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재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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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재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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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재회 (2)
2022.04.28.
“……하.”
“…….”
“……폐하!”
“음?”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던 란델이 뒤늦게 부름을 감지하고 퍼뜩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오만상을 찌푸린 오스턴이 깃펜을 부러트릴 듯 그러쥔 채 퀭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딴생각에 잠겨 있다가 걸린 란델이 머쓱함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그 호칭은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군.”
“즉위 1년을 맞이해서 새삼 호칭이랑 내외하겠다고 결심이라도 하신 게 아니고서야 무슨.”
“…….”
그러나 오스턴은 칼같이 란델의 변명을 잘라냈다.
평소보다…… 아니, 평소에도 원래 저런 인간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왠지 더 신경질적인 태도에 란델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오스턴. 왜 이렇게 날이 서 있어?”
“제가요?”
“…….”
“제에가아요?”
“……아니, 됐다. 일이나 하지.”
란델의 물음에 오스턴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고개를 기이한 각도로 꺾었다.
란델은 황급히 그에게서 시선을 떼며 깃펜을 쥐고 서류에 시선을 떨궜다.
오스턴이 저러는 이유는 사실 생각해보면 뻔했기 때문에 굳이 더 물을 필요는 없을 듯해서였다.
‘건국제 때문에 바빠서 집에 못 간 지가 벌써 일주일째이니 심통이 난 거겠지.’
그러니까, 란델은 절대 오스턴의 기에 눌린 게 아니었다. 절대로.
사각사각.
그 후 한동안 집무실에는 종이 팔락이는 소리와 깃펜이 사각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서 보니 란델의 시선은 또다시 창밖으로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창밖의 왕후궁을 향해서.
‘……요즘 들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에델 2세가 물러나고, 란델이 즉위한 지도 벌써 1년.
즉위 전부터 백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그였으나, 즉위 후에는 그 지지가 더더욱 치솟았다.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윗선의 일 처리로 한층 나아진 삶 때문이었다.
물론 그 효율과 실용을 위해 란델을 비롯한 왕궁의 관리들은 매일매일 갈려나가고 있었지만, 웃으며 감사를 표하는 이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그 피로조차 다 날아갔다.
한 사람만 빼고…….
란델은 힐끔 오스턴의 눈치를 보고 다시 창밖을 기웃거렸다.
‘오늘 필리아랑 글레버 백작이 찾아온다고 했으니 더 그렇겠군.’
아무튼, 지금 란델의 관심사는 누가 뭐라고 해도 실비아였다.
그녀는 최근 들어 이따금 가라앉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많았다.
특히나 이제는 세이크린 후작이 된 필리아와 루베아가 방문하는 날이면 더욱 그러했다.
‘……아예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짐작이 맞다면 오히려 함부로 실비아에게 ‘당신이 요즘 따라 우울해 보인다’라고 말하며 이유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울해하는 실비아를 홀로 두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란델은 치열한 고민 끝에 양손을 깍지 껴 턱을 받치고 진지하게 오스턴을 돌아보았다.
“오스턴.”
“예?”
“거래를…….”
“안 합니다.”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거래를 하자’는 말조차 끝맺지 못한 란델이 황당한 어투로 대꾸했다.
그러나 오스턴은 서류에서 시선조차 떼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분명 저한테 업무를 떠넘기시려는 거겠죠. 하지만 안 합니다.”
“돈을…….”
“돈이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자식 얼굴 보는 것보다 중요합니까!”
몇 년 전의 오스턴이라면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내뱉지 않았을 말이었다.
란델은 그 놀라운 태도 전환에 뿌듯함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며 어떻게든 오스턴을 설득하려 애썼다.
“그…….”
“안 합니다!”
“…….”
“떽!”
“그래도 내가 국왕이다, 오스턴. 기회 잡았다고 날뛰지 마라.”
“옙.”
오스턴이 점점 더 감정을 실어 말을 내뱉자 란델이 정색했다.
오스턴 역시 언제 날뛰었냐는 듯 얌전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서류를 넘겼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심각하게 미간을 좁힌 란델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봉급 50골드 인상.”
움찔.
그 말에 종이 위를 거침없이 배회하던 오스턴의 깃펜이 찰나 움찔했다.
“70골드.”
움찔!
“100골드.”
덜걱!
귀가 팔랑이는 것으로 시작한 오스턴의 흔들림은 이내 전신으로 번져 의자를 덜컹거리게 했다.
란델은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쐐기를 박았다.
“건국제 업무 마무리 이후 일주일 휴가!”
그 순간, 란델의 몸 주위로 흰빛이 반짝이더니 그의 몸이 깜박이듯 사라졌다가 집무실 문 바깥 복도에 나타났다.
쿵!
앉은 자세 그대로 순간이동 당한 탓에 란델은 다음 순간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픔은 둘째 치고 당황한 그의 뒤로 오스턴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왜 아직도 안 가셨습니까! 빨리 나가십시오! 당장!”
쾅!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의 문이 매몰차게 닫혔다. 그리고 다시 벌컥 열렸다.
“아, 그리고 방금 하신 말씀은 마법구에 녹음해뒀으니 무를 생각 마십시오.”
콰앙!
덧붙이듯 당부한 오스턴이 다시 문을 닫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눈을 끔벅이던 란델이 이윽고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뒷머리를 긁적이는 그의 입으로 어리둥절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뭔가 쫓겨난 기분인데.”
그래도 내가 국왕인데……. 왕이 자기 집무실에서 보좌관 때문에 쫓겨나네…….
란델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그래도 덕분에 애초의 목적대로 하루 동안은 실비아의 옆에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
과정이 어찌 되었건, 오스턴과 성공적으로 거래를 마친 란델은 본궁을 벗어나 실비아가 기거하는 왕후궁으로 향했다.
본디 국왕은 본궁에서 생활하고, 왕후는 왕후궁에서 생활하며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마주치지 않는 게 보통인데.
란델은 그러한 관습을 깔끔히 무시하며 일이 끝나면 언제나 왕후궁으로 향해 그곳에서 잠을 청했다.
그러다 보니 사실상 본궁은 업무를 보는 궁으로 전락하고, 왕후궁은 국왕 부부의 생활 궁이 되었다.
관리들은 지금이라도 왕후궁의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 중이었지만, 그것까지는 란델이 모르는 일이었다.
란델은 아직 왕후궁이라는 이름을 지닌 실비아의 궁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이윽고 왕후궁의 정문이 시야에 들어올 정도의 거리에 다다랐을 때, 마침 필리아와 루베아가 돌아가려는 것인지 정문 앞에 나와 있었다.
란델은 무의식중에 발걸음을 멈추고 멀리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늘도 와줘서 고맙네, 세이크린 후. 글레버 백. 수도까지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닐 텐데…….”
실비아가 난감하게 눈썹을 누그러트리며 웃어 보였다.
그러자 루베아와 필리아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라도 숨 돌리는 거죠. 아니었으면 지금도 서류에 파묻혀 있었을걸요…….”
“맞습니다. 북부와 수도 사이에 신설된 이동 마법진 덕에 크게 번거롭지도 않고요. 게다가…….”
“빼-.”
그때 루베아의 품에 안겨 있던, 짧은 금발이 곱슬곱슬한 여아가 실비아를 향해 단풍잎 같은 손을 쭉 뻗었다.
루베아는 앞으로 기울어지려는 아이를 황급히 감싸 안으며 한숨처럼 웃었다.
“이레네가 일주일 넘게 왕후 폐하를 뵙지 못하면 온종일 저택이 떠나가라 울거든요. 그러니 좀 바쁘더라도 숨 돌릴 겸 이렇게 찾아오는 게 낫죠.”
“빼-하!”
루베아의 딸, 이레네가 방긋방긋 웃으며 그녀의 말을 따라 하고 실비아를 향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 보였다.
금빛 고수머리가 햇빛에 반짝이며 금가루처럼 빛났다.
반달 모양으로 휘어진 적갈색 눈이 오스턴을 꼭 빼닮았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필리아와 실비아의 입가에 동시에 미소가 떠올랐다.
필리아가 장난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애도 ‘엄마’ 대신 ‘폐하’라는 말을 먼저 배우는 게 아닌지 몰라. 물론 왕후 폐하께서는 더없이 훌륭한 분이시지만, 그래도 자식이 엄마보다 폐하를 먼저 부르면 좀 섭섭하지 않겠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글레버 백작님?”
필리아가 얄밉게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붙였으나 루베아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이레네의 눈을 가리고 싸늘하게 웃어 보였다.
“……세이크린 후작 영식 또한 꼭 그러길 바랍니다, 세이크린 후. 말씀하신 대로 왕후 폐하께서는 더없이 훌륭하신 분이니까요.”
“어머. 지금 설마 기분 상한 거예요? 쪼잔하게?”
“그럴 리가. 축복이었습니다만.”
“야, 입술에 침은 바르고 거짓말을 해!”
이제는 익숙해진 두 사람의 투덕거림을 구경하던 실비아가 아, 하며 걱정스럽게 필리아를 바라보았다.
“아, 시더스 경은 언제 데리러 온다고 하던가?”
“아마 지금쯤 왕궁 정문에서 안절부절못하면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혼자 갈 수 있다고 아무리 말려도 굳이 여기까지 데리러 온다니까요.”
“그래도 안 돼. 적어도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시더스 경과 함께 다녀. 대비할 수 있는 일은 대비하는 게 좋잖아. 아이도 그걸 바랄 테고.”
“확실히 그건 그렇네요. 좋은 말씀 감사해요, 공……. 아니, 왕후 폐하.”
슬슬 불러오는 배 위에 손을 얹은 필리아가 웃으며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실비아는 언제쯤 쓸데없는 예를 갖추는 걸 그만둘 거냐며 그녀를 가볍게 타박했다.
그들은 이후로도 왕후궁의 정문 앞에서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헤어졌다.
실비아는 나란히 떠나는 필리아와 루베아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조금 전과 달리 조금 멍해 보였다.
란델은 실비아가 한숨을 쉬는 것을 보고 발을 떼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저 왔습니다, 부인.”
그 목소리에 한발 늦게 란델을 발견한 실비아가 놀란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란델? 이 시간에는 어쩐 일이에요?”
“오스턴과의 협상에 성공했거든요.”
“세상에, 큰일을 해냈네요.”
란델이 상체를 숙여 실비아를 끌어안았다.
덩치 차이로 보면 그가 끌어안은 것이 맞는데, 숫제 그가 그녀에게 끌어안긴 듯한 태도였다.
실비아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의 등을 애정 어린 손길로 토닥였다.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비비던 란델이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물었다.
“어제부터 오늘 오전까지 사절단 맞이 때문에 정신이 없어 올 틈도 없었는데, 그동안 뭘 하셨습니까.”
“어제요? 음…….”
눈을 도르륵 굴리던 실비아가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작게 답했다.
“폐궁에서 잠깐 햇볕을 쐬면서 쉬었어요.”
“…….”
“좀 꺼림칙하긴 해도, 거기가 조용하긴 제일 조용하잖아요.”
마냥 기꺼운 답은 아니었으나, 확실히 폐궁이 왕궁에서 가장 조용하고 인적 드문 장소라는 것을 아는 란델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며 한숨을 삼켰다.
폐궁. 그곳은 다비드 데 켈마르 로클렌이 어릴 적 머물던 옛 왕자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옛 왕자궁이라기보다는 폐궁에 가깝긴 했다.
워낙에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궁인지라, 내년이면 허물기로 다른 이들과 합의하기도 했고.
‘……뭐, 그건 만났다기보다는 우연히 스쳐 지나갔다고 하는 편이 맞을 테니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실비아는 문득 어쩐지 한구석이 모자라 보이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던 금발의 이국인을 떠올렸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란델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추며 웃었다.
“그보다 여기서 이렇게 서 있지 말고 들어갈까요?”
“아, 혹시 피곤하십니까?”
“기껏해야 왕궁 내의 연구실이나 왔다 갔다 하는 내가 피곤할 게 뭐가 있어요. 당신 말이에요, 당신.”
실비아가 란델을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란델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얼굴 곳곳에 자잘하게 입 맞췄다.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렇다고 아침까지 괴롭히진 말아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긴 합니다만……. 오늘은 좀 다른 걸 해보고 싶네요.”
“뭔데요?”
란델을 놀리던 실비아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란델이 웃으며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에 도장을 찍듯 꾹 제 입술을 누르고는 해사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가보시지 않겠습니까? 둘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