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매일 더 나은 삶을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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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매일 더 나은 삶을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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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매일 더 나은 삶을 희망하며
2022.03.31.
플로레트 백작 부부는 실비아의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실비아는 그들의 침묵 앞에서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어 시선을 떨구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무릎께의 옷자락을 꾹 쥐고 있는 제 손, 그리고 그런 제 손을 덮고 있는 란델의 손뿐이었다.
이야기를 전부 늘어놓고 나자 거짓말처럼 다시 숨이 무거워졌다.
실비아는 플로레트 백작 부부가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자 뒤늦게 더럭 후회가 몰려와 입술을 깨물었다.
‘……말하지 말 걸 그랬나.’
기쁨은 나누면 두 배,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고 했던가.
하지만 차마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은, 무거움은.
그저 그 짐을 짊어진 이를 둘로 늘릴 뿐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플로레트 부부에게 털어놓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실비아야 간간이 그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죄책감에 괴로울지 몰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하나뿐인 딸이 ‘온전히’ 그들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저 삶의 의지를 되찾은 딸을 보며 기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맞지 않았을까.
제 마음 하나 편하자고 백작 부부에게까지 제 짐을 짊어지게 한 듯해 숨 한 자락 내쉬는 것마저 죄스러웠다.
그때였다.
“……많이.”
물기를 머금어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이어 실비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조용히 눈물 흘리는 백작 부인의 얼굴이었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
“그렇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우습게도 실비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툭-
“……어?”
실비아는 치맛자락 위로 선명히 남은 눈물 자국을 보고 당황해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소나기를 예고하는 빗방울이었던 건지, 곧 그녀의 눈에서는 더욱 많은 양의 눈물이 쏟아졌다.
“자, 잠시만요. 제가…….”
실비아는 달리 슬프지 않았다. 죄책감이라면 모를까.
실제로 지금 그녀의 얼굴은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은 채 평온했다.
눈물 때문에 당황한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닦아내도 실비아의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란델이 걱정하며 손수건을 내밀 정도였다.
그녀가 그것에 당혹스러워하던 차. 플로레트 백작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을 돌아온 그가 실비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딸의 손을 조심스럽게 찾아 쥔 그가 다정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비아.”
“……네.”
실비아는 자꾸만 플로레트 백작에게서 벗어나려는 시야를 애써 제자리에 붙들어놓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시선을 본 플로레트 백작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깃들었다.
그가 담담한, 그러나 힘이 깃든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우선 네 이야기를 마냥 믿기에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살아온 세상과 상식 때문이지 너의 탓이 아니야.”
“……이해해요.”
“그렇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주거라.”
일순 플로레트 백작의 금색 눈이 빛을 품은 것처럼 선명히 빛났다.
실비아마저 저도 모르게 그 시선에 압도된 사이.
그가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너는 내 딸이다.”
“…….”
“네가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면 그저 조금 더 가여운 딸이 되는 것이고, 너의 아픔을 진즉 알아채고 다독여주지 못한 내 마음이 조금 더 쓰릴 뿐이지.”
“…….”
“네가 내 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 말이 끝내 실비아의 얼굴을 무너트렸다.
엉망으로 표정을 일그러트린 그녀가 플로레트 백작과 맞잡은 손 위로 고개를 떨구었다.
“윽…….”
억누른 울음이 잇새를 비집고 새어나왔다.
그런 실비아의 어깨를 란델이 가만히 감싸 안았다.
백작 부인 역시 테이블을 돌아와 실비아를 가만히 끌어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살아줘서 고맙다, 실비아.”
그 말에 결국 실비아의 입 밖으로 커다란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알리사였을 적 이후로 처음으로 터져 나온 처절한 울음은, 그간 쌓인 것을 모두 흘려보내겠다는 듯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동안 란델과 플로레트 백작 부부는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가족이었다.
* * *
벌컥!
방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러자 막 셔츠의 단추를 풀어 내리던 제프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춤 물러났다.
“뭐, 무슨……!”
“야! 빨리 좀 가자니까! 대체 언제까지 옷만 갈아입고 있을 생각인데! 이러다가 해가 다 넘어가겠다!”
필리아가 방 안 가득 널린 옷들을 보며 질색했다.
제프리의 기사단 숙소 방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셔츠, 재킷, 바지와 양말까지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어 언뜻 보면 옷장의 문이 부서져 그 안의 옷이 쏟아져 나온 줄 알 것이다.
제프리가 슬그머니 필리아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입에서 자그마한 항변이 튀어나왔다.
“아니, 그래도. 정식으로 얼굴 뵙는 건 처음인데 어떻게 대충…….”
“진짜 대충 준비한 건 나거든? 이러다가 늦으면 그걸 더 안 좋아하실 테니까 빨리 나오기나 해.”
그리 내뱉은 필리아가 제프리의 팔을 덥석 붙잡고는 그를 질질 끌고 갔다.
제프리는 가까스로 다급하게 풀어놓았던 넥타이와 재킷을 낚아채며 필리아의 손에 끌려 나왔다.
“잠깐, 잠깐만. 필리아!”
제프리는 세이크린 후작가의 문양이 찍힌 마차를 보자 한층 더 초조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세이크린 후작 부부를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아무리 마차에서 다듬을 시간이 주어질 것이라 한들 이렇듯 엉망인 몰골로 갈 수는…….
그때 필리아가 마차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 바람에 그녀의 손에 붙들려 있던 제프리 역시 잠시 휘청였다.
“필리아?”
제프리는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춘 필리아가 의아해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전히 제프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필리아가 조금 전과 달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서 그래?”
“……뭐?”
얼떨떨한 목소리가 돌아오자 필리아는 제프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순식간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제가 다른 가문과의 협력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세이크린 후작가를 대단하게 만들면 어때요?
필리아는 제프리와의 관계를 인정받기 위해 가출을 감행했다가, 출전하겠다는 후작을 말리기 위해 후작저로 돌아갔었다.
-아이고, 이 녀석아!
-어떻게 말도 없이……!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그곳에서 그녀는 문자 그대로 반쪽이 된 얼굴로 울며불며 저를 맞이하는 부모님을 보고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필리아는 부모님이 반대한다고 해도 제프리와의 관계를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지만 부모님과 절연하다시피 하며 제프리와 결혼한다 한들, 그녀가 오롯이 행복할 수 있을까?
필리아가 내린 답은 ‘아니다’였고, 그리하여 그녀는 세이크린 후작 부부에게 제안했다.
자신이 후작위를 이어받아, 다른 가문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백성들에게 충분한 보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가문을 만들겠노라고.
그렇게 가까스로 얻어낸 허락이었다.
하지만 한 가문을 물려받고 책임진다는 일은 기대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불안했다.
게다가 세이크린 후작 부부가 제프리를 제대로 대해줄 것인가에 대한 걱정도 그녀의 불안에 한몫을 더했다.
그런 상황에서 제프리가 자꾸만 자신과 함께하는 일을 피하는 듯한 느낌이 들자 괜스레 서러워졌다.
그녀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를 내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며칠 사이라도 마음이 바뀌었을 수 있는 거니까. 혹시 나랑 결혼하는 게 싫어져서 그런 거라면…….”
“…….”
“그러면…… 아이씨.”
결국 필리아는 제프리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양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
“…….”
“미안한데 도저히 놔주겠다는 말은 못 하겠다.”
필리아는 잠시간 스스로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가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때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에 이어, 제프리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서는 듯한 기척이 들려왔다.
“필리아.”
다정한 부름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러나 필리아는 제 얼굴이 얼마나 엉망일지 알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제프리는 잠시간 필리아를 말없이 기다리다가, 이내 그녀를 조심히 끌어안으며 등을 다독여주었다.
“미안해.”
“…….”
“나는 네가 애써준 만큼, 흠 없이 완벽한 모습으로 네 옆에 서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내가 너무 배려가 부족했나 봐.”
“…….”
“미안해, 필리아.”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필리아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제프리가 슬슬 필리아가 서서 기절한 건가 고민하던 찰나.
퍽!
“커헉!”
얼굴을 일그러트린 필리아가 팔꿈치로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예기치 못한 일격에 제프리가 몸을 반으로 접었다. 필리아가 버럭버럭 고함쳤다.
“다짜고짜 미안하다고 하지 말란 말이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나 수, 숨이…….”
“뭐! 괜찮아?”
마차 앞은 금세 소란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해묵은 불안은 그 소란에 밀려 자리를 비킨 지 오래였다.
* * *
비슷한 시각, 최근 들어 드물게도 화창한 하늘 아래.
어느 카페의 테라스였다.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들며, 추위를 탐탁지 않아 하는 손님들은 대개 카페의 안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 테라스에만은 훈기가 감돌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 막이 테라스 안의 공기를 훈훈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오가는 대화는 사뭇 온도가 달랐다.
“나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예?”
주르륵.
루베아의 말에 오스턴이 차를 마시다가 말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뭐 하는 거예요? 닦아요, 빨리.”
그 바람에 찻물이 그의 입에서 우아하게 넘쳐흐르는 것을 본 루베아가 질색하며 손수건을 건넸다.
그러나 오스턴은 제 손에 쥔 것이 식탁보인지 손수건인지도 분간하지 못한 채 당황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언뜻 그의 눈에 눈물이 반짝였다.
“그, 그러니까. 그럼…… 백작님께서는 저를…… 정부로 두시겠다는, 그런…….”
“미쳤어요? 그런 말이 아니라……!”
루베아는 한발 늦게 오스턴이 제 말을 오해했음을 깨닫고 기겁했다.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며 가까스로 흥분을 다스렸다.
“도슬러…… 아니, 오스턴.”
“……예, 루베아.”
“내 말은 결혼을 평생 안 하겠다는 게 아니었어요.”
“아…….”
“나는 아직 가주의 자리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했어요. 글레버 백작가를 다스리는 걸로도 충분히 정신이 없는데, 이런 시기에 결혼이라는 중대사를 더해 양쪽 다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싶지도 않고요.”
루베아가 차분히 부연하자 오스턴 역시 그제야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니까.”
그때 불현듯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오스턴은 저 미소는 몇백 번을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루베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내가 조금 더 잘난 사람이 되어 청혼할게요. 그때까지만 기다려줄래요?”
“무, 뭐…….”
갑작스레 청혼 당한 오스턴이 얼빠진 얼굴로 입술을 벙긋거렸다.
곧이어 화르륵 얼굴을 붉힌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빽빽 소리 질렀다.
“아니, 청혼은……! 청혼은 제가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가로채는 게 어딨습니까!”
“그런 거에 순서가 어디 있어요? 먼저 하는 사람 마음이지.”
“와, 와……! 아니, 와!”
오스턴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제 머리카락을 잡아 뜯었다.
그 모습을 본 루베아가 낭랑하게 웃음을 터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테라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 즈음 하늘에서는 흰 눈송이가 나풀나풀 흩날리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겨울이었다.
* * *
사박-
고개를 들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고 있던 란델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흰 눈밭을 가로질러 제게로 걸어오는 실비아를 발견하고는 녹아내릴 듯 눈을 휘었다.
“추운데 왜 나오셨습니까, 부인.”
“당신이야말로 그러다가 감기 걸려요.”
두툼한 털 망토를 두른 실비아가 그녀가 입고 있는 것보다 큰 망토를 란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란델이 고맙다며 짧게 웃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온통 눈으로 뒤덮인 정원을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한동안 말없이 란델의 곁에서 걷던 실비아가 문득 입을 열었다.
“왕위 문제 때문에 그래요?”
“……예.”
망설이던 란델이 난감한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감출 일도 아니었다.
이미 다음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으로 란델이 지목받고 있음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니까.
마족과의 평화회담 문제를 모두 마무리 지은 왕은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겠다 밝혔다.
하지만 본래라면 그 자리를 이어받아야 했을 다비드가 죽었고, 다비드 다음으로 왕위 계승순위가 높은 것은 란델이었다.
게다가 현재 엘바레스 왕국에는 란델을 제외하고선 직계라고 부르기 민망한 방계만이 남아 있었다.
현왕의 형제들이 모두 어릴 적 죽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란델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벨포르의 사람들조차 완벽하게 건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엘바레스의 모든 사람을 건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불안이 자꾸만 그의 속에서 머리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겠지요. 제가 물러난다면 더한 혼란이 야기될 테니까요.”
란델이 한숨처럼 웃었다.
그는 실비아와 함께 다비드를 막아내고 엘바레스를 구원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었다.
온 나라의 백성들이 그가 왕이 되어주길 바라는 이 분위기에서 감히 어떻게 거절을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
“란델.”
그때 란델의 말을 들은 실비아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맞잡았던 손이 떨어졌다.
란델이 의아한 얼굴로 실비아를 돌아보자 그녀가 굉장히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까치발을 들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도망갈까요?”
“……예?”
순간적으로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던 란델이 이내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실비아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 아니에요. 만약에 당신이 힘들다고 하면 언제든 데리고 도망가줄게요. 말만 해요.”
“아……. 부인께서 이렇게 든든한 사람이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걸 이제 알았어요? 실망인데.”
잠시 농담 같은 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마주 웃었다.
실비아가 란델의 손을 다시 찾아 쥐며 입꼬리를 휘었다.
“뭐가 그렇게 걱정이에요? 내가 옆에 있을 텐데.”
그 말에 란델은 찰나 숨을 멈추었다.
그의 시야에 흰 눈 소복이 쌓인 정원을 배경으로, 그 눈보다 더 하얗게 웃음 짓는 실비아의 얼굴이 한가득 들이찼다.
오롯이 행복에 겨운 웃음.
그것을 눈에 담자 가슴 한편이 저릿해지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란델이 길게 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손을 단단히 마주 잡았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도 그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확실히, 그렇군요.”
두 사람은 웃음을 주고받으며 나란히 걸음을 뗐다.
수풀 사이로 그들이 지나간 흔적이 꾹 눌러 찍은 도장처럼 고스란히 남았다.
* * *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상처 입고 부서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삶이 힘겹고 버거워 눈물 짓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가만히 손을 잡아주는 한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 나아갈 수도 있겠지.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누군가를 위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내일을 기대하고, 매일 더 나은 삶을 희망하면서.
-본편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