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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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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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같지 않다
2022.04.14.
“바, 바시스 님께서 너를 가만두지 않으실……!”
촤악-
새된 목소리는 미처 문장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끊어졌다.
덩달아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간 마족의 머리가 바닥으로 추락하며 피가 솟구쳤다.
캬아악!
바닥으로 허물어지는 마족의 몸 뒤쪽에서 마물이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어둠으로 만들어진 낫이 횡으로 한번 휘둘러지자 마물의 몸이 종이처럼 찢겼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 공포와 분노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달려든 다른 마족과 마물 역시 비슷한 최후를 맞이했다.
찰박-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보랏빛으로 얼룩덜룩해진 흰 발이 피 웅덩이를 디뎠다.
물소리가 나며 핏방울이 허공으로 튀어 옷자락까지 물들였지만 정작 발을 내디딘 자는 개의치 않았다.
“…….”
마족과 마물들의 시체 한가운데에 선 이의 외양은 대단히 기이했다.
검은 머리카락은 어중간한 길이로 끊어져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마치 독에 중독된 것처럼, 흰 피부 위를 보랏빛 얼룩이 흉하게 뒤덮어갔다.
텅 빈 붉은 눈 주위의 흰자는 조금씩 검게 물들고 있었다.
“아…….”
인간과 마족의 중간쯤으로 보이는 형상의 여인이 작게 신음을 흘리고는 비척비척 앞으로 나아갔다.
황량한 황토색 땅 위에 피로 찍은 도장 같은 발자국이 점점이 이어졌다.
……여인의 이름은 알리사.
믿었던 동료들에게 배신당해 마족의 땅 켈베티아를 헤매고 있는 인간이었다.
* * *
“흐음.”
느른한 목소리가 드넓은 알현실을 울렸다.
금방에라도 잠에 빠져들 듯 나른한 음성이었으나, 그 안에 심기 불편한 기색이 담긴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마족들이 흠칫 어깨를 굳히며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깜짝 놀랐을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켈베티아에서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는, 나름대로 힘깨나 쓰기로 유명한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마족이라고 해도, 단 하나의 이름 앞에서만은 그 의미를 모조리 잃고 만다.
마왕.
“그래서.”
모든 마족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 있는 강자.
그중에서도 역대 마왕 중 가장 잔혹하고, 매혹적인 동시에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자가 바로 현 마왕, 바시스였다.
보랏빛 긴 머리카락은 한 번 묶어 올렸음에도 왕좌 아래로 늘어질 정도로 길었다.
틈만 나면 혈투가 벌어지는 켈베티아에서 저 정도로 긴 머리카락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힘에 대한 증명이었다.
“또 실패했다고?”
바시스가 붉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삐딱하게 솟는 것을 본 신하들이 곧 다가올 참상을 예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특히나 보고를 올리러 온 이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가 허리를 반으로 접다 못해 선 채로 바닥에 고개를 처박을 듯한 자세로 더듬거렸다.
“예, 예. 그것이…… 너무 강하다고…….”
“그래봤자 인간이다. 어둠으로부터 태어난 마족이, 고작해야 이제 막 어둠을 다루기 시작했다는 인간에게 져?”
차디찬 조소가 마족들의 뒤통수를 더욱 깊게 짓눌렀다.
바시스가 형형하게 눈을 번뜩이며 웃었다.
“그러고도 구차하게 살아남은 놈이 있다면 내가 손수 그 목을 꺾어놓았을 것이다.”
“…….”
“아쉽구나, 그 자리에서 몰살당했다니. 아니, 친히 치죄 당할 은혜조차 입지 못했으니 그것이야말로 버러지 같은 놈들에게는 알맞은 형벌이었겠지.”
마지막 말은 중얼거림에 가까웠으나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마족들에게는 천둥이나 다름없었다.
보고를 맡은 마족은 숫제 울먹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느라 제 할 말을 마저 하지 못한다면 그것대로 쓸모가 없다며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니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그, 그렇지만, 폐하. 일전에 폐하의 명에 따라 그 인간을 잡아 오기 위해 투입되었던 마족들이 모조리 죽어, 이번에는 마왕성의 전력 중에서도 정예라고 부를 법한 이들만을 골라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상대가 되질…….”
“너희는?”
“……예?”
“너희야말로 마왕성의 최상위 전력이라고 불리는 이들 아니냐.”
“그, 그것이…….”
신하들이 분주하게 시선을 주고받으며 눈치를 보았다.
물론 그들은 강하다.
이 알현실에 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강함은 증명받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더 큰 쾌락을 좇는 것이 천성이라고 해도, 손에 쥔 것이 많아질수록 엉덩이가 무거워지는 것은 인간이고 마족이고 할 것 없는 본성이었다.
당장 며칠 전만 해도, 이 알현실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마족이 호승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 인간을 잡으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인간을 잡아 오겠다고 나서는 이가 있을 리가.
바시스의 눈에는 그것이 훤히 보였기에 도무지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머저리 같은 것들.’
하지만 결국 그의 아래에 있는 놈들이다.
저들이 고작 인간 하나에게 저렇듯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그로서도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혀를 쯧 찬 바시스가 몸을 일으켰다.
시종에게 손짓해 망토를 가져오도록 지시한 그가 웃었다.
“내가 직접 가겠다. 비켜.”
“폐, 폐하!”
“아닙니다, 저희가……!”
“비키라고 했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음성이 신하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시종이 가져온 망토를 두른 바시스가 창문턱에 발을 올렸다.
그의 등 뒤로 어둠이 검은 날개의 형태를 띠고 촤악 돋아났다.
‘어디 얼굴이나 한번 볼까.’
어쩌면 살아 있는 얼굴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이 정도 여흥은 괜찮겠지.
바시스는 그리 생각하며 붉은 하늘로 솟구치듯 날아올랐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 * *
“커헉!”
“폐, 폐하!”
“괜찮으십니까!”
창문으로 날아올랐던 바시스는, 약 반나절 후 피투성이가 된 채 창문으로 추락했다.
신하들이 대경했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알현실 바닥을 구른 바시스가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하지만 상체에 힘을 주자마자 입 밖으로 피가 왈칵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양의 피가 그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왔다.
“그, 흐, 그 버러지 같, 은 인간 놈이……!”
바시스는 숨을 쌕쌕 몰아쉬며 핏발 선 눈을 희번덕거렸다.
날카로운 손톱이 알현실 바닥을 까드득 소리 나게 긁었다.
‘내가…… 도망쳤다고?’
소문의 ‘그’ 인간의 실력이 마왕인 바시스를 뛰어넘을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의 실력은 그와 동급이었다.
그 증거로 지금껏 단 한 번도 상처 입지 않았던 그가, 이렇듯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입고 피를 토하며 돌아오지 않았는가.
자신 역시 인간의 다리를 끊어놓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기고 왔다는 기억은 온데간데없었다.
방심한 탓도 있겠지만, 그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었다는 것.
그리고 처음으로 느껴본, ‘패배할지도 모른다’라는 티끌만큼의 두려움이 더없이 굴욕적이었다.
모멸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라면 자신이 언제나 벌레처럼 깔봤던 신하들이 그를 얼마나 경시할지 불 보듯 뻔했다.
바시스는 상처가 치유되자마자 이를 악물고 다시 인간을 잡으러 갔다.
하지만 몇 번의 전투를 치를 때마다 인간은 더더욱 강해졌다.
가히 경악스러울 만큼의 발전 속도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점차 기묘한 희열, 그리고 감탄이 그녀로부터 느낀 패배감, 불쾌감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바시스는 어느덧 여인과 손을 섞으며 즐겁다는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쩌면 안주했던 것은 나일지도 모르겠군.’
태어났을 때부터 바시스의 머리 위에 있는 자들은 몇 없었다.
어느 정도 자란 후 그들마저 모조리 없애고 마왕의 자리에 오른 후 그의 삶은 무료함 그 자체였다.
가끔 인간 세상으로 나가 사냥을 할 때면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은 쾌락을 느꼈지만, 그는 마왕이었다.
아무리 마왕의 자리가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는 하나 켈베티아의 우두머리로서 해내야 할 최소한의 의무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다른 마족들처럼 완전히 인간 세상으로 나가 인간들을 학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차라리 때려치울까, 마왕이고 뭐고.
한때는 마왕의 자리를 내려놓고 인간 세상에 나가는 것이 낫지 않나, 고민도 해보았다.
하지만 누군가, 형식상으로라도 자신보다 위에 있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바시스는 그때 자신이 힘뿐만 아니라 군림하는 자의 성정도 타고난 것을 깨달았다.
-……인간? 지금 인간이라고 했느냐?
그렇기에 웬 인간 하나가 켈베티아에 들어와 소란을 벌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차라리 반가웠다.
마족들의 한가운데서 발악하는 꼴을 느긋이 지켜보며 가지고 놀고, 그러다가 질리면 그때 팔다리를 꺾고 심장을 뽑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인간은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외려 제게 달려드는 마족과 마물을 남김없이 도륙하며 서서히 마왕성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결국에는 바시스의 발끝에나마 도달했다.
누군가 자신의 발밑에 와 있다는 것, 제 발 아래서 칼날이 섬뜩한 빛을 내고 있다는 것.
그것이 죽어 있던 그의 심장을 박동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살아 있다’라는 감각을 느끼게 했다.
등 뒤를 바짝 쫓아오는 이가 있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오래전 잃었다고 생각했던 호승심과 열정을 불타오르게 했다.
‘언젠가 저자가 다른 마족들이 보는 가운데 내 목을 친다면…….’
사상 최초이자 사상 최악의 마왕이 탄생할지도 모르겠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 * *
“이러지 말고 내 밑으로 들어오라니까, 알리사.”
“혼자 멋대로 알아내서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지!”
바시스가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던진 말에 알리사가 고함치며 손에 쥔 낫을 던졌다.
어둠으로 만들어낸 낫이 눈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로 날아들었다.
바시스마저도 재빠르게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몸이 반으로 갈라졌을 만큼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많이 컸네. 이제 나를 상대하면서 욕도 할 줄 알고, 겉보기에도 완전히 마족 같고.”
“너 진짜 입을 찢어버릴……!”
“알리사.”
그때 바시스가 돌연 정색하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목소리와 행동에서 은연중에 느껴지는 위압감 탓에 씩씩거리며 공격을 이어가던 알리사마저도 움찔 공격을 멈췄다.
바시스는 여태껏 한 번도 내보이지 않았던 진중한 표정을 지은 채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가 양팔을 벌리곤 낮게 말했다.
“내가 복수해줄게.”
“…….”
“몇 번이나 말했지만, 이건 무의미한 싸움일 뿐이야. 네가 내 옆에 서겠다고 하면 나는 당장이라도 모든 마족을 이끌고 인간을 토벌하러 나설 거다.”
“…….”
“네 적은 우리가 아니잖아. 너를 배신하고 이곳으로 떠민 인간들이지.”
바시스의 속살거림이 뱀처럼 알리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가 유혹하듯 눈매를 사르르 접어 웃었다.
알리사가 점차 실력을 키워 그와의 싸움 중 내뱉을 수 있는 말이 늘어날수록, 바시스가 알게 되는 것 역시 많아졌다.
바시스가 그녀의 속을 살살 긁어서, 혹은 그녀가 다른 마족들과의 전투 중 흘린 말들을 조각조각 모아 붙여 알아낸 사실들.
켈베티아를 온통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인간이 그 유명한 ‘대마법사 알리사’이며.
그녀가 어둠을 다룰 줄 알게 되었다는 이유로 동료들에게 버림받아 이곳에 떨어졌다는 건, 솔직히 말해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바시스에게도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알현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으니까.
‘솔직히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
바시스는 알리사가 자신에 대한 적개심만 아주 약간 더 누그러지면 제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알리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언제나 그랬듯이, 그의 예상을 비껴갔다.
“거절하지.”
“……왜?”
바시스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알리사는 영리하고, 또 강하다.
마족들을 등 뒤에 두고 인간 세상을 휩쓰는 것이 복수에는 훨씬 더 도움이 될 거란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왜…….
“복수라는 건 내 손으로 해야 의미가 있는 거지, 남이 대신해준다고 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야.”
“뭐…….”
“그리고 내가 인간을 증오한다고 해서, 너희와 같다는 착각은 하지 마. 내 눈엔 너도 똑같으니까.”
알리사의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가 충격을 채 수습하기도 전 살벌한 공격들이 잇따라 날아들었다.
바시스는 본능적으로 그 공격을 피하고, 또 받아치는 내내 멍한 얼굴이었다.
‘이게 무슨…….’
알리사의 말이 귓가를 파고드는 순간.
바시스가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은…….
‘……같아지고 싶지 않아.’
알리사에게 그저 그런, 스쳐 지나간 이들 중 하나로 남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방법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
다만, 알리사에게 다른 놈들과 같아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서걱-
‘아.’
알리사가 날린 공격이 정확하게 바시스의 목을 베어냈다.
허공으로 한 번 떠올랐던 머리가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옆으로 기울어진, 서서히 흐려지는 시야로 차갑게 그를 내려다보다가 등을 돌려 멀어지는 알리사가 보였다.
바시스는 마지막까지 눈을 부릅뜬 채 그 뒷모습을 시야에 담았다.
‘만약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미처 끝맺어지지 못한 가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온 마물들에 의해 핏방울 한 자락조차 남기지 못하고 스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