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사랑만큼의 죄책감으로2022.03.14.
한편. 다비드가 회의실에서 도망쳐 모습을 감춘 이후. 실비아는 란델과 함께 수도에 남아 왕궁의 일을 돕고 있었다. 국왕은 다비드의 세뇌로 인해 한동안 정신을 잃었던 터라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신임했던 아들이 저지른 짓에 넋을 놓아 제대로 업무를 처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본래 국왕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그 후계자인 왕세자가 왕의 역할을 대신하나, 지금은 그 당사자가 도망쳐버렸다. 게다가 왕세자 다비드를 따르던 왕궁 마법사와 관료들도 조사를 위해 잡혀 들어가 있으니, 업무는 말 그대로 마비에 가까웠다. 수도 귀족들은 체면조차 잊고 울다시피 하며 란델의 바지 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도와주십시오, 벨포르 공작님!”
“어차피 마족과 관련한 조사에 응하시려면 수도에 머물러 계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 김에……!”
“플로레트 백작께서 최선을 다하고 계신다고는 하나 인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사람 하나, 아니 여럿 살린다고 생각하시고…….”
란델은 하나의 왕국이나 다름없는 북부의 우두머리였다. 신하로 평생을 살아온 자와 군주로 평생을 살아온 자의 일 처리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이 쏟아지는 업무에 비명을 지르며 란델을 붙잡는 것은 기실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란델과 실비아는 다비드의 일, 그리고 마족과의 평화회담이 확실히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북부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왕궁에 방을 얻어 머무르며 혼란한 상황을 하나둘 수습해갔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쯤에서 마무리 짓는 것으로 하지요. 저는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회의실 상석에 앉은 란델이 뒤쪽에 선 오스턴에게 서류를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왕족의 부재를 채움과 동시에 잡아들인 이들을 신문하고, 다비드의 수색에도 참여하고 있었으므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회의를 마무리하자마자 이동하려던 란델이 발걸음을 움찔 멈췄다. 그가 옆자리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실비아에게로 상체를 숙여 엄하게 속삭였다.
“실비아. 아무리 일이 급하다지만 밥은 꼭 챙겨야 합니다. 오스턴에게 말해둘 겁니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릴…….”
“부인, 제발.”
“……알았어요.”
실비아는 바쁜 일정 탓인지 눈에 띄게 핼쑥해진 란델의 얼굴을 보고 어이없는 목소리를 내려다가, 그가 눈썹을 누그러트리고 애원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러자 란델이 웃으며 실비아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귀 끝이 슬쩍 붉어졌다.
“란델.”
“다녀오겠습니다.”
란델은 실비아가 무어라 질책을 내뱉기 전 서둘러 회의실을 벗어났다. 실비아는 민망한 기색으로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플로레트 백작과 눈이 마주쳤다.
“……!”
실비아가 어깨를 움찔 떨고는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심장이 뛰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귓전을 울렸다.
‘……보셨을까?’
잠깐이나마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주위는 상당히 소란한 편이었기에 실비아는 부디 플로레트 백작이 제 행동을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때 오스턴이 말을 걸어왔다.
“마님, 잠시. 곧 ”
“아, 알겠네.”
오스턴은 현재 왕궁에서 켈베티아행 마법진을 역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란델이 켈베티아에서 희미하게나마 검기를 사용했던 것을 본 실비아는 마법진의 식을 조금 더 안정시킨다면 켈베티아에서 인간계로 넘어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여겼다. 오스턴 역시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여 함께 연구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만약 평화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앞으로는 켈베티아와 인간계를 오가야 할 일이 꽤 많아질 테니까. 오스턴의 말에, 아카데미에서 불러들인 학자들과의 회의 시간이 곧이라는 것을 상기한 실비아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마법사라는 것을 밝힌 이후로 선망 어린 시선을 감출 생각도 않는 이들 사이를 가로질러 회의실을 벗어났다. 그 모습을 본 오스턴이 이죽거렸다.
“하여간 다들 마법사라고만 하면 눈이 벌게져서는.”
“하긴, 내가 벨포르 공작 부인, 혹은 플로레트 백작 영애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저들의 시선은 승냥이 떼에 가까웠겠지.”
“그러니까 말입니다……. 아니 근데 잠깐, 마님께서 저들이 그러리라는 걸 어찌 아십니까? 누가 들으면 귀족이 아닌 삶도 살아본 분인 줄 알겠습니다.”
“……시끄러워.”
실비아와 오스턴이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막 복도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등 뒤에서 다급한 기척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비아.”
그 부름을 듣는 순간, 생각이라는 것을 할 새조차 없이 발이 먼저 멈췄다. 숨조차 쉬지 못하고 얼어붙었던 실비아가 희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붙잡은 사람은, 당연하겠지만 플로레트 백작이었다. 실비아는 그의 얼굴을 시야에 담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픈 충동이 일었으나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 대신 입술을 꾹 닫았다.
‘……후회는 안 해.’
마법사라는 사실을 밝힌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다비드를 처리하고 란델과 함께 삶을 영위하기로 한 이상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하지만 플로레트 백작 부부의 앞에서 실비아는 죄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벨포르 공작령으로 가기 전까지, 아마도 플로레트 백작 부부의 인생에 단 한 번뿐일 자식의 어린 시절을 알록달록한 빛깔이 아닌 음울한 잿빛으로 물들여버렸으니까.
-저 어린아이가 대체 왜…….
모른 척 눈을 돌리고 귀를 막았지만, 평범한 어린아이답지 않던 자신의 태도 때문에 백작 부부가 수많은 신음과 눈물을 삼켰음을 알고 있었다.
그때 당시의 실비아는 부부가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목격했을 때 조금 불편한 기분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녀는 삶을 영위할 생각이 없었고, 어차피 죽으면 모두 끝날 관계일 뿐이라고 여겼기에 그들에게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저…… 하필 자신을 자식으로 얻은 그들을 동정했다. 그래서 더욱 백작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실비아에게 최선을 다했고, 본디 후회와 자책이란 최선을 다하지 못한 사람에게 남는 것이었으니.
“……무슨 일이세요?”
실비아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하지만 희게 질린 얼굴은 감출 수 없었다. 플로레트 백작은 실비아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새하얗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가오려던 발길을 멈추었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난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덤덤한 목소리를 냈다.
“별건 아니다. 그저…… 네가 요즘 많이 야윈 것 같아서. 부인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고.”
“…….”
“그러니 괜찮다면 집에 들러서 밥이라도 한 끼 들고 가는 것이 어떻겠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우습게도 눈물이 울컥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실비아는 황급히 숨을 들이켜며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아낼 듯 목이 메었다.
‘왜…….’
화를 내야 하잖아. 지금까지 세상사에 관심도 없는 듯이, 정 없게 굴어놓고 이런 걸 감추고 있었냐며 매섭게 추궁해야 하잖아. 그런데 당신은 대체 왜, 그런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보는 건지…….
-엄마!
문득 머릿속에 두 번째 생에서 얻었던 딸, 줄리엣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듯도 했다. 실비아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이던 차였다.
“백작님!”
복도 끝에서 시종이 큰 목소리로 백작을 불렀다.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온 그가 실비아와 오스턴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아, 마침 공작 부인과 오스턴 님께서도 계셨군요. 저, 그것이…….”
“무슨 일인가.”
심상찮은 분위기에 백작이 얼굴을 굳히고 시종을 돌아보았다. 백작과 꼭 닮은 실비아의 눈 역시 차게 가라앉았다. 잠시간 숨을 몰아쉬던 시종이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범인은 수배 중인 다비드 데 켈마르 로클렌. 살인…… 사건입니다.”
* * * 벨포르 공작령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유독 추운 기후였다. 수도에는 이제야 겨우 단풍이 들 시기였지만, 북부는 당장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추워졌다.
‘이런 건 수도에 있을 때가 좋았는데.’
실비아는 씻고 욕실을 벗어나자마자 온몸을 에워싸는 찬 공기에 어깨를 부르르 떨며 제 팔을 쓰다듬었다. 실비아는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이끌고 벽난로 앞으로 향했다. 다만 소파는 혹 불씨가 튈까 봐 벽난로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 놓여 있었기에 추위를 달래기에는 조금 아쉬웠다. 고민하던 실비아는 검은 털 가운을 여미며 벽난로 앞에 웅크려 앉았다. 그러자 불꽃의 온기가 서서히 차게 식었던 피부를 데웠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잡념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실비아는 멍한 얼굴로 벽난로 앞에서 몸을 데웠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그녀와 같은 가운을 걸친 란델이 들어왔다. 그는 침대가 비어 있자 고개를 갸웃했다가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실비아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비아?”
“왔어요? 씻고 나왔더니 좀 추워서요.”
“벽난로 앞이라고는 하지만 바닥이 찰 텐데……. 잠시 기다리십시오.”
란델은 그 말을 남기고는 이불을 들고 와 실비아에게 둘러주었다. 실비아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제 몸을 다 덮고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이불자락을 들어 올렸다.
“당신도 들어와요.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잖아요.”
그 모습이 불현듯, 일전에 작은 오두막에서 있었던 일을 떠오르게 했다.
-……들어와요.
어둑한 오두막, 일렁이는 불빛이 그려내던 그림자가……. 짝!
“란델?”
순간적으로 난잡한 상상을 할 뻔한 란델이 스스로 뺨을 후려쳤다. 실비아가 놀라 눈을 끔벅였다.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란델이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돌렸다.
“……큼. 저보다는 부인의 건강을 걱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체온 빌려주기 싫어요? 싫으면 말…….”
“그건 아닙니다.”
란델은 실비아가 말을 바꾸기 전에 냉큼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함께 이불을 둘렀다. 실비아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기울여 란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들이 갑작스럽게 수도에서 벨포르 영지로 돌아오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벨포르의 입구에 첫눈이 내리면 피와 쾌락의 축제가 시작될 것이다. 다비드가 보란 듯 무고한 백성을 해치고 그런 말을 남겼으므로.
“……아마 어둠 벌레들을 불러모으려는 거겠죠.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밖에 수가 없을 테니까.”
실비아가 조용조용 말문을 뗐다. 그러자 란델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며 되물었다.
“망령들에게선 아무런 소식도 없었습니까?”
“네. 아무리 지금은 도망자라고 한들 그 역시 마왕이었던 자고, 그만한 어둠을 다룰 수 있으니까요. 작정하고 몸을 숨기려 든다면 망령만으로 자취를 찾기는 힘들겠죠.”
다비드가 도주한 이후, 란델은 가능한 모든 이들의 눈을 빌려 그를 수색했다. 실비아는 그와 별개로 망령들까지 이용해 다비드를 찾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본디 조각만 한 어둠은 더 큰 어둠에 먹히는 법이다. 일개 망령들이 작정하고 모습을 감춘 다비드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까지 걱정되진 않아요. 어차피 모두가 이게 저들의 마지막 발악이라는 걸 아니까. 하지만…….”
오히려 다비드보다 신경 쓰이는 쪽은 따로 있었다. 실비아의 얼굴과 목소리가 흐려졌다. 시선을 옆으로 돌린 란델이 손등으로 가볍게 실비아의 손을 쓸었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백작 부부 때문입니까?”
“……네, 우습게도 그러네요.”
실비아는 가만히 눈을 감고 제 뺨을 쓰다듬는 감촉을 느끼다가 자조했다. 삶을 이어 가기로 결심한 이상, 란델에게 했듯이 백작 부부에게도 그녀가 감추고 있던 것들을 제대로 털어놓아야 하는 것이 옳았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란델만큼이나 그녀를 사랑하는 이들이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두려웠다. 받은 사랑의 무게만큼 죄책감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