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 연인 (102/118)

102. 연인202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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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란델이 작정하고 미소를 짓자 어쩐지 속에서 훅 불길이 이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지…… 않았나? 실비아는 순간 말문이 막혀 입술만 벙긋거리다가 달아오른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16558823306231.jpg“……당신 정말 뻔뻔해진 거 알죠?”

16558823306235.jpg“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 모습을 본 란델이 싱긋 웃었다. 결국 실비아도 긴장을 내려놓고 따라 웃었다. 한편, 공작 부부와 벨포르 기사단 사이에 선 오스턴과 루베아는 목소리를 낮추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16558823306238.jpg“당신이 대체 여길 왜 옵니까? 지금이라도 돌아가십시오.”

16558823306242.jpg“나 역시 벨포르의 가신이에요. 저렇게 드러내놓고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겠다고 하는 것들을 어떻게 두고 봐요?”

오스턴이 루베아를 질책하자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그러나 오스턴은 쉬이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그가 다시금 표정을 굳히고 항의했다. 두 사람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16558823306238.jpg“그렇다고 해서 가주가 직접 나오는 건……!”

16558823306242.jpg“당연히 그래야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전공을 챙기는 게 더 불명예스러운 거 아닌가요?”

16558823306238.jpg“아니, 평소에는 그렇게 합리적이던 사람이 왜 이럴 때만 고집을 피워요!”

16558823306242.jpg“그럼 당신을 여기 두고 나 혼자 안전한 곳에서 지켜보라고요?”

16558823306238.jpg“…….”

루베아가 울컥해 뱉은 말에 오스턴이 움찔 말을 멈췄다. 루베아가 이를 악물고 오스턴을 노려보았다.

16558823306242.jpg“나는 연인을 혼자 전장에 내보내놓고 뒤에서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말에 오스턴의 턱이 떨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황급히 주위의 눈치를 살핀 그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더듬거렸다.

16558823306238.jpg“여, 여…….”

16558823306242.jpg“싫으면, 뭐. 헤어지든가.”

16558823306238.jpg“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까!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요, 걱정돼서!”

16558823306242.jpg“걱정 두 번만 하면 헤어지다 못해 모르는 사람인 척하자고 그랬겠어요?”

오스턴의 잔소리로 시작되었던 언쟁은 어느새 루베아가 오스턴을 질책하는 상황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스턴은 늘 그랬듯 마지막에는 쩔쩔매며 자신이 과했다고 사과했다. 루베아는 마법으로 꽃송이를 만들어내 제게 건네는 그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웃어버렸다.

16558823322983.jpg‘봐도 봐도 익숙해지질 않네.’

기사단에 섞여서 그 광경을 보던 제프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처음 오스턴과 루베아가 연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를 포함한 북부의 모두가 뒤집어졌다. 물론 전부터 두 사람과 관련한 가십은 많았지만, 실제 그들의 관계가 개와 고양이와 별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런데 그 가십이 진짜일 줄이야.

16558823322983.jpg‘두 분이 연인이라…….’

틈만 나면 투닥거리긴 하지만, 나란히 선 오스턴과 루베아는 굉장히 잘 어울렸다. 제프리는 그들을 보다가 무심코 필리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16558823322992.jpg-난 널 신경 쓰이게 하지 않을 거야.

  하루 전. 필리아는 루베아처럼 직접 전장에 나서야겠다며 날뛰는 세이크린 후작을 말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마차에 오르기 전, 필리아는 제프리를 또렷이 직시하며 덤덤히 말했다.

16558823322992.jpg-물론 마음 같아서는 네 옆에 있고 싶지만, 나는 전쟁터에서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옆에 있다면 오히려 네가 나를 신경 쓰느라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잖아. 나는 사람들이 네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제대로 봐줬으면 좋겠어.

16558823322983.jpg-…….

16558823322992.jpg-그러니까.

  필리아는 담담히 저를 마주 보는 제프리를 향해서 한 발자국 다가갔다. 제프리의 얼굴을 손안에 담듯이 감싼 필리아가 그와 가까이서 시선을 맞추며 힘주어 말했다.

16558823322992.jpg-돌아와, 내 곁으로.

16558823322983.jpg-…….

16558823322992.jpg-털끝 하나 다치지 말고 멀쩡한 모습으로. 반드시 돌아와야 해. 알았지?

  그리 말하던 필리아의 얼굴을 떠올리자 상황에 맞지 않게 반사적으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제프리가 피식피식 웃자 그의 곁에 서 있던 오스몬드가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16558823337773.jpg“후배님. 연애해서 행복한 건 알겠는데 내 앞에서 자꾸 그렇게 염장 지르면 죽여버린다?”

상냥하고 살벌한 음성이었다. 제프리가 필사적으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16558823322983.jpg“……죄송, 큼. 죄송합니다.”

16558823337773.jpg“그거 말고는?”

16558823322983.jpg“사랑하고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선배님.”

16558823337773.jpg“옳지, 잘한다.”

오스몬드의 표정이 그제야 풀렸다. 제프리는 슬쩍 팔을 뻗어 으스대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오스몬드가 그 누구보다 흔쾌히 필리아와 제프리를 응원해주고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훈훈한 광경을 연출하던 두 사람은 이내 풀었던 긴장을 다시금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굳은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16558823337773.jpg“……해 뜬다.”

오스몬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이들 또한 서서히 하늘이 밝아지는 모습을 보고 긴장된 얼굴로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16558823359437.jpg“……!”

어느 순간, 가장 앞에 서 있던 란델과 실비아의 얼굴이 나란히 굳어졌다. 그들의 시선이 새벽의 안개와 눈으로 가려진 길 저편을 응시했다.

16558823306235.jpg“일동, 발검.”

아침의 고요 위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사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절제된 동작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오스턴은 언제든 마법을 펼칠 수 있도록 양손에 마력을 휘감아두었다. 저벅-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엇갈리며 메아리를 만들어 냈다. 이윽고 다비드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망토를 두른 그의 얼굴에는 비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비드에 이어 온통 검은 옷 일색의 어둠 벌레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가 제법 많았던 터라 란델이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16558823306235.jpg“검기를 쓸 줄 아는 이도 몇 있는 것 같군요.”

16558823306231.jpg“……마법사도 하나 있네요.”

실비아는 다비드의 바로 곁을 지키는 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동조했다. 아무래도 어둠 벌레들이 자신들의 주요 전력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껴둔 듯했다. 다비드가 도망친 이후 소탕했던 어둠 벌레들의 소굴에서는 무력이 뛰어나다고 할 만한 이를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16558823306231.jpg‘그래봤자 오스턴에도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인 것 같네.’

그럼에도 다비드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것이 못내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탓에 실비아는 상대의 전력을 바삐 파악하면서도 다비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때 다비드를 필두로 전진하던 어둠 벌레들이 연합군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췄다. 발걸음 소리가 모두 잦아들자, 왕실 근위대장이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16558823337773.jpg“다비드 데 켈마로 로클렌!”

16558823359468.jpg“…….”

16558823337773.jpg“감히 국왕 폐하를 세뇌해 왕국을 기만한 죄,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투항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폐하의 전언이다! 순순히 투항하라!”

반쯤은 도발에 가까운 근위대장의 말이 울려 퍼지자 왕실 근위대, 벨포르 기사단의 얼굴에 긴장된 기색이 감돌았다. 검을 쥔 그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전투가 벌어질 것처럼 팽팽한 긴장이 사람들을 휘감았다.

16558823359468.jpg“…….”

그러나 다비드는 그 말에 분노의 기색을 일절 내비치지 않았다.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이 웃는 얼굴의 그가 힐긋 시선을 돌렸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다비드가 별안간 제 곁에 서 있던, 평범한 어둠 벌레의 어깨를 움켜쥐고는 그의 가슴을 크게 베었다. 촤악-! 검이 크게 휘둘러지며 피가 튀었다. 연합군 쪽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16558823337773.jpg“저게 무슨……!”

16558823337773.jpg“왜 저런 짓을……!”

다음 순간. 다비드가 제가 벤 어둠 벌레를 연합군 쪽으로 밀쳤다. 그러자 그의 곁에 서 있던 마법사가 서투른 동작으로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가슴을 베이고 비틀거리던 어둠 벌레의 모습이 깜박여 사라지더니 연합군의 머리 위에서 다시 나타났다. 시신이 피를 흩뿌리며 연합군의 머리 위로 추락했다.

16558823337773.jpg“피해라! 시신에 마법석이 심겨 있을지도 모른다!”

근위대장이 기겁해 외쳤다. 그러나 기사들이 미처 한 발을 떼기도 전. 쩌적- 들릴 리 없는 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듯한 착각과 함께, 하늘이 갈라졌다. 북부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익숙하다 못해 질리도록 보아온 광경이었다. 란델의 입에서 근위대장보다 몇 배는 더 커다란 고함이 튀어나왔다.

16558823306235.jpg“비틀림이다! 오스턴!”

16558823306238.jpg“예, 주군!”

오스턴이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에서 빛이 반짝이는 것과 함께 허공에서 떨어지던 어둠 벌레의 시신이 저 멀리의 땅바닥으로 옮겨졌다. 후드득- 하지만 이미 흩뿌려진 피는 없앨 수가 없었다. 동시에 눈을 크게 뜬 실비아가 곧장 연합군의 머리 위로 유리 돔 같은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콰앙-! 간발의 차를 두고 연합군의 머리 위로 펼쳐진 방어막이 거세게 흔들렸다. 비틀림에서 쏟아져 나온 마물들이 방어막을 발톱으로 긁으며 울부짖었다. 키에에에엑! 그 울음소리가 무언가의 신호라도 되는 마냥 다비드와 어둠 벌레 무리 또한 땅을 박차고 연합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16558823306235.jpg‘이래서……!’

란델과 근위대장이 빠르게 평정을 되찾고 기사들을 정비했다. 실비아는 기사들을 보호하며 마물들을 어둠 벌레 쪽으로 밀어내려 애썼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인파 너머로 다비드를 노려보았다.

16558823306231.jpg‘어쩐지 어둠 벌레들의 소굴에서 비틀림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는 연구에 관련한 자료를 찾지 못했다고 하던데. 설마 그 자료를 챙겨 도망쳤던 건가?’

실비아는 란델과 결혼해 북부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전 글레버 후작이 이동 마법석을 이용해 비틀림과 연회장을 이었던 것을 아직 잊지 않았다. 당시에도 아무리 마법석이 있었다고 한들, 비틀림의 위치를 미리 알고 있는 것이 아닌 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16558823306231.jpg‘정말 비틀림을 예측할 수 있는 자료가 있는 모양이군.’

실비아는 비틀림이 닫힐 때까지 방어막을 유지하다가, 비틀림이 닫힌 후에는 방어막을 거두고 전투에 합류했다. 어둠 벌레들이 어느새 연합군과 섞여 난전을 벌이고 있었기에 광역 마법을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처리해 나갔다.

16558823337773.jpg“전형을 유지해!”

16558823337773.jpg“물러서지 마라!”

16558823337773.jpg“반역자들을 제압하라!”

비틀림의 예상치 못한 등장 때문에 당황하긴 했으나, 연합군은 곧 빠르게 평정을 찾았다. 처음의 혼란을 틈타 연합군 사이로 섞여 검을 휘두르던 어둠 벌레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압당해 쓰러졌고, 마물들은 기사들의 협공에 힘없이 울부짖으며 스러졌다. 애초에 전력 차이가 절망적일 정도로 큰 싸움이었다. 싸움의 승기는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연합군 쪽으로 기울었다. 모든 사람이 예측했듯 그저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전투였다.

16558823337773.jpg“크아악!”

16558823337773.jpg“사, 살려……!”

키이이익! 키익! 실비아는 기사들이 어둠 벌레들을 확실히 처리하도록 두고 한 걸음 한 걸음 다비드를 향해 나아갔다. 반대쪽에서는 란델이 그녀와 비슷하게 어둠 벌레들을 베어 넘기며 다비드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먼저 다비드의 곁에 도달한 것은 란델이었다. 란델이 살벌하게 검을 휘두르자 다비드가 혀를 쯧 차며 중얼거렸다.

16558823359468.jpg“애초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쓸모가 없을 줄이야.”

16558823337773.jpg“컥……!”

다비드는 제게 짓쳐들어오는 검을 향해 어둠 벌레 하나를 휙 밀쳤다. 그의 주변에서 검을 휘두르던 어둠 벌레가 란델의 검에 가슴을 찔려 목숨을 잃었다. 그것을 본 란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비드가 유쾌하게 웃었다.

16558823359468.jpg“뭘 그렇게 봐. 어차피 마지막인데 웃어야지.”

16558823306235.jpg“너……!”

형형한 얼굴의 란델이 다비드와 거리를 좁히며 매섭게 검기를 휘둘렀다. 다비드가 손을 휘둘러 검날을 막았다. 카강! 분명 손과 검이 부딪힌 것인데 쇳소리가 났다. 어느새 길게 자라난 다비드의 손톱이 어둠에 휘감긴 채 란델의 검을 막고 있었다. 다비드의 목덜미부터 얼굴 쪽으로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붉게 물든 눈을 한 그가 광소했다.

16558823359468.jpg“버러지들이 목숨에 연연하는 건 여전하구나! 아주 고마울 지경이야!”

다비드의 눈에서 광기를 읽어낸 란델이 본능적으로 발을 뒤로 빼는 것. 실비아가 위험에 처한 병사 하나를 구하고 뒤늦게 란델과 다비드 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 혹은, 바닥에서 튀어나온 다비드의 그림자가 그대로 란델을 먹어 삼킨 것. 셋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쨍그랑- 란델의 몸에 지니게 했던 마법석들이 잇따라 깨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발 늦게 실비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16558823306231.jpg“란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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