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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사랑하지 않을 리가 (103/118)

103. 사랑하지 않을 리가2022.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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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발 늦게 실비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16558823474968.jpg“란델!”

그녀는 반사적으로 마법을 사용해 다비드를 바닥으로 찍어 눌렀다. 그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바닥에 박히듯 엎어진 그의 주위로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동그랗게 금이 갔다.

16558823474974.jpg“커헉!”

16558823474983.jpg“으, 으아아!”

16558823474983.jpg“소, 손이……!”

다비드가 피를 울컥 토하며 신음을 흘렸다. 그의 주위에 있다가 마법에 휘말린 어둠 벌레 몇, 그리고 연합군 몇이 다친 곳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온몸이 거대한 산에 짓눌린 듯한 상황에서도 다비드는 아득바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그리고 그 가운데로 살기 어린 표정을 지은 채 제게 걸어오는 실비아의 모습을 목격한 그가 피가 섞인 웃음을 뱉었다.

16558823474974.jpg“하, 하하! 큭, 하……!”

퍽! 그러나 다비드의 웃음은 얼마 가지 못하고 끊어졌다. 그의 앞에 다다른 실비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복부를 걷어찼기 때문이었다.

16558823474974.jpg“커흑, 크…….”

다비드가 또 한 번 피를 토하며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다. 실비아는 땅에 반쯤 등을 기대고 누운 자세가 된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녀가 시리도록 싸늘한 목소리를 냈다.

16558823474968.jpg“어딨어.”

16558823474974.jpg“크, 크흐, 흐…….”

16558823474968.jpg“어딨는지, 물었어. 내가.”

실비아는 분노가 뚝뚝 묻어나는 음성으로 이를 악물고 한 단어, 한 단어를 내뱉었다. 동시에 티 나지 않게 마력과 어둠으로 그의 그림자를 샅샅이 뒤졌으나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차라리 무언가 가로막힌 느낌이라도 들었다면 나았을 것이다. 믿기는 어려우나 만에 하나 그녀의 능력이 다비드보다 부족해서 란델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라면 다비드를 뛰어넘을 때까지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시도하고 뛰어넘으면 되니까. 하지만 그들의 주위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란델이 이 세상에서 깨끗이 지워졌다는 것처럼. 손끝이 불안으로 덜덜 떨렸다. 실비아가 멱살을 쥔 손을 가까이 끌어당기며 이를 갈았다.

16558823474968.jpg“무슨 짓을 한 거야.”

16558823474974.jpg“꽤, 볼 만한 얼굴을, 하고 있군. 그대…….”

다비드가 피로 젖은 입매를 휘며 키들키들 웃었다. 실비아는 다비드를 바닥에 패대기치며 그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녀가 감정 한 톨 읽히지 않아 더욱 공포스러운, 무감한 얼굴로 다비드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일었다. 살아 숨 쉬는 생명이라면 저만한 위압감 앞에서 자연히 보일 수밖에 없는 반응이었다. 다비드가 숨을 헐떡이며 실비아를 비웃었다.

16558823474974.jpg“그 머저리 같, 은 놈이 사라진 게 그렇게 화가 나던가?”

16558823474968.jpg“꺼내, 당장.”

16558823474974.jpg“해보든가.”

퍽.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댄 실비아가 비웃음을 내뱉는 다비드의 입을 후려쳤다. 그의 얼굴을 가격한 손이 욱신거리며 저렸으나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16558823474968.jpg“꺼내.”

무표정한 얼굴과 목소리만 두고 보면 조금 전으로 시간이 되돌아간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러나 흐르는 피가 늘어난 다비드의 입가와 붉게 달아오른 실비아의 손이 조금 전 있었던 일이 가짜가 아님을 증명했다. 다비드는 고개를 틀어 피가 섞인 침을 옆으로 퉤, 뱉어내고는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사뭇 다정한 음성으로 그가 답했다.

16558823474974.jpg“못 꺼내.”

퍽.

16558823474968.jpg“꺼내.”

16558823474974.jpg“못…….”

퍽.

16558823474968.jpg“꺼내.”

퍽!

16558823474968.jpg“꺼내라고!”

결국 실비아의 손에서도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듯 목소리를 높인 그녀가 숨을 몰아쉬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양손으로 다비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가쁜 숨 사이로 억누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16558823474968.jpg“……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그것을 항복이라고 본 것인지 다비드의 입가에 오롯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가 한쪽 팔로 힘겹게 바닥을 지탱해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그마저도 힘에 겨운지 말이 간간이 끊겨 흘러나왔다.

16558823474974.jpg“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될 텐데. 그저 잠깐의,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을 보여주는 것뿐이니까. 이를테면…….”

다비드가 이제는 눈에 띄게 떨리고 있는 손을 천천히 실비아 쪽으로 뻗었다. 피에 젖은 손끝이 흰 볼 위에 살짝 닿았다.

16558823474974.jpg“……그딴 놈을 사랑하지 않는 그대의 모습이라든가.”

16558823474968.jpg“……뭐?”

16558823474974.jpg“혹은 나를 사랑하게 되어 그놈을 버리고 떠나는 광경도 괜찮겠군.”

실비아의 사고가 일순 정지했다. 귓가를 파고든 말이 그녀의 생각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해석되지 않았다. 다비드가 실비아에게 입을 맞출 듯 거리를 좁히며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그가 피 묻은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지그시 누르자 언뜻 피비린내가 코끝에 스쳤다.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본 다비드의 눈은 보랏빛이라기보다는 혼돈 그 자체 같았다. 분노, 희열, 집착과도 같은 것들이 모조리 뒤섞인 광기.

16558823474974.jpg“알리사…….”

다비드가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는 은근한 부름을 흘렸다. 그러나 직후, 실비아의 뺨을 감싸 쥔 그의 손에 힘이 콱 들어갔다. 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속삭였다.

16558823474974.jpg“뭐 해, 날뛰지 않고.”

16558823474968.jpg“…….”

16558823474974.jpg“내 목을 쳤던 그때처럼 날개를 펼치고 사람들에게 힘을 보여. 그렇게 하면 네 것을 돌려주지.”

그제야 실비아의 사고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16558823474968.jpg‘……아.’

대체 왜 이런 무의미한 발악을 하나 했더니. 설마하니 마왕의 자리를 되찾겠다는 목적조차 버리고 그녀 하나를 노렸을 줄이야.

16558823474968.jpg‘내가 사람들 앞에서 어둠을 내보였다가는 이 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인간의 공적이 될 테니까.’

실비아는 제 얼굴을 붙잡고 있는 다비드의 손을 뜯어버리겠다는 양 그의 손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이미 상처가 난자한 피부 위로 손톱이 파고들었다. 그녀가 짓씹듯 말을 뱉었다.

16558823474968.jpg“……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16558823474974.jpg“그래.”

16558823474968.jpg“미쳤군.”

16558823474974.jpg“원래라면 아니라고 답했겠지만, 그대 손에 목이 떨어진 이후부터는…… 글쎄.”

다비드가 무료한 투로 말끝을 흐렸다. 그가 눈을 비스듬히 내리깔았다. 보랏빛 시선이 실비아의 입술과 목덜미 주위를 정처 없이 배회했다.

16558823474974.jpg“그대를 볼 때마다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다가도, 어떨 땐 손안에 두고 질릴 때까지 가지고 놀고 싶어.”

16558823474968.jpg“…….”

16558823474974.jpg“그대가 란델 벨포르를 바라볼 때마다 심사가 뒤틀리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것도 사랑일지 모르지. 그대와 함께 영원히 저물고 싶은 것.”

16558823474968.jpg“……하.”

실비아는 다비드의 말을 듣다가 끝내 실소했다. 그녀가 다비드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경멸스러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16558823474968.jpg“헛소리하지 마, 바시스.”

16558823474974.jpg“…….”

16558823474968.jpg“그건 그냥 나에 대한 복수심과 란델에 대한 혐오가 변질된 집착일 뿐이야.”

16558823474974.jpg“……집착이라.”

다비드의 입매가 불쾌하게 비틀렸다. 그는 실비아의 말과 눈빛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양 날카롭게 웃었다. 사실 그것은 웃음보다는 절망에 가까워 보였다.

16558823474974.jpg“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짓씹듯 말을 뱉은 다비드의 주위로 어둠이 한차례 크게 일렁였다. 그의 눈이 완연한 핏빛으로 바뀌고 피부가 보랏빛으로 물들어갔다. 그로부터 심상찮은 기색을 감지한 실비아가 안색을 달리했다.

16558823474968.jpg“……뭐 하는 거야.”

16558823474974.jpg“글쎄. 란델 벨포르에게 그대와 내가 몸을 섞는 광경이라도 보여줘 볼까. 그놈이 미쳐 망가지고, 그대에게는 망가진 놈의 파편만을 쥐여 주는 게 최고의 복수 아니겠어?”

16558823474968.jpg“무슨 그런……!”

실비아는 반사적으로 마법을 사용해 다비드의 목을 조르려다가 멈칫했다. 만약 그녀가 섣불리 다비드를 공격하다가 그가 목숨을 잃으면.

16558823474968.jpg‘란델은?’

란델은 어떻게 되는 거지? 만약…… 다비드가 죽었을 때, 란델까지 함께 사라지게 된다면? 수를 쓴 다비드가 죽음으로써 영영 란델을 빼낼 방법이 사라진다면?

16558823474968.jpg‘안 돼.’

그럴 수는 없다. 실비아는 굳어진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조금 전, 다비드가 란델에게 손을 대겠다고 말하며 어둠을 사용하는 걸 보면 어둠을 이용한 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긴 했다.

16558823474968.jpg‘……하지만 그것 말고는 아는 게 없어.’

심지어 다비드가 어둠을 이용해 란델을 가두었다는 것도 완전한 확신이 아니었다. 나름 마왕이었던 실비아였지만, 그녀는 켈베티아의 마왕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것들을 접한 적도 없거니와 압도적인 어둠으로 인간들을 찍어 누르기 바빴으니까. 실비아가 이도 저도 못 하고 굳어진 사이, 다비드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어둠이 그의 남은 생명력을 긁어모아 일어설 힘을 주었다. 피 섞인 침을 또 한 번 뱉어낸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16558823474974.jpg“왜. 그놈이 내가 보여주는 것들을 곧이곧대로 믿고 그대를 경멸의 눈으로 보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나?”

16558823474968.jpg“……너.”

16558823474974.jpg“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다비드의 도발, 그리고 란델의 부재로 여유가 없어진 실비아의 주위로 살벌한 기운이 일렁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언뜻 붉은색이 비치는 것을 발견한 다비드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갈퀴 형태를 이룬 어둠이 그의 손을 뚫고 돋아났다. 어릴 적.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잃어버렸던 어둠을 되찾아 기뻐하던 것도 잠시.

16558823474974.jpg-젠장! 이딴 힘으로 대체 뭘 할 수 있다고……!

  터무니없이 적은 어둠의 양에 분노하던 다비드는 고뇌 끝에 적은 양의 어둠으로도 효율적으로 상대를 제압할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연구의 결과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지금의 란델을 가둔 감옥이었다. 다비드가 특히나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세뇌, 그리고 어둠을 제 그림자 안에 밀도 높게 밀어 넣어 만들어낸 허상의 공간을 결합한 환상 감옥. 그 안에 갇히게 된 상대는 다비드의 일부분과 같아지므로 어둠이나 마법으로 찾을 수 없다. 단지 그의 속에서, 그가 보여주는 환상을 보며 괴로워하다가 미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다비드는 금방이라도 어둠을 휘둘러 제 목을 벨 것처럼 분노한 실비아를 바라보며 악귀처럼 미소 지었다.

16558823474974.jpg“나와 함께 가자.”

그 미소를 본 실비아는 그제야 인정했다.

16558823474968.jpg‘저걸 설명할 순 없어.’

다비드의 저 집착은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 애초에 그가 상식이 통할 만한 인간이었다면 제 목을 벤 알리사를 두고 사랑이니 뭐니 논하지 않았을 것이다.

16558823474968.jpg‘내게 패배한 본인을 견디지 못하다가 결국 미쳐버린 건가.’

하잘것없는 인간 따위에게 져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스스로 알리사를 하잘것없는 인간이 아니라고 세뇌하듯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다가 끝내 본인의 생각에 잡아먹혀 본질을 잊은 것. 무엇이 본심이었는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것. 그것이 지금의 다비드 데 켈마르 로클렌이었다.

16558823474974.jpg“혹은 이런 방법도 괜찮겠지.”

그때 다비드가 웃으며 갈퀴가 돋아난 손을 들어 올려 제 배를 겨누었다. 그가 제 목숨을 끊어 란델마저 사라지게 하려는 것을 깨달은 실비아의 이성이 남김없이 날아갔다.

16558823474968.jpg“그 손 치워!”

실비아의 눈에 붉은 기운이 깃들고, 그것을 목격한 다비드의 입가에 희열이 어리는 찰나. 푹-!

16558823474974.jpg“……어?”

다비드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입가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가 멍하니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심장을 뚫고 나온 이 검날은 누구의…….

16558823474974.jpg“끅…….”

그러자 뒤늦게 심장이 꿰뚫린 것에 더해 온몸이 쪼개질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16558823474974.jpg‘감옥이……!’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다비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핏발 선 눈으로 등 뒤를 노려보았다.

16558823474974.jpg“어, 어떻, 게…….”

분명 그가 만들어낸 환상에 허우적대고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다비드의 등 뒤에서 그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은 란델이 싸늘하게 그 시선을 맞받아쳤다. 그가 검을 비틀어 뽑자 다비드의 몸이 휘청이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16558823568495.jpg“……‘어떻게’라니.”

란델이 피 흐르는 검을 한 손에 쥔 채 흔들림 없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16558823568495.jpg“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잖나.”

16558823474974.jpg“……하, 하.”

그 말에 다비드는 순간적으로 광인처럼 마구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알리사. 그리고 란델. 평생 패배라곤 모를 것 같던 그의 삶을 나란히 짓밟은 이들. 그런 그들의 입에서 ‘영원’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저 우스웠다.

16558823474974.jpg‘너희도 나처럼 될 것이다.’

지금이야 그의 앞이니 저렇듯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할 테지만. 깊게 사랑할수록 상처도 깊게 남는 법. 비록 실비아의 본성을 인간들 앞에 드러내 그녀를 인간 사회에서 추방시키는 것은 실패했지만. 다비드가 란델에게 심어놓은 환상은 지워지지 않는 흉이 되어 마음에 남으리라. 당장은 괜찮다 할지라도, 살다 보면 문득문득 그가 보여주었던 환상을 떠올리게 될 것이고. 실비아는 란델이 내심으로라도 그 환상을 근거로 자신을 의심하는 게 아닌지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물방울이 바위를 패어내듯 조금씩, 두 사람의 관계에는 금이 가겠지.

16558823474974.jpg‘알리사, 그대가 살아가기로 결심한 이유가 남김없이 풍화되는 모습을 보고도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다비드는 그 생각을 확인받으려는 듯 실비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16558823474974.jpg“……아.”

실비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다비드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는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다. 그 대신 그의 얼굴에 자리한 것은 거대한 벽을 마주한 것 같은 공포…… 혹은 절망감. 실비아는 바람에 휩쓸리고 깎이면서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산과 같은 눈으로 다비드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마치, 란델이 무엇을 보았듯 그것을 믿을 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처럼. 그 얼굴을 눈에 담은 순간 다비드는 당장에라도 태연한 척하지 말라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16558823474974.jpg“쿨럭.”

하지만 비명 대신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검붉은 핏덩이였다. 그렇게 되자 깨닫고 싶지 않았으나,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16558823474974.jpg‘……어떻게?’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저 믿음에는 실금조차 내지 못하리라. 영원히. 다비드는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의 상체가 서서히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털썩. 작은 소리와 함께 다비드의 움직임이 완전히 잦아들었다. 끝끝내 감지 못하고 부릅떠진 눈에 깃든 것은 공허였다.

16558823474983.jpg“……해가.”

그때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란델과 실비아가 멈칫하더니 나란히 평야 저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땅 위로 오롯이 모습을 드러낸 해가 만물을 온통 밝게 물들였다. 겨울의 초입. 마침내, 종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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