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피와 쾌락의 축제2022.03.10.
‘아.’
플로레트 백작의 위로 떨어져 내리는 깃펜을 본 순간. 실비아의 사고가 그대로 정지했다. 그녀가 정신을 되찾은 것은 귓가에 울리는 고함을 듣고 난 직후였다.
“백작!”
“백작님!”
란델과 오스턴이 나란히 고함을 내질렀다. 그에 이성을 되찾은 실비아가 재빠르게 바람을 불러일으켜 깃펜을 날렸다. 콰직! 플로레트 백작의 위로 떨어지던 깃펜이 벽에 처박혔다. 깃펜이 난폭한 소리를 흩뿌리며 반으로 갈라졌다. 쨍그랑! 동시에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나란히 겹쳐졌다. 찰나의 혼란을 틈타 아득바득 마법석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부순 다비드의 몸이 흰빛에 휩싸이더니 사라졌다.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와, 왕세자 전하께서 사라졌다!”
직후 회의실이 아수라장이 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 * * 왕세자 다비드 데 켈마르 로클렌이 마족과 짜고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 이 충격적인 사실은 순식간에 왕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그토록 마족의 잔혹함을 소리 높여 주장했던 왕세자가 켈베티아의 반역마저 부추겼다는 소식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벨포르 공작이 그를 막지 않았다면 수천, 수만의 목숨이 무고하게 희생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목덜미에 절로 소름이 돋아났다.
“게다가 벨포르 공작 부인께서는 마법사라지?”
“뭐? 벨포르 공작 부인이라면…… 전 플로레트 백작 영애 말인가?”
“그래! 그분이 왕세자의 도주를 막으려고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마법을 썼다지 않은가!”
“심지어 동시에 여러 마법을 사용하기까지 했다는군.”
“세상에…….”
새로운 마법사의 등장은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마법사라는 존재 자체가 흔한 편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간 아무 말 없이 조용하던 벨포르 공작 부인이 마법사라는 사실이 이번 사건을 통해 밝혀졌다. 심지어 그녀는 현시대 최강의 마법사라는, 오스턴마저 해내지 못했던 다중 마법 사용까지 해낼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고 한다.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는 것이 외려 이상한 일이었다. 엘바레스에 뛰어난 마법사가 늘어날수록 왕국의 권위가 높아지니까. 하지만 사람들을 가장 큰 충격에 빠트린 이야기는 다비드의 흉계도, 실비아의 비밀도 아니었다.
“……평화회담이라니.”
“음…….”
누군가 던진 말에, 술집에서 침을 튀겨가며 최근의 소란에 대해 입을 놀리던 이들조차 난감한 신음을 흘리며 잔을 내려두었다. 테이블 주위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족의 평화회담 제의. 이것이야말로 일련의 소란 중 사람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일이었다. 기실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했다. 대부분의 싸움은 인간의 냄새를 맡은 마족들의 눈이 돌아가며 벌어졌고, 그로 인해 소중한 이들을 잃은 인간들이 부지기수였으므로. 아무리 평화회담 제안이 저쪽에서 먼저 들어왔다지만, 아직은 거부감을 거두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나는 반대일세.”
그때 누군가 술잔에서 손을 떼며 단호히 말을 내뱉었다. 약간 얼굴이 붉어져 있긴 하지만, 이성은 명료해 보이는 남자가 코웃음을 치며 테이블을 탕 내리쳤다.
“마족이 살의를 참을 수 있다고? 차라리 맹수 앞에서 고기 덩이를 흔들었는데도 안전하다는 말을 믿겠네.”
“맞아.”
“평화회담이라니. 우리가 켈베티아 정벌에 나서면 꼼짝없이 질 것 같으니 같잖은 수작을 부리는 게지.”
“까놓고 말해서, 저치들이 전쟁에서 이길 것 같았으면 회담 이야기를 꺼내기나 했겠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네.”
남자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들은 곧 흥분해 마족들이 인간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앗아갔는지에 대해 열변했다. 그러나 그들과 상반되는 의견을 가진 이들도 존재했다. 눈치를 보던 이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스스로 구속구까지 차고 왔다는데…….”
“애초에 우리는 몇몇 마법사, 혹은 검기를 쓸 수 있는 기사가 아니면 일반병들뿐 아닌가. 전력은 마족들이 훨씬 더 우세하다고 생각되네만.”
“실제로 회담 요청서를 가져온 마족이 아직 소란을 일으켰다는 말도 들리지 않고 있잖아? 수작을 부릴 셈이었으면 진작 구속구를 찬 척만 하고 폐하의 목부터 노렸겠지.”
처음에는 단순히 소문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은 어느새 평화회담 요청을 받아들여야 한다, 말아야 한다로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테이블 구석에서 조용히 잔을 기울이던 어떤 이가 망설이다가 슬그머니 운을 뗐다.
“……아주 확실하지는 않은 이야기이긴 한데.”
작은 목소리였으나 의미심장한 어조였다. 언쟁하던 이들이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추고 사내를 돌아보았다. 갑작스럽게 많은 사람의 시선이 몰리자 당황한 것인지 몇 번 헛기침을 뱉은 사내가 곧 말을 이었다.
“내 먼 친척 놈이 벨포르 공작령에 거주하는데, 이상한 말을 들었다고 해서…….”
“무슨 소문이길래?”
“그, 같은 거리에 사는 거지 꼬마가 한 명 있는데. 걔가 어떤 마족이 자기를 살려줬다고 주장하고 다닌다더군.”
“헛소리를.”
“마족이 인간과 마주쳤는데도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곱게 보내줬다는 건가? 예끼, 이 사람아.”
사내가 주저하며 꺼내놓은 말에, 평화회담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이들은 대번에 헛웃음을 지었다. 평화회담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조차 영 못미더운 눈치였다. 제 말이 거짓으로 치부당하는 듯하자 발끈한 사내가 조금 더 큰 목소리를 냈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허무맹랑하게 지껄이는 말과 그렇지 않은 것도 구별하지 못하겠나? 실제로 그 일이 있고부터 얼마 후에 벨포르 공작가에서 비밀리에 장례식을 치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네.”
“뭐? 그럼, 설마 정말로…….”
사람들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옆 테이블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이가 슬그머니 테이블을 옮겨 다른 이들에게 말을 붙였다.
“어이, 이봐. 내가 조금 저쪽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아나?”
“뭔데?”
그렇게 아이 대신 스스로의 목숨을 저버리기를 택했다는 마족 ‘랭’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씩, 물밑에서 사람들 사이로 퍼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다비드가 어디로 도주했는가에 관한 이야기 또한 빠지지 않고 회자되었다.
“어이, 거기. 비켜보시오들.”
종이 뭉치를 등에 진 치안대원이 목소리를 높이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자 담벼락 앞에 모여 왕세자, 그리고 마족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사람들 사이로 벌어진 틈을 비집고 들어간 치안대원이 등 뒤의 통에서 용모파기를 한 장 꺼내 빠르게 벽에 붙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종이에 적힌 내용으로 모여들었다.
「수배: 다비드 데 켈마르 로클렌. 위 사람은 왕국을 농락하고 국왕을 해하려 한 반역자로, 이를 돕거나 숨겨주려 한 자는 신분고하,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엄벌에 처한다. 처벌의 집행은 벨포르 공작이 직접 맡는다. 발견 즉시 근처의 치안대 혹은 왕실 소속 기사에게 신고. 신고 포상금 1골드.」 치안대원들은 이내 다른 곳에도 용모파기를 붙이기 위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남겨진 이들은 용모파기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어 웅성거렸다. 포상금에 관한 내용 하단에는 다비드가 베이나스에게 보냈던 편지의 사본이 붙어 있었다.
“이분이 왕세자 전하이시구먼.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네.”
“왕세자라니, 이제는 그냥 반역자지, 뭐! 자기 이름 높이려고 마족과 짜고서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잖나!”
“맞네, 맞아.”
“마족이 아니라 이런 놈들부터 매달아야 할 텐데.”
다비드가 흉계를 꾸미려 한 증거가 너무도 명확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분노했다. 마족들을 그렇게까지 좋게 보거나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으나. 왕세자라는 위치에 있는 이가 일신의 명성을 위해서 백성들을 희생시키려 했다는 사실이 불러일으키는 분노가 더 컸다. 사람들은 이후로도 한참이나 용모파기에 그려진 다비드의 얼굴 위로 침을 뱉거나 돌을 던지며 분노를 토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깊은 밤. 거리는 소란스러웠던 게 언제냐는 듯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드득. 이질적인 소음이 울려 퍼진 것은 그 즈음이었다. 어둠에 먹혀 보일락 말락 하는 용모파기를 흰 손이 우악스럽게 뜯어냈다. 낡은 클로크를 두르고 후드를 깊이 눌러쓴 다비드가 엉망으로 구겨지고 뜯긴 용모파기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도망칠 때 도망치더라도 로베리치 그 새끼는 죽여버리고 왔어야 했는데.’
다비드가 베이나스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 거기에 로베리치의 실토까지 더해져 다비드의 죄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로 자리 잡아버렸다. 그의 턱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손에 들려 있던 용모파기가 엉망으로 구겨지며 소리를 냈다.
“거기 누구 있소?”
그때, 야간 순찰을 돌던 치안대원들이 소리를 듣고 등불을 높이 들어 올렸다. 다비드가 어깨를 흠칫 굳히고는 불빛이 닿기 전, 재빠르게 골목 안 깊은 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치안대원들을 피해서 걸음을 옮기며 사납게 눈을 희번덕거렸다.
‘이래서야 복수는커녕 당장 이 몸 하나 지키는 것도 고작이겠군.’
켈베티아로 이어지는 마법진 자료를 놓고 와버렸으니 그쪽으로 도주하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로베리치의 증언으로 인해 다비드가 알고 있던 어둠 벌레들의 은신처가 모조리 습격당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떠난 후, 다비드는 위험을 무릅쓰고 폐허에 가까워진 은신처들 근처에 접근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뿔뿔이 흩어진 어둠 벌레들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베이나스 페룬이 죽고 평화주의 마족들이 정권을 잡았다니 어둠 벌레들도 지금은 끈 떨어진 연에 불과해. 회생할 기회라도 잡으려면 어떻게든 그것들을 찾아 협력해야 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현재 다비드는 곳곳에 퍼져 있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이대로라면 누군가의 눈에 띄는 것보다 탈진해 죽는 것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 단신으로 왕국 곳곳에 퍼져 있을 어둠 벌레들을 찾아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니.’
무언가를 떠올린 다비드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눈을 부릅뜬 채 멍하니 선 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찾을 수 없다면…….
“……이쪽에서 불러 모으면 돼.”
보랏빛 눈에 광기와 같은 잔혹함이 서렸다. 굳은 얼굴의 다비드가 골목을 벗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마침이라고 해야 할지, 술에 거나하게 취해 거리를 지나던 남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다비드의 눈에 붉은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과 동시에, 남자의 그림자가 허공으로 솟아오르더니 제 주인의 입을 막고 목을 물어뜯었다.
“……!”
발버둥 치던 남자는 곧 목숨을 잃었다. 다비드는 치안대원들의 눈을 피해 그를 대로변 한가운데에 패대기치고 그가 흘린 피로 바닥에 커다랗게 글을 써 내리기 시작했다. 「벨포르의 입구에 첫눈이 내리면 피와 쾌락의 축제가 시작될 것이다. -다비드 데 켈마르 로클렌.」 글을 완성한 다비드가 이내 깊이 숨을 들이쉬며 몸을 일으켰다. 피로 쓴 글자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소름 끼치도록 냉랭했다. 이것은 다비드가 어둠 벌레들에게 보내는 소집령이자, 란델과 실비아에게 보내는 초대장이었다. 본거지를 잃고 흩어진 어둠 벌레들 또한 머리라는 것이 달렸다면 자신들이 회생할 길은 다비드를 구심점으로 뭉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렇게 크게 일을 벌여놓았으니, 목격자들의 입을 막으려 한다 한들 그가 쓴 글의 내용은 얼마지 않아 전국으로 퍼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교묘하게 몸을 감추고 있던 어둠 벌레들의 귀에도 가 닿으리라. 대로변 저편에서부터 희미하게 서광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다비드는 그 빛이 자신이 쓴 글자를 반짝거리게 하는 모습을 보고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보랏빛 눈에 핏발이 섰다.
‘마지막에 웃는 것이 누구일지 두고 보자고, 알리사.’
그는 이윽고 골목의 그림자 사이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빈자리를 사람들의 비명이 메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