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저는 부인의 것이잖습니까2022.03.17.
란델 역시 전생을 기억하는 이였기 때문에 실비아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가 실비아의 손을 감싸 쥐고 잠잠히 손등을 토닥이며 그녀를 위로했다.
“저도 옆에서 함께하겠습니다. 백작 부부께서 저희의 말을 받아들이실지, 아니면 그냥 믿지 않아도 넘어가 주실지는 모르겠지만…….”
낮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불안한 마음을 차츰 가라앉혔다. 란델이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말을 맺었다.
“확실한 건 저희를 다그치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실 분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네요.”
실비아는 란델의 말에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긴장이 턱 풀리며 탈력감이 찾아들었다. 그래. 비록 겉핥기뿐이었다고 하나, 그녀가 그간 보아온 플로레트 백작 부부는 그녀를 미치광이 취급하거나 욕을 퍼부을 이들이 아니었다. 그것을 란델의 말을 듣고서야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이 조금 우습고 슬펐다.
‘그러지 말걸.’
그것을 인정하자 조금 더 날 것 그대로의 후회가 찾아들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아니, 란델을 만나 다시 삶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될 줄 몰랐다고 해도. 내가 상처받을 것이, 혼자 남겨질 것이 무서워 상대를 밀어내기 전에. 비록 언젠가는 상처받게 될지라도, 헤어지게 될지라도. 적어도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그들과의 관계에 최선을 다해 볼걸. 플로레트 백작 부부 역시 언제나 삶의 의욕을 놓아버린 듯 굴며, 저들에게 아닌 척 거리를 두던 딸아이가 마냥 달가웠을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그들은 있는 힘껏 실비아를 사랑했고, 노력했다. 실비아가 침대에 늘어져 있을 때면 커튼을 걷어주며 말을 붙였고. 그녀가 부모의 눈망울에 마지못해 식당으로 내려가 식사를 함께하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뛸 듯이 기뻐했다. 그렇다 보니, 어차피 죽음을 맞이하면 상관없어질 이들이라고 치부하고 거리를 두려고 해도.
-실비아!
그렇게나 환한 웃음을 담아 제 이름을 불러주는 이들을 외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결혼하거라.
갑작스러운 결혼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이유에는 그런 부분도 없지 않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희망을 외면하지 못해 란델과의 결혼을 받아들인 것도 맞지만. 은연중 플로레트 백작 부부가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실비아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면 이처럼 죄책감을 느낄 일도 없었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실비아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란델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왜 웃으십니까?”
“음.”
잠시 고민하던 실비아가 슬쩍 운을 띄웠다.
“솔직히 말해도 돼요?”
“예.”
“처음 당신과의 결혼을 제안받았을 때…….”
실비아는 망설이다가 덤덤히 말을 맺었다.
“사실 난 당신과의 결혼이 내게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
실비아의 옆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란델의 얼굴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녀의 말뜻이 ‘죽을’ 기회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그는 구태여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실비아 역시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녀가 발끝으로 란델을 톡 건드렸다.
“어찌 보면 기회는 맞았죠. 그 덕분에 당신이랑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그 말과 행동에 잠시 가라앉았던 란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조금 후회도 돼요. 나를 사랑해줬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조금 더 열심히 살아볼걸, 하는 후회.”
“…….”
“……그랬으면 지금 부모님의 얼굴을 보는 게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실비아는 조금 힘겹게 말을 마치고는 눈꺼풀을 닫았다. 그녀가 란델의 품에 파고들 듯 조금 더 무게를 더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란델은 한참이나 그런 실비아의 손을 토닥여주었다. 그저 묵묵히, 말없이 옆을 지켜주는 것이 오히려 더욱 고마웠다. 란델 덕분에 조금이나마 복잡한 마음을 추스른 그녀가 별안간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로,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루베아가 오스턴과 연인 관계가 된 것처럼 말이죠.”
“아.”
란델이 실비아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실비아는 그와 함께 웃으며 북부로 돌아오자마자 접했던 충격적인 광경을 떠올렸다.
-저건…… 글레버 백작 아닙니까?
-오스턴도 있네요.
이블린의 도움을 받아, 비틀림을 통해 간신히 시간 맞춰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실비아와 란델은 벨포르 성의 정문에서 익숙한 인영들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두 사람의 곁에 서 있는 마차에 글레버 백작가의 문양이 박혀 있는 것을 보니 루베아가 오스턴을 데려다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란델은 곧 오스턴의 옷깃 사이로 붕대가 감겨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다. 실비아는 그와는 조금 다른 이유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꼭 오스턴이 백작을 달래는 것 같은…….
실비아가 의구심 어린 말을 뱉던 차였다. 루베아와 대화를 나누며 쩔쩔매던 오스턴이 별안간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 광경을 본 실비아와 란델이 턱을 떨구며 기겁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주, 주군?
-공작 부인? 대체 언제 오셨……. 설마 보셨……나요?
뒤늦게 공작 부부를 발견한 오스턴과 루베아가 놀라 펄쩍 뛰었다. 란델은 오스턴을, 실비아는 루베아를 각각 붙잡고 추궁한 끝에 그들은 란델과 실비아가 켈베티아에 있는 사이 연인이 되었다 실토했다. 사실상 연인이라기보다는 약혼한 관계에 가까웠다. 물론 ‘어쩌다가’ 연인이 되었는지는 듣지 못했다. 정확히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 듣지 않았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물음을 꺼내자마자 오스턴과 루베아의 얼굴이 나란히 터질 듯 붉어진 탓에, 란델과 실비아는 한발 먼저 부부가 된 경험을 살려 얌전히 그들의 어깨를 놓아주었으니까. 란델이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필리아와 제프리도 마찬가지고요. 가출이라니…….”
-야, 대체 어딜 갔다 온 거야! 공작 부인도요!
란델과 실비아의 충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가까스로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정문을 넘자마자 기사들의 숙소 쪽에서 필리아가 목소리를 높이며 달려왔다. 그 뒤로 난처한 얼굴의 제프리가 따라왔다.
-……필리아?
-영애가 왜 여기 있는…… 거죠?
란델과 실비아는 어쩐지 조금 전에 느꼈던 충격이 되풀이될 것 같다는 예감에 나란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들의 예감은 사실이 되었다.
-저 가출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제프리 방에서 신세 지고 있고요.
-필, 아니, 영애! 그렇게 말하면 다들 오해하시잖습니까!
-아. 그 대신 쟤는 다른 선배 방에서 묵고 있어요. 됐지?
필리아가 해맑게 한 말에 란델이 뒷덜미를 잡고 넘어가려던 찰나. 제프리가 황급히 소리를 지른 덕에 란델이 세이크린 후작 대신 황당함에 기절하는 불상사는 막았다. 실비아는 뒤늦게 얼마나 걱정한 줄 아냐며 자신을 끌어안고 엉엉 울던 필리아를 달랬던 기억을 상기하고는 픽 웃었다.
“물론 가장 예상 못 한 건 내 인생이지만.”
“그러게 말입니다.”
실비아의 말에 란델이 마주 웃었다. 그가 한 손을 뻗어 실비아의 볼을 감싸고 부드럽게 그녀의 고개를 돌려 제 쪽을 바라보게 했다. 저 하나만을 오롯이 담는 저 시선이 더없이 기껍다. 란델의 연녹색 눈이 애정을 담아 휘어졌다.
“하지만 저는 사실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이렇게 되겠다고 어렴풋이 예상했습니다.”
“뭐? 정말요? 어떻게?”
“그냥 느낌이죠.”
“……당신, 그렇게 말할 때마다 진짜 짐승 같은 거 알아요?”
“하하.”
실비아는 또다시 란델이 괴물 같다는 것을 느꼈는지 콧잔등을 찡그리며 질색했다. 웃음을 터트린 란델이 고개를 기울여 실비아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가 뗐다. 그가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웃으며 속삭였다.
“그리고 보통은 이걸 사랑이라고 부르더군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실비아가 웃음을 터트리려고 하자, 란델은 다시금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그녀의 웃음을 막아버렸다. 다정히 입 맞추는 두 사람의 등 뒤로 흰 눈송이가 하나 떨어져 내렸다.
* * * 밤이 깊자 흰 눈송이가 하나둘 보였다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새벽이 되었을 즈음 본격적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새벽. 란델은 의장을 완벽하게 갖추고, 털 망토까지 두른 차림이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실비아를 기다리며 깜깜한 창밖을 말없이 응시했다. 사실 창에 비치는 것은 바깥 풍경이 아닌 그의 모습이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우리가 네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그건 너도,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거라.
-다녀오마.
어렸을 적. 선대 공작 부인이 그를 남겨두고 남편을 돕기 위해 전장으로 나아가던 것이 꼭 이런 눈 내리는 밤이었다. 란델은 제 모습이 작고한 선대 공작과 꽤 닮아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왜인지 과거가 겹쳐 보이는 듯한 상황에 심장이 불안하게 수런거렸다. 란델은 주먹을 꾹 말아 쥐며 불안함을 달래려 애썼다.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
그때는 지금과 달리 북부에 제대로 된 마법사도, 수도의 지원도 없던 때였다. 게다가 상대는 마족이 아닌, 궁지에 몰려 발악하는 인간들이었다. 그러니 결과도 다를 것이다. 란델도 머리로는 이것이 공연한 불안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내리는 눈에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때 창문으로 그처럼 준비를 마친 실비아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란델이 몸을 돌려 실비아를 바라보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웃었다.
“……이런. 왠지 긴장한 것처럼 보여서 놀래켜 주려고 했는데.”
“다시 뒤돌면 되겠습니까?”
“말이라도 고맙네요. 오래 기다렸어요?”
실비아가 미소 띤 얼굴로 란델을 마주 보며 그의 손을 찾아 쥐었다. 그러자 우습게도 조금 전까지 계속해서 그를 흔들던 불안감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란델은 그것이 신기해 조금 웃었다. 숨을 길게 내쉰 그가 실비아의 손을 단단히 마주 잡았다.
“갈까요, 부인.”
“좋아요.”
란델과 실비아는 손을 단단히 마주 쥔 채 벨포르 공작령의 입구로 향했다. 그들이 수도에서 북부까지 이동마법으로 움직일 때 늘 도착 지점으로 삼는 곳이었다.
“오셨습니까.”
성문을 지나 밖으로 나가자 그곳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왕실 근위대장이 고개를 숙여 그들을 맞이했다. 란델이 마주 인사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반역자들의 낌새는?”
“아직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동이 트면 모습을 드러낼 것 같습니다. 벨포르 기사단은 다 도착한 겁니까?”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등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성문을 닫아라!”
“예!”
우렁찬 외침이 들리더니 거대한 성문이 서서히 움직였다. 이내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성문이 완벽하게 성벽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벨포르 기사단이 모두 자리를 비운 사이, 비틀림이 발생해 이지가 없는 마물이 주민을 습격했다가는 큰일이었다. 하여 공작 부부는 주민들을 벨포르 성으로 대피시킨 후 공성전을 하는 것보다, 주민들을 결계석이 설치되어 있는 마을에 그대로 두고 밖으로 나와 속전속결로 싸움을 끝내는 것을 택했다. 그럼에도 승리를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양측의 전력은 차이가 났다.
‘변수라고 한다면 왕세자…… 정도일까.’
실비아는 란델을 힐끔 일별했다. 혹시 몰라 그에게 갖가지 방어용 마법석을 지니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염려를 완전히 거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란델이 살짝 웃으며 실비아와 맞잡은 손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댄 그가 눈을 휘어 웃었다.
“함부로 다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부인의 것이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