

16558822661523.jpg“……벨포르 공작 부인?”

16558822661523.jpg“지, 지금 벨포르 공작 부인께서 마법을 사용하신 겁니까?”

16558822661523.jpg“어떻게 이런 일이…….”

16558822661523.jpg“세상에…….”

귓가로 귀족들의 경악성이 들려왔지만 실비아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저들 사이에 섞여 있을 플로레트 백작의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실비아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16558822661533.jpg‘……어쩔 수 없어.’

란델과 서로의 마음을 고백한 후, 실비아는 다시 한번 인간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것은 조용한 죽음을 위해 능력을 구태여 감출 필요가 사라졌다는 뜻과 같았다. 게다가 다비드와 그의 세력, 어둠 벌레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생길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실비아 본인이 나선다면 불필요한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16558822661533.jpg‘무엇보다 다비드를 확실히 잡아야 했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분명 이것은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플로레트 백작의 시선을 피하게 되는 걸까.

16558822687029.jpg“……실비아?”

그때 귓가로 작디작은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거리가 있었음에도 그 목소리만은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실비아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플로레트 백작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던 다비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기를 쓰고 테이블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콰지직!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어둠에 거대한 테이블이 뒤집혔다. 테이블 위에 올라 있던 종이와 깃펜 등이 엉망으로 흩날렸다. 찰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쐐액-! 잠시 허공에 머물러 있던 물건들이 매섭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개중 깃펜의 뾰족한 촉이 플로레트 백작의 심장을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백작이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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