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 재회 (1) (112/118)


외전 4. 재회 (1)
2022.04.25.


16558826031522.jpg

 

16558826031529.jpg

“캬, 여기가 엘바레스구먼? 맨날 바다 너머로만 보다가 이렇게 직접 발 디디는 건 또 처음이네.”

쾌활한 목소리가 엘바레스의 남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항구에 울려 퍼졌다.

짧게 자른 금빛 머리카락이 햇살에 반짝거렸다.

푸른 눈은 난생처음 세상에 나온 아이처럼 흥미로움으로 가득했다.

16558826031529.jpg

“……왕자님은 속도 좋으십니다. 저희를 대패시키고 얼마 되지 않던 뭍의 땅까지 모조리 빼앗아 간 곳인데도 마냥 신나십니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금발의 남자 뒤로, 상당히 불퉁한 표정의 남자가 따라 내렸다.

그들은 엘바레스의 왕이 바뀐 후, 처음으로 돌아온 건국기념일을 맞아 이곳을 방문한 남부 해상왕국, 라드니의 왕자와 그 보좌관이었다.

보좌관의 말에 왕자라 불린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시원시원하니 잘생긴 얼굴의 왕자, 트레반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16558826031529.jpg

“버본, 졌으면 그냥 깔끔하게 인정해. 쟤네가 우리보다 강한데 뭐 어쩌겠어? 게다가 뭍의 땅은 몇백 년 전에 우리가 빼앗았던 거지, 원래대로라면 엘바레스의 영토가 맞잖아?”

얼마 전 엘바레스와의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후계자라기엔 지나치게 무게가 없어 보이는 발언이었다.

버본이 그런 트레반을 보며 답답한지 가슴을 콩콩 쳤다.

16558826031529.jpg

“왕자님께서는 그때 하필 전염병에 걸려 참전하지 못하셨잖습니까! 당신께서 군사들을 이끌었다면……!”

16558826031529.jpg

“그래도 졌을걸? 당시의 왕세자야 내가 어떻게든 붙잡고 늘어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시간을 더 끌었으면 아마 벨포르 공작이 직접 내려왔을 거야. 아, 이제는 국왕이지, 참?”

그러나 트레반이 ‘벨포르 공작’이라는 말을 꺼내자 버본은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전 벨포르 공작. 현재는 엘바레스의 국왕.

아무리 세상사에 무지한 사람이라도 그의 무위에 관한 이야기는 모를 수가 없었다.

마족과 극적으로 평화협정이 맺어지기 전.

모든 마족과 마물이 가장 두려워했다는 북부의 방패.

인간임에도 마족의 힘을 다룰 수 있던 전 왕세자 다비드의 함정을 가볍게 파훼하고 그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다는 이야기가 돈 후.

엘바레스 주변의 소국, 혹은 부족들은 전에도 그랬지만 한층 더 몸을 사리며 엘바레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16558826031529.jpg

“게다가 왕비는 대마법사 알리사의 환생으로 불릴 정도로 대단한 실력의 마법사라며?”

16558826031529.jpg

“그건…… 예.”

전 벨포르 공작 부인이 대단한 실력의 마법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버본의 속이 얼마나 쓰렸던가.

이쯤 되면 세상 모든 인재가 엘바레스에 몰려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6558826031529.jpg

“아무튼.”

그때 트레반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형형하게 번뜩이는 연푸른 눈이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마저 위험하게 보이게 했다.

겉보기에는 한없이 가볍고 쾌활해 보일지 몰라도, 그 모습이 트레반의 본질에 가장 가까웠다.

버본이 입으로는 아무리 투덜거림을 늘어놓아도 그를 떠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트레반은 저 멀리, 엘바레스의 수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입을 움직였다.

16558826031529.jpg

“적어도 아바마마와 내가 다스리는 동안은 이만한 힘의 차이를 좁힐 수 없어.”

16558826031529.jpg

“…….”

16558826031529.jpg

“물론 뼈를 깎는 노력을 한다면야 차이를 어느 정도 좁힐 수는 있겠지. 하지만 뛰어넘을 수는 없다.”

수많은 자료를 취합하고, 그보다 더 많은 증언을 귀에 담았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일에는 어느 정도의 과장과 왜곡이 섞인다는 점을 감안해도 엘바레스와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엘바레스 최고의 전력인 벨포르 공작과 그 기사단이 출전하지 않은 전쟁에도 패했다.

버본은 트레반이 출전했다면 전쟁의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 말했지만, 그것은 충성심이 섞인 말이었다.

트레반은 제 실력이 벨포르 공작의 옷깃 한 번 스치지 못할 정도라는 것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쭙잖은 패배감과 수치심으로 날뛰어봤자 애꿎은 백성들의 목숨만 희생시킬 뿐이다.

트레반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에게 라드니의 백성들은 그 어떤 영예와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자존심은 사람의 목숨에 비하면 더없이 하찮은 것이었다.

16558826031529.jpg

“그러니 차라리 잘 지내고 싶다고 알랑거려두는 게 낫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있잖아?”

16558826031529.jpg

“…….”

16558826031529.jpg

“어쭙잖게 개겼다가는 아까운 목숨만 날아갈 뿐이야.”

버본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실 그가 라드니의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렇지, 트레반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군 버본을 힐끔 돌아본 트레반이 방긋 웃었다.

그러자 위험하게 보였던 얼굴은 다시 조금은 철없어 보이는 얼굴로 바뀌었다.

트레반은 버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후 양손을 깍지 껴 머리 뒤에 올린 채 몸을 빙글 돌렸다.

16558826031529.jpg

“뭐, 마족과의 협상을 이끌어내서 우리 쪽 백성들의 피해를 줄여준 공도 있으니까. 이 정도는 해주자고. 가자!”

트레반은 발랄하게 말한 후 시종으로부터 말고삐를 넘겨받으며 시종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뜻 들으니 엘바레스의 관광 필수 코스에 관해 묻는 것 같았다.

16558826031529.jpg

“못 말린다니까, 정말.”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버본이 트레반을 말리기 위해 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우여곡절 끝에 트레반과 버본은 수도의 왕궁에 도착했다.

트레반은 배정받은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16558826031529.jpg

“와, 세상에. 사람이 많은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많잖아?”

버본 역시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생각에 동의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16558826031529.jpg

-아, 라드니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잠시…… 잠시만요! 거기! 싸움은 안 됩니다!

16558826031529.jpg

-죄송합니다, 금방 안내를…… 악! 그, 그 집채만 한 동물은 뭡니까? 코끼리요?

 
사절단의 안내를 맡은 시종들은 그야말로 혼이 쏙 빠져 보였다.

벨포르 공작이 왕위에 오른 후 처음 맞는 건국 기념일이니 사절단의 수가 많을 것은 예상했다.

아니, 예상했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이곳에 도착해 눈으로 확인한 수는 그 두 배에 달했다.

16558826031529.jpg

“무슨 방 배정에 몇 시간이 걸리냐, 아이고.”

트레반이 한탄을 흘리며 침대 위에서 몸을 옆으로 굴렸다.

직후 그는 주섬주섬 짐을 내려놓더니 다시금 매무새를 정돈하는 버본을 보고 눈을 끔벅였다.

16558826031529.jpg

“뭐야, 어디 가게?”

16558826031529.jpg

“엘바레스 서부의 스트라스 부족이 왕가와 플로레트 백작가 말고 다른 지역과도 거래를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라드니에도 거래를 터놓으면 좋을 거 같아서요. 약초는 늘 부족하니까요.”

16558826031529.jpg

“하여간 부지런한 놈. ……설마 나도 가야 해?”

행복하게 침대를 뒹굴거리던 트레반이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버본이 혀를 쯧 차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16558826031529.jpg

“됐습니다. 저 혼자로도 충분해요. 그보다…….”

고개를 홱 돌린 버본이 눈을 부릅떴다.

평소에는 그를 놀려먹기 바쁜 트레반조차도 순간 움찔할 정도로 사나운 기세였다.

16558826031529.jpg

“내일모레 국왕 부처를 알현하고, 저녁에 열릴 가면무도회 참석까지 끝마치기 전에는 절대! 사고 치시면 안 됩니다. 아시죠?”

16558826031529.jpg

“알아. 내가 무슨 애인 줄 알아?”

16558826031529.jpg

“국혼 상대 리스트니 뭐니 그것도 저 없을 때는 넣어두십시오.”

16558826031529.jpg

“…….”

버본이 엄중하게 경고했다.

그 말에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려는 트레반을 향해 버본이 재차 으름장을 놓았다.

16558826031529.jpg

“대답이 없으십니다?”

16558826031529.jpg

“……알았다, 알았다고.”

트레반이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답했다.

버본은 그제야 만족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달칵.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난 뒤, 트레반은 투덜거리며 침대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16558826031529.jpg

“사서 일하겠다는데 왜 말려, 저걸? 나는 끝내주는 휴가를 즐기다 갈 테니 저는 쎄빠지게 일이나 하라지.”

하지만 타지에서의 휴식은 달콤한 동시에…….

16558826031529.jpg

“……심심해.”

심심했다.

트레반의 주위에는 평소 사람이 끊이지 않았기에, 그는 이러한 침묵이 더없이 낯설고 지루했다.

버본이 사라진 후, 한동안 완벽한 정적 속에 남겨져 뒤척거리던 트레반이 끝내 몸을 벌떡 일으켰다.

16558826031529.jpg

“산책이나 해야겠다. 산책하는 동안 누가 말 걸면 대답하는 정도는 어쩔 수 없는 거지, 안 그래?”

트레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간단히 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작은 종이쪽지를 품 안에 넣고 방을 나섰다.

16558826031529.jpg

“흐음, 어디 보자……. 이쪽은 사절단 숙소인데. 엘바레스 귀족들은 어디서 묵으려나?”

트레반은 사절단의 숙소로 배정된 궁을 슬슬 벗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실 트레반이 사절단으로 온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버본에게 설명했듯 괜한 피를 흘리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말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화친을 더욱 공고히 할 국혼 상대를 찾기 위해서였다.

16558826031529.jpg

‘말뿐인 약속은 언제든 뒤집힐 수 있어.’

트레반은 외교라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 신의에 의존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엘바레스의 호의에 제 백성들의 목숨을 맡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하여 트레반은 혼기도 찬 겸, 엘바레스의 유력 귀족 영애 한 사람과 국혼을 치를 작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후일 엘바레스가 라드니를 침략하려 들 때, 그 가문이 어느 정도는 반대해주겠지.

그 잠깐의 망설임이면 충분했다.

라드니는 작은 섬나라인 만큼 딱히 외척의 영향력이 큰 나라도 아니었으니까.

16558826031529.jpg

“흐음.”

사절단 숙소에서 멀어지자 주위가 조용해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트레반은 경비병들이 자신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혀를 쯧 찼다.

16558826031529.jpg

‘이 길은 너무 눈에 띄는군.’

주위에 사람이 없으니, 키가 큰 편인 데다가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그는 더욱 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트레반은 크게 시선을 끌지 않고 엘바레스의 귀족들을 미리 살펴보는 것이 목표였으므로 슬쩍 후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16558826031529.jpg

“이쪽에는 길이 없나?”

트레반은 후원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길을 통해 왕궁 반대편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벽을 더듬거리며 이동하던 그는 어느 순간 두터운 덩굴 너머로 손이 쑥 들어가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기우뚱 넘어졌다.

16558826031529.jpg

“으악!”

쿵!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트레반은 얼얼한 엉덩이를 힐끗 돌아보고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반대쪽에서는 미처 몰랐는데, 작은 아치가 빽빽한 덩굴에 가려져 있었다.

16558826031529.jpg

“으, 여기가 어디야?”

트레반은 툴툴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살폈다.

아무래도 지금은 관리되지 않는, 버려진 궁 같은데…….

16558826031529.jpg

“……어?”

다음 순간. 트레반은 작고 낡은 궁 한가운데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그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고, 턱이 빠질 듯 떨어졌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비현실적인 외모의 한 여인이었다.

16558826153247.jpg

 
낡은 궁의 계단에 눕듯이 몸을 기댄 여인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

긴 머리카락이 오후의 햇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마치 깊은 숲속에 봉인되어 있던 신성한 무언가를 마주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16558826031529.jpg

“……요정?”

트레반은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그때 평화롭기 그지없는 표정이던 여인의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그리고 천천히 눈꺼풀 아래로 금빛 눈이 드러났다.

16558826031529.jpg

“아.”

그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트레반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러나 그가 여인에게 말을 걸기 위해 앞으로 한 걸음을 떼는 순간.

흰빛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여인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황한 트레반이 서둘러 여인이 앉아 있던 자리를 살폈으나 묘한 비누 향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16558826031529.jpg

“이게 대체…….”

16558826031529.jpg

“야이…… 왕자니이이임!”

동시에 욕설을 내뱉다가 황급히 말을 바꾼 버본이 트레반을 찾아 달려왔다.

그가 헉헉거리며 트레반의 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16558826031529.jpg

“제가 얌전히! 계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새를 못 참고 돌아다니……!”

16558826031529.jpg

“버본!”

버본이 난리를 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멍하니 계단만 바라보던 트레반이 별안간 몸을 돌려 그의 양손을 움켜쥐었다.

버본의 뒷덜미로 쭈뼛 소름이 돋아났다.

16558826031529.jpg

“소, 소름 끼치게 이게 뭡니까?”

16558826031529.jpg

“나 요정을 만났다.”

16558826031529.jpg

“……뭬?”

16558826031529.jpg

“그리고 사랑에 빠졌어. 결혼해야겠다.”

트레반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몽롱하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버본이 빙그레 웃었다.

16558826031529.jpg

‘그냥 때려치울까.’

충성심이고 뭐고 이 미친놈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대체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명복을 빕니다, 요정님.

버본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16558826179322.jpg

16558826179326.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