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알리사부터 실비아까지2022.03.28.
인간을 속여 사지로 몰아넣으려던 다비드 데 켈마르 로클렌이 죽었다. 또한 그를 따랐던 어둠 벌레들 역시 남김없이 붙잡혔다. 전쟁이 끝났다! 그 소식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환성을 지르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어느새 초겨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만큼 날이 싸늘해졌으나 그러한 추위도 사람들의 열기와 흥분을 꺼트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거리의 소란이 미처 영향을 끼치지 못한 곳도 있었다. 초겨울의 부드러운 햇살이 무색하도록, 왕궁의 응접실 안에는 싸한 정적만이 맴돌았다. 응접실에 들어선 플로레트 백작이 고개를 숙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켈베티아의 사절단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플로레트 백작이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왕의 모습이 보였다. 플로레트 백작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가 조금 전보다 한결 큰 목소리로 왕을 불렀다.
“폐하.”
“……아. 왔는가?”
반년여 전에 왕을 보았던 사람이라면 지금의 왕을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그는 많이 변해 있었다. 살이 얼마나 많이 빠진 것인지 광대뼈가 불룩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으며, 눈 밑은 퀭하다 못해 새까맸다. 그 힘 빠진 목소리를 들은 플로레트 백작은 또다시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을 반복했다.
“마왕을 포함한 켈베티아의 사절단이 왕궁에 들어섰습니다. 그들을 맞이하셔야지요.”
“……볼썽사납게 자식의 꼭두각시가 되어 나라를 말아먹을 뻔한 작자에게 폐하라니, 거창하기도 하군.”
“폐하.”
플로레트 백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난감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나 왕은 백작보다 더욱 깊고 짙은 한숨을 내쉬며 음울하게 자조했다.
“벨포르 공작도 아니고,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놈이 그런 짓을 할 줄이야.”
그부터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형제들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이였으니, 제 아이만은 그런 패배감과 열등감을 경험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왕은 신하들의 무수한 반대를 무릅쓰고도 한 아이만을 고집했으며, 그렇게 태어난 것이 다비드였다.
-아바마마.
아주 어렸을 때는 패악질이란 패악질을 다 부리고 다녀 걱정이 많았지만, 다비드는 어느 순간부터 급격히 철이 든 모습을 보여주며 언제나 그에게 싹싹했다. 그러다가 가끔 그가 방자하게 굴 때조차 금세 용서해주고픈 마음이 드는 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 여겼건만. 그조차 사랑이 아니라 세뇌였을지도 모른다니. 그것은 퍽 씁쓸하고 절망스러운 일이었다.
“…….”
플로레트 백작은 잠시간 말없이 왕을 바라보았다. 금빛 눈이 차츰 가라앉는가 싶더니 곧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사실을 짚어주었다.
“자업자득이십니다.”
“……뭐?”
“폐하께서부터 당신의 손으로 혈육을 해하셨으면서, 당신께서는 혈육의 손에 무사하길 바라신 겁니까.”
“…….”
“폐하께서는 벨포르 공작을 경계하고 압박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셔야 했습니다.”
차가운, 그러나 반박할 수 없는 일갈에 왕의 고개가 조용히 떨궈졌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플로레트 백작이 덤덤히 덧붙였다.
“우선은 켈베티아의 사절단이 도착했다니 최선을 다해 그들을 맞이하십시오.”
“…….”
“후회하는 것은 책임을 다한 이후의 일입니다.”
그로써 할 말을 마친 플로레트 백작이 몸을 돌렸다. 응접실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가 닫히자 다시금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
홀로 남은 왕은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주름이 깊이 새겨진 얼굴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내려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이윽고 왕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에 있느냐.”
“부르셨습니까.”
“켈베티아의 사절단을 알현실로 불러들여라.”
“명 받들겠습니다.”
마지막 긍지로, 자신에게 남은 책임이나마 다하기 위해서였다. * * * 달그락.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에 실비아의 어깨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흠칫 튀어 올랐다. 그것을 기민하게 눈치챈 란델이 그녀에게 차가운 물이 담긴 잔을 건네주었다.
“부인.”
“……아. 고마워요, 란델.”
실비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내민 물 잔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넘기며 눈을 옆으로 힐끔 굴렸다. 그러자 정갈한 자세로 식사하고 있는 플로레트 백작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면면을 눈에 담자 어쩐지 또다시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실비아가 희게 질린 얼굴로 물 잔을 내려놓자 란델이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속삭였다.
“숨을 쉬셔야 이야기를 하죠.”
“당신 같으면 그런 일이 있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전처럼 굴 수 있겠어요?”
“당연히 그럴 수는 없겠죠. 그래도 오늘 용기를 내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식사 자리에 응한 것 역시 실비아 당신이잖습니까.”
“…….”
답할 말이 없어진 실비아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접시 위의 생선을 깨작거렸다. 며칠 전. 이블린을 필두로 한 켈베티아의 정식 사절단이 비틀림을 넘어 인간 세상에 방문했다. 쉐르트 공작은 이블린을 대신해 켈베티아에 남아 정무를 처리하고 있다고 들었다. 인간과 마족의 평화회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그 일은 왕이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이블린을 타국의 왕으로 존중하고 환대함으로써 실제로 이루어졌다. 마족들 역시 인간들에게 호의를 표하기 위해,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스스로 구속구를 차겠노라 선언했다. 물론 그것은 마족들이 구속구를 차 힘을 잃은 틈을 타 그를 해하려는 인간들보다 몇 배는 강한 벨포르 공작 부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이어진 회담 끝에, 인간과 마족은 평화협정을 맺었다. 상호불가침을 기본으로, 인간이 마족들에게 인간의 문화와 기술 등을 가르쳐주고. 마족들은 비틀림을 넘어와 인간을 해치는 마물들을 최대한 통제하고, 더불어 먼저 해를 당하지 않는 이상 인간을 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서로 마법 언약을 맺었다. 실비아가 오스턴과 함께 개발한 것이었다. 물론 아직 마족들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이 한 번의 회담만으로 오랜 세월 쌓인 마족에 대한 두려움, 경계, 울분 등을 푸는 것은 무리였다. 다만 이블린은 회담이 끝난 이후, 왕과 논의하여 사람들 앞에 섰다.
-지, 진짜 마왕이래? 저…… 여자가?
-……달려드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단상 아래 벨포르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 서 계시니까…… 믿어보자고.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잖나.
사람들은 미지의 생명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웅성거리면서도 연설이 이루어질 단상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렇게 되는 데는 다비드가 죽기 직전 퍼졌던, 랭과 한 아이의 이야기가 바꿔놓은 인식이 컸다. 이윽고 단상 앞이 인파로 가득 메워졌을 때. 이블린이 놀랍도록 정중한 투로 말문을 떼었다.
-믿지 못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지금껏 마족의 손에 피 흘린 인간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으니까요.
-…….
-하지만 저희 역시 여러분과 같이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블린의 눈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흠칫하면서도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진심 어린 눈빛이란 언제든 사람을 휘감는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이블린은 한 자, 한 자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가 눈을 비스듬히 내리깔고 단호히 말했다.
-저는 더는 동족의, 더 나아가 누군가의 피를 딛고서야 살 수 있는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
-그러니 도와주십시오. 배우게 해주십시오. 그대들과 공존할 기회를 주십시오.
-…….
-부탁드립니다.
이블린은 좌중의 앞에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찢어 죽일 마족이라지만, 한 일족의 수장이라는 자가 저렇듯 자신을 내려놓고 몸을 낮추는 광경은 확실히 생소한 일이었기에 사람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당황은 곧 숙연함으로 바뀌었다.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은 것. 그것이야말로 지난 세월 동안 인간이 가장 절실히 느껴왔던 감정이었으니까. 그 후 평화회담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은 사라졌다시피 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블린을 따라온 평화주의 마족들은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구속구를 찬 채 인간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몇 번 가졌고. 마족들이 상당히 호전적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인간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호의 어린 이야기를 늘어놓자 그 분위기는 금세 왕국 전체로 번져갔다. 마족들 역시 살의를 참고 인간과 느긋이 대화를 나눠보자 더더욱 그들이 동족처럼 느껴졌다며, 그들을 해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만남은 짧았으나 앞으로의 일에 대한 희망을 보았다는 점에서 더없이 값지고 얻은 것이 많았다. 그렇게 평화회담이 마무리된 후. 누구보다 빠듯한 일정을 소화해낸 플로레트 백작과 벨포르 공작 부부는 다른 귀족들에게 등을 떠밀려 강제로 왕궁에서 내쫓겼다.
-너무 무리하시다가 쓰러지는 것이 더욱 큰일이니까요, 암!
-빈자리는 저희가 어떻게든 메꾸어보겠습니다. 그동안 푹! 피로가 싹 풀려서 회춘하신 것처럼 느껴지실 만큼 푹! 쉬고 돌아오십시오!
-돌아와만…… 주십시오……!
귀족들은 그들을 쉬게 하고 싶은 마음보다 일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 보이긴 했지만. 이대로 가다가 가장 유능한 인력인 그들이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더 문제였으므로, 귀족들은 눈물을 머금고 그들을 왕궁에서 내쫓았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실비아는 큰마음을 먹고서 왕궁을 벗어나는 플로레트 백작을 붙잡았다.
-……전에 식사하러 오라고 하셨었죠. 그 말, 아직도 유효한가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플로레트 백작은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엷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게 실비아는 란델, 플로레트 백작 부부와 함께 만찬을 즐기는 중이었다.
‘좀 토할 것 같네…….’
사실 즐긴다기보다는 금방 체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지만. 란델이 백작 부부의 눈을 피해 조심조심 실비아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가 따듯한 웃음을 지으며 다른 한 손으로 실비아의 손등을 토닥였다.
“제가 옆에 있어 드리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응. 고마워요.”
란델이 곁을 지켜준 덕에 실비아는 가시 방석에 앉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어찌어찌 식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무리한 그들은 넓은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백작 부부의 맞은편에 놓인 소파에 란델과 나란히 앉은 실비아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여전히 조금 창백한 안색으로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아버지께 말씀드렸다시피.”
“…….”
“드릴…… 말씀이 있어요. 두 분께.”
실비아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말아 쥐었다. 손끝이 떨리며 옷자락이 구겨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귓전을 울렸다. 왜 과거를 모두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자고 결심했음에도 여전히 이 모양인 걸까. 란델이 여전히 손을 잡아주고 있음에도 말을 한마디 꺼내려고 할 때마다 누군가 목을 틀어쥐는 기분이었다. 그때 내내 무슨 이야기냐는 말 한마디 꺼내지 않던 백작 부인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딸을 불렀다.
“실비아.”
“……네?”
그 부름에 어쩔 수 없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실비아가 죄지은 아이처럼 크게 움찔하며 답하자 백작 부인의 눈에 안쓰러움이 차올랐다. 그녀가 여전히 눈물 날 정도로 상냥한 목소리로 딸을 다독였다.
“괜찮아.”
“…….”
“정말 괜찮아. 네 얼굴을 보고, 네가 어느 정도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나는 그것으로도 족하단다.”
“…….”
“그러니 서두르지 말렴. 나는 언제나, 네가 이야기할 것이 있다면 들어줄 수 있으니까.”
실비아는 순간적으로 눈물이 치솟을 것만 같아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그러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목이 메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하지만 눈물이 날 것 같은 것과 별개로, 백작 부인의 말이 얹힌 것 같던 속을 한결 가라앉혀주는 듯이 느껴졌다.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의 실비아가 란델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이건…… 제가 겪었던 일들에 관한 이야기예요.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이윽고 그녀가 잠잠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알리사부터 실비아까지. 모두 그녀의 지난 생들에 관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