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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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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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봄 (2)
2022.04.21.
사라는 윤의 배려로 하씨 가문의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맡게 되었고, 덩달아 아는 것도 늘어났다.
영춘국 내에서 하씨 가문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더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가주와 소가주가 나란히 현왕의 검으로써 더할 나위 없는 신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그렇지 않아도 대대로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했던 하씨 가문을 명실상부한 최고의 가문으로 올려두기 충분했다.
“……이번에도 빠져나간 겁니까?”
“그래. 윤씨 가문을 버리고 제 목을 보존했더구나.”
“련 가주는 대체……!”
“목소리 낮추어라, 하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던 사라는 슬쩍 대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정원의 정자에서 대소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하윤과 가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라는 시선을 느낀 하윤이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전에 몸을 돌리며 혀를 쯧 찼다.
약간의 비웃음을 담아서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직 어리네.”
세상에 도덕과 신의, 권선징악이 그대로 지켜질 것이라고 믿는 게 아주…….
“어리긴 무슨 얼어 죽을. 여기서 네가 제일 어리다, 이것아!”
“악!”
퍽!
그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사라의 등짝을 후려쳤다.
비명을 내지르며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하씨 가문의 요리사이자 하인들의 실세인 신오였다.
노인이 혀를 끌끌 차더니 고갯짓했다.
“앞마당 다 쓸었으면 가서 뒷마당도 쓸어라. 빗자루 가져다 놓고 오는 길에 텃밭에 심어놓은 것도 좀 뽑아오고.”
“……텃밭이면 주방 문 열면 바로 있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뭐?”
“……예.”
사라가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신오는 떠날 때까지도 바닥에 낙엽이 남아 있지 않으냐며 잔소리를 퍼붓고는 사라졌다.
사라는 신오의 뒷모습에 대고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골몰했다.
‘……괜히 따라왔나?’
다른 거지들처럼 국가 기관에서 일하는 게 더 고단할 것 같아서 이리로 온 건데, 어째 이 집안은 하인들을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사라는 한숨을 푹 내쉬고 터덜터덜 뒷마당으로 걸어갔다.
“……풋.”
“어찌 그러느냐, 윤아.”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버지.”
그 모든 광경을 곁눈질로 지켜보던 윤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하 가주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으나 윤은 그저 고개를 젓고 찻잔을 들어 올렸다.
온기 어린 시선이 자그마한 뒷모습에 따라붙었다.
* * *
‘지금이라도 튀는 게 옳은 선택 아닐까?’
늦은 밤.
사라는 잠들지 않은 채 구석방에서 심각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빗자루질 이후로도 해가 꼬박 떨어질 때까지 쉼 없이 일을 해야 했다.
하씨 가문에는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가주의 엄명을 아주 철석같이 지키는 놈들만 득시글했다.
‘하윤 그게 나름 잔정이 많아 보여서 여기로 온 건데. 무슨 국가 기관보다 더 피도 눈물도 없이 일을 시키는 것 같냐.’
그러니 지금이라도 이곳을 박차고 나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끙끙대던 사라가 한숨을 삼켰다.
‘그런데 다른 데가 여기보다 대우가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어. 지금은 그래도 하 가문 사용인이라는 사실에 다들 쉬쉬하며 나를 봐주는 거고…….’
사라가 하씨 가문을 벗어나는 순간 납치하려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놈들이 천지에 널렸으리라는 건 지나가는 개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도 청렴결백하고 왕의 검으로 이름이 높은 하씨 가문의 하인이기에 손대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지.
덤벼드는 놈들을 마법으로 작정하고 쓸어 넘겨 소란의 한복판에 선 채 살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적당히 능력을 숨겨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려면 적어도 아직은 하씨 가문의 후광이 필요했다.
‘자자…….’
어차피 진심으로 떠날 생각도 없긴 했다. 그저 매일 밤 늘어놓는 불평불만에 불과했다.
사라는 신오 때문에 삭신이 쑤신다며 구시렁대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
그녀의 고개가 창 쪽으로 휙 돌아갔다.
사라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던 자세 그대로 잔뜩 경계심을 세운 채 창을 노려보았다.
‘……방금.’
신오의 비명 아니었나?
그리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벌컥!
돌연 구석방의 문이 열리더니 굳은살 박인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
사라가 반사적으로 저를 덮친 인영을 팔꿈치로 후려치며 마법을 사용하려던 차였다.
“무명아, 나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있던 사라가 멈칫했다.
그제야 그녀의 입과 코를 덮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손에 가로막혀 있던 진득한 피비린내가 사라의 코끝으로 한 번에 몰려들었다.
“이게 무슨…….”
잇새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희게 질린 얼굴의 사라가 천천히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피투성이가 된 채 힘겹게 검을 쥐고 있던 윤이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속삭였다.
“잘 들어라, 무명아.”
“도련님, 상처가…….”
“옷장에 숨어 있다가 인기척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이곳에서 나가 안방으로 가거라. 그곳의 족자를 들추면 뒤에 비밀 통로가 있는데, 그곳을 통해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지금!”
사라는 저도 모르게 숨죽여 윽박질렀다.
피비린내를 맡자마자 반사적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것은 본능적인 불안이라기보다는 학습된 불안이었다.
그러나 윤은 희미한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덤덤히 읊조렸다.
“너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거다.”
“…….”
“너는 영리하니까, 습격자들이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겠지. 하지만 잊어라.”
“…….”
“잊고, 달아나. 애초에 너는 이곳의 일에 휘말릴 필요가 없는 사람이 아니냐. 그러니 어서 도망가거라.”
윤은 저를 두고 가서 너라도 살라는 말을 하며 티끌 없이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사라의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받았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가 이를 갈듯이 중얼거렸다.
“……제고.”
“응?”
“한솥밥 먹으면 그게 다 식구인 거라고 그럴 땐 언제고.”
윤은 긴박한 와중에도 사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눈을 깜박였다.
사실 사라가 뱉은 말은 신오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그것까지 설명할 여력은 없었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소리 없이 접근하는 그림자가 시야에 담겼다.
짧은 순간. 치열하게 고민한 사라가 윤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윤이 당황해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보다 형형한 눈을 한 사라의 말이 먼저였다.
“비밀, 지켜요.”
“무슨…….”
쾅-!
그러나 미처 물음에 대한 답을 들을 새도 없이.
윤의 등에 칼을 박아 넣으려던 복면인이 벽을 부수며 밖으로 튕겨 나갔다.
* * *
그날의 일로 인해 하씨 가문의 가주와 안주인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윤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련 가문의 습격이 있었을 당시, 가문의 식솔들은 대부분이 공격당해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으니까.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자연히 윤이 홀몸으로 수십의 암살자들을 무찔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의 진실은 아는 것은 윤과 사라뿐이었다.
사라가 그렇게 하기를 원했으므로.
아무튼. 그날 이후로 윤은 하씨 가문의 가주가 되었고, 사라는 윤에게 의식주를 의탁하는 대신 말동무인 척 그의 곁을 지키며 암살자들을 처리해주었다.
그런 암묵적인 공생 관계는 이후로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소년이 남자가 되고, 소녀가 여자가 될 때까지.
사박-
눈 쌓인 대나무숲 사이로 두 개의 발자국 소리가 교차해서 울려 퍼졌다.
이제는 앳된 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더없이 낮은 울림을 담은 목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무명아.”
“네, 가주님.”
평소라면 성의 없이 또 무슨 일로 부르셨냐며 대답했겠지만, 어쩐지 윤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사라는 그를 따라하듯 점잖게 답했다.
그러자 그것이 웃긴 지 짧게 웃음을 흘린 윤이 말을 이었다.
“너는…….”
“…….”
“언젠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더냐.”
사라는 아래로 내렸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어릴 때와 다르게 널찍해진, 검은 옷자락에 휘감긴 등이 보였다.
사라는 윤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단순히 사람들의 말대로, 바다를 건너온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곳에는 ‘비틀림’이라는 것이 없었다.
요괴와 사람들의 세상이 분리된 채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뒤섞여 있었다.
그렇다 보니 사라조차 이곳이 원래의 세상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엘바레스로 돌아가고 싶더라도 돌아갈 수 없을 확률이 높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사라는 적어도 아직 엘바레스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윤이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떼었다.
“무명아.”
“네.”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네게 정말 좋은 인연이나 가족이 생겼을 때. 그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이름을 받으라 했지.”
“그랬었죠.”
“만약 네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면, 그리고…… 어딘가에 굳이 적을 둘 생각이 없다면.”
잠시 말을 멈췄던 윤이 물었다.
“내가 너의 이름을 지어주어도 괜찮겠느냐?”
“…….”
그 말에 사라의 어깨가 잠시 움찔 튀어 올랐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으나 굳이 거절할 일은 아니긴 했다.
실제로 영춘국에서 사라와 인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 이는 윤뿐이었다.
게다가 그의 목소리에서도 고심한 흔적이 엿보였다.
그것을 구태여 거절해 그에게 무안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대답에 너무 영혼이 없구나. 싫다면 편히 거절해도 된다.”
“아닙니다. 도련님, 아니, 가주님의 은혜가 하해와 같이 감읍합니다.”
“……영혼이 없는 채로 가르쳐준 단어만 화려하게 조합하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나 원 참.”
윤이 웃음을 터트리자 그의 뒷모습 역시 따라 들썩였다. 사라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윤이 웃음을 그치고 담담히 말을 뱉었다.
“연(連).”
“…….”
“내 너를 연이라 부르겠다.”
“무슨 뜻입니까?”
“계속 이어진다는 뜻.”
짤막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다정했다.
어쩐지 가슴이 간질거리는 듯했으나 사라는 무의식중에 그 감정을 짓밟아 눌렀다.
그녀는 제 감정을 부정하듯 화제를 돌렸다.
“가주님의 이름은 무슨 뜻인데요?”
“가랑비 젖듯 누구에게나 스며드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淪).”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그러하냐?”
윤이 나지막이 웃었다.
여전히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내 멈추지 않던 걸음을 멈춘 윤이 사라를 등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 옆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오는 광경이 시야에 달라붙었다.
“연아.”
“……네?”
“이곳이 왜 영춘국이라고 불리는지 아느냐?”
윤의 목소리로 불린 제 이름이 낯설어서, 또 이상할 만큼 간지러워서.
사라는 한발 늦게 흠칫하며 반문했다.
그러나 답을 바란 물음이 아니었는지 윤은 얼마지 않아 말을 이었다.
“이곳의 겨울은 혹독하지만, 그만큼 겨울을 난 후 찾아오는 봄이 아름답고 길기 때문이란다.”
“…….”
“그래서 연인들이 사랑을 표현할 때는 봄을 빗댄 말을 많이 쓰곤 하지.”
거기까지 말한 윤이 몸을 돌렸다.
연한 갈색의 눈은 어릴 때와 다를 바 없이 다정함을 담고 있었으나, 그 외에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달라졌다.
훌쩍 커진 키, 넓어진 어깨, 굵어진 목과 턱의 선.
사라는 새삼스레 윤에게서 ‘낯설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어깨에 걸치고 있던 검은 외투를 벗은 윤이 그것을 사라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가 불시에 그녀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하며 자상하게 웃었다.
“나는 그대와 돌아오는 봄을 함께 맞이하고 싶은데.”
“…….”
“그대는 어떻소?”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숨이 턱 막혔다.
찰나 머릿속으로 여러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연인들의 이야기를 해주고서 바로 그런 말을 꺼내는 건 어째서인가.
왜 갑자기 다른 말투를 쓰는가.
그것은 나와 단순한 주인, 하인의 관계로 남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
사실 사라는 윤의 말뜻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녀가 겪어온 일들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다만 부정하고 싶었다.
아직 그녀의 안에는 미처 아물지 못한 지난 생에서의 기억들이 버거울 정도로 많았다.
그래서 사라는 입술을 한번 깨물고, 윤이 제 어깨에 둘러준 옷을 벗어 손에 든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사라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옷을 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잠시 말이 없던 윤은 사라의 손에서 제 옷을 거두어가는가 싶더니, 그것을 다시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춥겠다. 입고 있거라.”
“가주님. 저는…….”
“네 뜻은 잘 알았다. 하지만 이기적일지라도 네가 감기에 걸려 끙끙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구나.”
“…….”
“부탁이다.”
코끝이 시큰해지는 듯한 기분에 사라는 저도 모르게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절의 말을 내뱉기 전과 다를 바 없이, 여전히 웃고 있는 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의 사라는 차마 그의 웃음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돌렸었다.
하지만 훗날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그의 웃는 얼굴을 더 많이 눈에 담아뒀어야 했다.
그때가 사라가 목격한 윤의 마지막 웃음이었으니까.
* * *
“…….”
사라는 멍하니 문 앞에 주저앉아 궁에서 온 이들의 손에 들린 것을 바라보았다.
윤의 목을 받쳐 든 이가 사라를 신기한 듯 힐긋대며 헛기침을 했다.
“폐하께서 가주의 일은 참으로 유감이라고 하셨네. 설마하니 청라국의 왕이 화친을 위해 방문한 사절의 목을 베어 돌려보내고 전쟁을 선포할 줄 알았는가.”
“…….”
“으음, 그런데 말이지. 살아 돌아온 이들의 말을 듣자 하니 청라국의 왕이 화친의 증거로 자네를 넘겨 달라고 했고, 하 가주가 그것을 거절하여 일이 이리되었다는데…….”
이후로 궁의 사신이 무어라 말을 이었으나 사라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귓가가 온통 웅웅 울렸다.
‘혼자 보내지 말걸.’
윤이 홀로 청라국으로 향한 것은 순전히 사라에, 연에 대한 배려였다.
제 고백을 거절한 연이 불편함을 느낄까 봐 일부러 그녀를 이곳에 두고 간 것이었다.
사라는 저를 잡을까 말까 고민하는 이들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흙바닥에 엎드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쏟아냈다.
말로는 더 상처받고 싶지 않다느니 했지만, 사실은 이미 정이 들었으면서.
잔정이 많은 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왜…….’
문득 분노가 차올랐다. 연은 손톱을 땅에 박아 넣으며 이를 까드득 갈았다.
왜 나는 또다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걸까.
아직도 인간에 대한 미련을 다 놓지 못하고,
말로는 홀로 있겠다 잘도 지껄였지만 결국엔 누군가의 곁에 있고 싶어 해서?
‘내 잘못이다.’
그 순간, 연의 마음속에 한 가닥 남아 있던 인간성 등이 모조리 잘려 나갔다.
마침내 모든 미련과 욕심을 놓아버린 그녀의 눈은 텅 빈 채 빛을 잃었다.
이후 연은 저를 붙잡으려 드는 이들을 모조리 죽이고 청라국으로 달려갔다.
고전 끝에 청라국 왕의 목을 베는 데는 간신히 성공했으나, 아무리 그녀라 할지라도 끝없이 밀려드는 군사를 홀몸으로 막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아…….’
연은 산더미처럼 쌓인 시신 위로 엎어지며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잇새로 혼백 같은 흰 연기가 한 줄기 피어올랐다.
텅 빈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이곳의 겨울은 혹독하지만, 그만큼 겨울을 난 후 찾아오는 봄이 아름답고 길기 때문이란다.
‘겨울이구나.’
볼에 내려앉는 눈송이의 감촉을 마지막으로, 연의 숨이 끊어졌다.
그렇게 그녀의 세상은 영원히 겨울에 멈추는 듯했다.
“실비아.”
봄처럼 웃는 누군가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