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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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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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봄 (1)
2022.04.18.
‘이번에는 거지인가…….’
네 번째 삶.
알리사는 ‘사라’라는 이름의 길거리 고아로 태어났다.
그녀는 멍하니 제 꼬질꼬질한, 단풍잎 같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헛웃음이 비죽 튀어나왔다.
‘지겹다.’
고작 세 번의 삶을 거쳤을 뿐인데, 벌써 정신이 다 닳아 없어진 느낌이었다.
숨을 들이쉬는 것마저 고통이었다.
아직도 죽지 못하고 망령처럼 이승에 발붙이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고역이었다.
게다가 거지의 삶이라니.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루하루 치열하게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이라니.
이보다 더 끔찍할 수가 있을까.
알리사는, ‘사라’는 투쟁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의 실패와 좌절을 겪었으나 편안한 죽음, 영원한 안식에 대한 갈망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희망에, 그리고 땅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워서.
사라는 남쪽 바다에 몸을 던졌다.
운이 좋다면 죽을 수 있을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뭐…… 해적들에게 잡혀 죽지도 않는 괴물이라 매도당하거나 하지 않을까.
‘그래도 너무 아픈 건 싫은데.’
그런 기대와 체념을 반씩 품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여긴 뭐야?”
그녀는 꽤 멀쩡히 살아 숨 쉬는 채, 웬 듣도 보도 못한 나라의 해변에 당도해 있었다.
* * *
‘머리카락이 전부…… 흑색이네. 가끔 갈색 머리카락도 보이는 것 같긴 한데.’
사라는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힐긋거렸다.
하지만 정작 다른 이들은 그보다 배는 더 두려운 눈빛으로 그녀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머리카락이…….”
“그, 금인가?”
“눈이 시퍼렇네, 에구머니나.”
“요괴 아냐?”
“이 사람아, 요괴가 어떻게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지만, 그렇게 따지면 기(氣)라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
“설마 바다를 건너온 건가? 하지만 저 넓은 바다를 죽지 않고 단신으로 넘어올 수가 있나……? 그렇게 해적이 판을 치는데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파격적으로 다른 복식, 외양, 거리의 풍경 등과 별개로.
억양이나 몇몇 단어를 제외하면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엘바레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곱슬곱슬한 금색 머리카락, 푸른 눈을 지닌 자신이 얼마나 눈에 띄는가를 깨달은 사라는 우선 거리를 벗어나 해변으로 돌아갔다.
이곳 사람들의 외양도 어느 정도 관찰했으니, 적당히 마법을 이용해 눈에 띄지 않는 얼굴로 바꿔볼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미처 마법을 사용하기도 전, 사람들의 입을 타고 들불처럼 번지는 소문을 접한 노예상들이 옳다구나 몰려와 그녀를 납치해갔으니까.
“이렇게 찬란한 금색 머리카락이라니.”
“게다가 아직 어린데도 생긴 게 심상치 않아. 이 정도면 한 나라를 살 만한 금액에도 팔아치울 수 있겠어!”
“횡재다! 횡재야!”
노예상들의 희번덕거리는 눈길이 사라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행여나 제가 도망갈까, 한시도 사라지지 않고 작은 구멍이 뚫린 문 너머에서 감시하는 이들을 보고 티 나지 않게 혀를 쯧 찼다.
‘여기서는 마력이 기라고 불리는 건가? 일반 수갑인 줄 알고 내버려 뒀는데 구속구일 줄이야…….’
사라는 슬쩍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구속구가 등 뒤로 양손을 고정한 채 손목을 끊어먹을 듯 조이는 것이 보였다.
노예상들이 해변으로 찾아왔을 때, 사라는 누군가의 앞에서 마법 능력을 내보였다가는 두 배로 복잡해질 거란 생각에 순순히 수갑을 찼다.
우선 그들을 방심시킨 후 남들의 눈을 피해 수갑을 끊고 도망갈 생각이었다.
-뭐……!
하지만 예상외로, 노예상들이 그녀에게 채운 것은 마력 구속구와 정확히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구속구를 찬 후에야 깨달은 사라는 뒤늦게 발버둥 쳤다.
하지만 구속구 때문에 마법도 쓸 수 없고, 노예상들이 사과 대신 던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 작고 여윈 몸으로는 탈출이 불가했다.
‘아…….’
결국 사라는 무력하게 바닥을 뒹굴며 노예상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노예상들이 원하는 것처럼 그녀를 거금에 사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그래서 내가 그놈을…….”
“허어, 그게 정말인가? 나는…….”
불행 중 다행으로, 그녀가 갇혀 있는 곳 주변에는 언제나 두 명 이상의 노예상이 자리했고.
그들이 떠드는 이야기는 의도치 않게 사라에게 많은 정보를 주었다.
노예상들의 말에 따르자면 이곳은 ‘영춘국’이라는 나라였다.
마력 대신 ‘기’가 있고, 마물 대신 ‘요괴’가 있고.
엘바레스와 달리 마법보다는 검기가 더 발달되었다는 나라.
‘사실상 마법은 구속구를 만들 때 사용되는 기술이 전부인 것 같긴 하네.’
문제는 바로 그런 부분 때문에, 사라조차 노예상들이 만든 구속구를 깨트릴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마법진을 연구하는 게 아닌, 구속구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마법의 다양성은 현저히 떨어질지언정, 구속구의 성능과 수만큼은 엘바레스보다 뛰어날 수밖에.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구매자가 안 나타나면 좋을 텐데.’
귀한 상품이라서일까. 노예상들은 사라를 나름 귀중히 다루었다.
물론 그건 다른 노예들처럼 폭행하거나 굶기지는 않았다는 뜻이지, 정말 잘 대우해주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라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차라리 이대로 감옥 안에서, 노력하지 않아도 누군가 제 숨을 붙여놓는 삶을 이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였다.
그렇게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를 이어가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죽은 듯 잠에 취해 있던 사라는 문득 귓가를 울리는 희미한 소란에 깨어났다.
‘……뭐지?’
잠기운이 한순간에 달아났다.
몇 번의 생을 반복하며 터득한 본능이라는 이름의 촉이 경종을 울려댔다.
‘손님이 왔을 때의 분위기랑 달라.’
그것을 깨달은 사라는 무릎걸음으로 재빨리 구석으로 가 웅크렸다.
만일 저 소란이 제 목숨을 끊어줄 구명줄이라면 모르겠지만, 아니라면 불필요한 고통만 늘어날 뿐이었다.
사라는 필요하지 않은 고통까지 끌어안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눈을 감은 채, 몸을 둥글게 말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을 때.
콰앙!
쇠창살이 겹겹이 둘려 있던 감옥의 문이 불시에 폭음과 함께 부서져 나갔다.
어둑하던 감옥 안으로 빛이 한순간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 빛 가운데로 한 사람의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요, 괴?”
그리고 다음 순간. 자그마한 숨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움찔한 사라가 슬쩍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
빛을 등지고 선, 칠흑 같은 긴 머리카락을 지닌 소년이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따스해 보이는 갈색 눈이 파르라니 떨렸다.
그 눈에 깃든 충격, 혼란 등이 또렷이 시야에 들어왔다.
‘……죽이려 들려나.’
사라는 소년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요괴’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소년이 저를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법도 했다.
실제로 그녀의 외양은 이곳 사람들 사이에서는 눈에 띄다 못해 해괴하게 보일 만큼 독특했으니까.
과연 저 소년의 검은 나를 죽음으로 인도해줄 것인가, 혹은 지옥 같은 삶으로 인도할 것인가.
사라가 그런 체념 어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으려던 찰나.
펄럭-
긴 망토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소년이 성큼 걸음을 떼어 사라의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가 더없이 정중한 얼굴로 그녀에게 조심스레 검을 쥐지 않은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냐?”
그 태도에 사라는 찰나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조금 전에는 요괴다 뭐다 하더니. 왜 갑자기 이렇게 다정하게 구는 거지.
사라가 혼란에 빠진 사이, 소년이 난처하게 눈썹을 누그러트렸다.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조금 전에는…… 그저, 조금 놀라 나도 모르게 실언을 했다. 미안하구나.”
“…….”
소년이 진심 어린 음성으로 사과를 건넸다. 그가 이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폐하의 명에 따라 이곳의 불법 노예상들을 추포하러 온.”
“…….”
“하윤(圷淪)이라 한다.”
사라는 일순 저도 모르게 멍하니 소년, 윤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그가 입을 열어 제 이름을 말하는 순간.
‘……물?’
어디선가 비에 젖은 흙 내음이 밀려와 코끝을 간질이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 * *
망할 구속구를 풀어내고 이야기를 들어 보니, 윤은 이곳 영춘국 왕의 명을 받들어 불법 노예상들을 소탕하러 왔다고 했다.
제아무리 기세등등한 노예상이라고 한들 왕명으로 파견된 무사들을 상대할 힘은 없었던 걸까.
노예상들은 너무도 쉽게 쓰러졌고, 사라를 비롯해 그들에게 잡혀 있던 영춘국의 다른 이들 또한 모두 풀려났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세상에, 하(圷) 가문의 소가주께서 직접…….”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풀려난 이들은 윤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펴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윤은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더 일찍 저들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 미안할 따름이네.”
사람들은 그 말에 더욱 크게 감명을 받은 듯 보였다.
윤에게 향하는 감사 인사가 끊이지 않았다.
이후 노예상에게 잡혀 있던 이들 중 대부분은 무사들의 도움을 받아 잃었던 가족에게 돌아갔고.
혹 길거리를 떠돌다 잡혀와 돌아갈 곳이 없는 이라면 무사들을 통해 임시로 구한 일자리로 각각 흩어졌다.
하지만 사라는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었다.
그녀는 영춘국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영춘국의 법으로 구제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으음.”
윤은 멀뚱거리며 객잔 한쪽에 앉아 있는 사라를 돌아보고는 난감한 신음을 흘렸다.
그의 보좌 역할을 하는 무사가 조용히 속닥거렸다.
“영춘국과 교류가 있던 타국의 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아예 저 바다 건너 모르는 나라의 사람이라니……. 저러면 신분패를 발급하기도 난감합니다.”
“……이름도 없다고 했고. 신분패 발급 요청을 한다고 해도 검토에 한참이 걸릴 텐데, 그동안 머물게 할 곳이 마땅치 않구나. 신분패도 없는 이를 써줄 곳은 없을 테니.”
윤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는 마법을 쓴 탓에 그들의 대화가 훤히 들렸으나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이름이 무어냐?
-……없어요.
아까 윤이 이름을 물어보았을 때. 사라는 잠시 고민했다가 이름이 없다고 답했다.
‘이 이름은 너무 튀어.’
사라는 굳이 저 망망대해를 다시 건너서 엘바레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그곳에서 도망치듯 바다에 몸을 던졌던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처음 계획했던 대로 몰래 마법으로 외양을 바꾸고 돌아다니자니, 억양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이곳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으니 금세 들킬 것이 뻔했다.
다시 말하지만, 사라는 죽음을 바라면서도 그로 인해 수반되는 불필요한 고통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의미 없는 고통은 이미 두 번째, 세 번째 삶을 통해 질리도록 겪어보았으니까.
그래서 사라는 적당히 눈에 띄지 않고, 큰 노력 없이도 근근이 목숨을 이어가며 죽음을 기다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 윤이라는 소년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보였다.
‘꽤 있는 집안 자식인 것 같았는데. 마음도 여려 보이고. 그러면 신분패나 머물 곳 같은 건 어떻게든 연줄로 얻어주지 않을까?’
그렇게 사라가 꽤, 아니 상당히 뻔뻔하고 양아치 같은 궁리를 할 무렵.
한숨을 푹 내쉰 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에게 다가왔다.
화들짝 놀라 황급히 머릿속의 생각들을 몰아내는 그녀의 앞에 윤이 아까처럼 몸을 수그려 앉았다.
“이름이 없다고 했었지.”
“……네.”
“그럼 우선 너를 무명(無名)이라고 부르겠다. 내 너에게 지금 당장 이름을 주지 않는 이유는…….”
다정한 목소리가 봄의 햇살처럼 귓가에 내려앉았다.
“나중에 네가, 정말로 좋은 인연과 가족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사람들과 너에게 의미가 있는 이름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사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윤은 사라의 얼굴에 드디어 ‘아이다운’ 표정이 떠오르자 그것이 기꺼워 빙그레 웃었다.
“우선은 신분패가 발급될 때까지 우리 집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 적어도 먹을 것과 잘 곳만큼은 확실히 보장해주마.”
윤의 웃음을 눈에 담자, 어쩐지 가슴의 술렁거림이 한층 심해졌다.
그 때문에 사라의 입에서는 조금 늦게서야 대답이 흘러나왔다.
“……좋아요.”
그렇게, 조금은 기묘한 한 지붕 아래서의 삶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