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어떤 로맨스 (3) (108/118)


외전 1. 어떤 로맨스 (3)
2022.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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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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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달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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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달달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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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그만 좀 해라! 너 때문에 찻물 다 흐르잖아, 이 계집애야!”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다가 찻물이 흘러넘쳐 분노한 여인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고함을 들은 밀레이아가 어깨를 흠칫 움츠리며 다리를 떨던 것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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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미안. 에리카. 손수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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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건이고 자시고! 이렇게 불안해하면서 사람 귀찮게 할 거면 그냥 가서 물어봐! 물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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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에리카! 아니, 언니! 때리지 마! 때리지 마!”

저 사과도 벌써 몇 번째던가. 위로와 걱정도 해줄 만큼 했다.

결국 폭발한 에리카는 소파의 쿠션을 집어 들어 밀레이아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밀레이아가 양팔을 들어 쿠션을 막으며 절절맸다.

한창때의 귀족 아가씨들이 벌이기엔 상당히 큰 소란이었지만,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어느새 그들의 기행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아무런 반응도 내비치지 않고 각자의 할 일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에리카와 밀레이아는 나란히 헉헉대며 소파에 늘어졌다.

소파 팔걸이에 얼굴을 기댄 밀레이아가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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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벌써 반년이나 언니 집에 신세 지고 있는 것도 미안한데, 내가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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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신세 진다는 말 하지 말라고 했지. 미안하다는 말도 금지야.”

소파 반대쪽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에리카가 손을 뻗어 밀레이아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그것이 그녀의 배려임을 잘 알고 있기에 밀레이아는 그저 웃었다.

에리카 리어싱 남작 부인은 밀레이아의 사촌 언니로, 현재 수도의 작은 저택에서 남편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밀레이아의 집안처럼, 리어싱 남작가는 사실상 귀족가라기보다는 평범한 가문에 가까웠고 에리카와 그녀의 남편 역시 자신들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내세우는 성정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굳이 사교계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리어싱 남작 부부는 데뷔탕트를 위해 수도에 올라오겠다는 밀레이아를 흔쾌히 맞아주었고, 그렇게 밀레이아는 약 반년 동안 남작저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작년에 결혼해서 이곳을 떠나야 했겠지만.

밀레이아가 한 번뿐인 결혼을 최대한 알차게 써먹으려는 탓도 있었고,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수도 사교계는 지방의 한미한 귀족가 장녀가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났다.

이제야 겨우 수도 사교계에서 자리를 잡고, 괜찮은 결혼 상대를 찾을 수 있을까 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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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시 생각해도 열 받네! 그 다 늙은 쓰레기 변태 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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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는 무슨 죄야? 좀 더 창의적인 욕으로 다시 생각해 봐.”

밀레이아는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분개했다.

에리카가 이번에는 말리지 않고 박수를 쳐주었다.

그 박수와 응원에 힘입어 한동안 오만가지 욕을 쏟아내던 밀레이아는 다시금 스르륵 소파에 기대어 누웠다.

그녀가 쿠션에 얼굴을 처박고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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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틀렸어……. 내가 어떻게 반년을 버텼는데. 물론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후작 새끼 턱을 한 번 더 후려쳐줬겠지만, 내 평판은, 내 이미지는……. 흐흑.”

또다시 시작된 한탄에 에리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가 오만상을 쓴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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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이 너한테 처맞은 걸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을 거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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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그런 놈은 자기보다 한참은 작은 여자한테 얻어맞아 기절까지 했다고 절대 말 못 해. 그걸 망신이라고 생각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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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뭐가 문제인데, 대체!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그 광경을 봤을 때 같이 후작 욕을 해주지, 네 욕을 하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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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그렇겠지! 그런데 상대가 알버스 플로레트라고!”

밀레이아가 끝내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에리카는 ‘또, 또 저런다. 또.’ 하고 혀를 차고는 말릴 생각도 않고 다시 장부를 보는 데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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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까지 무례하게 굴었는데, 아직도 나한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

만약 알버스 플로레트와 밀레이아 보겐이 데면데면한, 지나가다가 가볍게 웃으며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이였다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밀레이아는 제 불편함 때문에 알버스 플로레트에게 무안을 줬다.

좋게 거절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알버스 플로레트가 싫었으니까.

자신이 가진 것이라고는 그저 시간이 지나면 시들 미모밖에 없는데, 알버스 플로레트는 그조차도 빼앗아가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한 감정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 알버스 플로레트가 아직도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오히려 그런 광경을 목격한 것을 기회라 여기고 사실을 왜곡해 소문을 퍼트린다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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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가야겠지.’

마음만 같아서는 이대로 침대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죽은 척하고 3일 정도 잠들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밀레이아에게는 가족들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녀는 결국 한숨을 쉬고 상체를 바로 세웠다.

알버스 플로레트도 참석하는 파티가 바로 내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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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보겐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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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 네…….”

그렇게 다음 날.

밀레이아는 파티장에서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는 얼굴로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는 알버스를 마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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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야?’

당황으로 인해 얼굴에 경련이 일 지경이었지만 필사적으로 미소를 유지한 채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손등에 정중히 입술을 붙였다가 뗀 알버스가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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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즐거운 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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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작님께서도요.”

밀레이아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사이 미련 없이 고개를 숙여 보인 알버스가 등을 돌려 멀어졌다.

연한 베이지색의 눈이 당황으로 끔벅였다. 합리적인 의심이 그녀의 마음에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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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주는 건가? 내가 너의 약점을 알고 있으니까 조심해라…… 뭐 그런?’

밀레이아의 예상대로, 트레시드 후작은 그녀에게 얻어맞은 후 아예 저택에 칩거하며 모든 파티에 불참했다.

그의 아들 역시 아버지를 따라 저택에 틀어박혔다는 말은 밀레이아를 기쁘게 했다.

괜히 마주쳐서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단언컨대, 알버스의 반응만큼은 예상하지 못했다.

적어도 그때 본 일에 관해서 한 마디라도 건넬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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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해! 말을 하라고!’

알버스가 트레시드 후작과 관련한 일에 관해 한 마디도 꺼내지 않자 되레 불안해졌다.

그녀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알버스의 뒤통수를 노려보았으나 그는 사람 좋은 얼굴로 다른 이들에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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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또 뵙는군요.”

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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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럼.”

사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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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말로 해!’

밀레이아는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알버스가 혹 다른 사람들에게 은근슬쩍 ‘보겐 남작 영애가 구두 굽으로 사람을 후려치더라’라는 말을 꺼내지는 않을까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파티에 참석한 후로 알버스를 자주 쳐다볼 수밖에 없었고, 그에게 온 신경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거슬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안 건, 얼마 후 참석한 말렌 후작가의 파티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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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겐 남작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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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말렌 후작 영애.”

밀레이아는 오늘도 어김없이 알버스 플로레트의 뒤통수를 흘끔거리던 중, 누군가 제게 말을 걸어오자 황급히 그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녀에게 말을 걸어 온 것은 오늘 파티의 주최자나 다름없는 말렌 후작 영애였다.

밀레이아는 재빨리 수도 없이 지어 보였던,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미소를 입가에 걸며 우아하게 예를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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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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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겐 남작 영애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명색이 현 사교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불리는 분이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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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좋게 봐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자신을 지나치게 깎아내리지도, 그렇다고 거만해 보이지도 않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밀레이아의 답을 들은 말렌 후작 영애는 불편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미처 느끼지 못할 만큼 미묘한 차이였지만, 밀레이아는 눈치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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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밀레이아는 자신이 뭔가 실례가 될 만한 일을 저질렀나 재빨리 기억을 되짚어보았으나 특별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녀의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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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겐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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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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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끼리는 서로를 쉽게 알아보는 법이죠.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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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뜬금없는 말에 밀레이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던 차.

말렌 후작 영애가 부채를 차르륵 펼치고는 입을 가렸다.

보석과 레이스로 아름답게 치장된 부채 위, 사르르 웃는 눈이 매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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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애의 시선이 플로레트 백작님에게서 떠나질 않던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죄지은 것을 들킨 사람처럼 심장이 철렁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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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영애 역시 백작님께 마음이 있는 건가요?”

밀레이아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말렌 후작 영애는 밀레이아가 알버스를 힐끔거리던 것을 그에 대한 호감으로 해석한 듯했다.

그것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니 그저 오해다, 라고 답하며 고개 한 번 내저으면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찰나지만 꼭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굳어 있던 밀레이아의 입을 간신히 움직인 것은, 그간 사교계에서 구르며 억지로 몸에 새겨 넣었던 행동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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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영애.”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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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십니다. 저는 플로레트 백작님을 좋아하지 않아요. 오히려…….”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린 밀레이아의 입술이 멋대로 답을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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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하는 것에 가깝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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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렌 후작 영애의 한쪽 눈썹이 놀란 듯 슬쩍 올라갔다.

그러나 밀레이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른 이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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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렌 후작 영애의 어깨 너머로, 눈을 살짝 크게 뜬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알버스 플로레트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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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표정을 눈에 담는 순간, 이번에야말로 견딜 수가 없어졌다.

밀레이아는 황급히 말렌 후작 영애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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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저는 잠시……. 속이 좋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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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가 봐요.”

밀레이아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것인지, 말렌 후작 영애가 아까보다는 누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이아는 답을 듣자마자 도망치듯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구석진 테라스로 들어가 커튼을 친 그녀가 난간을 붙잡고 주르륵 주저앉았다.

잇새로 멍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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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왜 도망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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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을까?’

그 표정을 보면, 들었겠지. 듣지 못했을 리가 없지. 그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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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는, 그가 이번에야말로 괘씸하다며 내 진짜 성격을 사람들한테 말하고 다닐까 봐 무서워서…… 달아난 건가?’

아니, 아니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밀레이아가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어둠에 잠겨 있던 테라스에 빛이 비쳐들었다가 다시 사라졌다.

누군가 커튼을 걷고 테라스로 들어온 것이었다.

밀레이아는 혼란한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커튼을 쳐둔 테라스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는 건 무례인데, 대체 어떤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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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 순간. 불청객의 모습을 확인한 밀레이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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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레트 백작?’

불청객은 알버스 플로레트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었는데, 더 놀라운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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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지금…… 우시는 거예요?”

알버스 플로레트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밀레이아의 턱이 빠질 듯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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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중에 우는 모습이 뭐 저렇게…… 예뻐?’

당황한 와중에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이 고운 미남이 눈가를 발갛게 물들이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그 모습이 전혀 흉하지 않고 외려 처연해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은 지금껏 잠잠하던 밀레이아의 마음에마저 묵직한 파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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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께선…….”

그때 알버스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가 서러운 눈으로 밀레이아를 응시하며 말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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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그렇게까지 저를…… 싫어하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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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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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께서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모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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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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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왜…….”

크게 뜨였던 밀레이아의 눈이 서서히 본래 크기로 돌아왔다.

그녀는 우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알버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툭 답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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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아름다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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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알버스는 너무 놀라 순간적으로 우는 것마저 잊었다.

그가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다가 말고 그대로 굳어지자, 밀레이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까지 경계하던 대상이 저렇듯 아이처럼 우는 모습을 보자 체념, 혹은 허탈함에 가까운 마음이 든 탓에 그녀가 순순히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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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름답고, 또 어린 나이에도 벌써 작위를 물려받아 한 가문의 가주이죠. 그 외에도 당신은 아주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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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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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내가 가진 건…… 고작 죽고 나면 썩어 없어질 이 얼굴 하나뿐인데.”

말을 늘어놓다 보니 어쩐지 울컥하는 마음에 밀레이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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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것마저도 빼앗아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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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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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당신이…… 싫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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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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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유일한 것마저 빼앗아가는 사람이니까.”

밀레이아가 말을 마치고 입을 다물자 적막이 찾아들었다.

얇은 커튼과 문을 사이에 두고 파티장은 저리도 소란한데 이곳만 세상에서 유리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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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에는 내 열등감이지.’

뒤늦은 자괴감에 밀레이아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후회도 되었으나 동시에 후련했다.

알버스가 여전히 눈물 젖은 눈으로 불쑥 말을 꺼낸 것은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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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가진 게 왜 그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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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밀레이아는 놀라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알버스는 울음을 참으려 애쓰며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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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연고 하나 없는 수도에서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도, 혼자의 힘으로 지금의 자리에 올라서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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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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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나 당당하고, 또…… 부당한 일에는 굴하지 않고 맞서고…….”

어, 잠깐.

설마 저거 트레시드 후작…… 일을 말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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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서긴 했지…….’

과하게 맞서서 문제지…….

밀레이아는 조금 떨떠름해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알버스는 그녀의 낯이 간지러울 만큼 여러 장점을 끊임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그녀 자신조차 모르고 있던 모습을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은, 굉장히…… 묘한 일이었다.

알버스가 긴 이야기 끝에 자조하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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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겉으로만 여유로운 척하는 겁쟁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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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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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저보다는 보겐 영애야말로…… 훨씬 더 멋진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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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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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제게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가 말을 맺으며 눈물 젖은 얼굴로 말갛게 웃었다.

그러니 밀레이아가 그날,

알버스 플로레트에게 입을 맞추었던 것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

알버스 플로레트와 연애를 시작한 밀레이아는 나날이 더 아름다워졌다.

단순히 외모뿐만 아니라 사소한 말투, 행동에서 묻어나오는 자신감은 그녀를 빛나 보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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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싸,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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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밀레이아는 마침내 알버스 플로레트로부터 사교계의 꽃이라는 호칭을 당당히 빼앗아오는 데 성공했다.

그녀가 수도에 도착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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