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재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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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재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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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재회 (3)
2022.05.02.
란델과 실비아는 변복한 후 왕궁 밖으로 나섰다.
건국 기념일은 내일이라지만, 백성들의 축제는 건국 기념일 전후로 며칠씩 길게 이어지기에 거리는 한창 수선했다.
후드를 푹 눌러쓴 실비아가 란델과 맞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웃었다.
“부모님도 없이 당신과 이렇게 둘이서만 건국제에 참석하는 건 또 처음이네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드물게도 들뜬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의 생들에서는 굳이 건국 기념일 축제에 참석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이 거리를 지난다고 해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아무래도 백작 부부와 함께 나왔을 때는 본인의 관심사보다는 백작 부인의 관심사에 맞추어 행동해야 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실비아는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은 상태였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 절로 어린아이처럼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실비아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란델은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행이다.’
확실히 실비아의 기분이 아까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입가의 미소에는 그늘이 없었고, 두 눈이 쉼 없이 빛났다.
란델은 실비아의 기분이 나아졌다는 데 안도하는 동시에, 그녀에게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다는 것 또한 확신했다.
그는 실비아의 클로크 매듭을 단단히 고정해주며 속으로 다짐했다.
‘나중에 기분이 많이 나아졌을 때쯤 물어봐야겠다.’
매듭에서 손을 뗀 란델이 실비아의 손을 단단히 마주 잡으며 해사하게 웃었다.
“갈까요, 부인.”
“그래요.”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거리 곳곳을 구경했다.
백작 부인이 활을 쏘았던 곳은 여전히 같은 청년이 운영 중이었다.
실비아와 란델은 청년에게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조심하며 활을 쏘았고, 이번에는 란델이 청년을 울리며 특별 상품을 따냈다.
‘이번에는 진짜 정정당당한 경매에서 손에 넣은 건데!’라며 울부짖는 모습을 본 실비아는 그가 아주 조금 불쌍해졌다.
“선물입니다, 실비아.”
란델은 활 시합에서 따낸 목걸이를 실비아의 목에 둘러주었다.
란델은 이후로도 여러 경기에 참가해 우승 상품을 싹쓸이하고 그것을 죄다 실비아에게 안겨주었다.
나중에는 손가락과 손목, 목에 휘감긴 장신구가 너무 많아 새로운 장신구를 걸 자리가 없어질 정도였다.
“이제 그만해요, 란델.”
“하지만…….”
“……발목은 내버려둬요.”
“예…….”
지청구를 들은 란델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실비아의 빈 발목을 힐끔거렸다.
실비아가 이마를 짚었다.
이 정도면 다정도 병이었다. 장신구의 무게 때문에 목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그때 그녀의 시야에 문득 소담스레 피어난 연분홍 꽃이 들어왔다.
‘뭐지?’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저 꽃을 어디서 봤더라, 하고 미간을 찌푸리던 실비아가 놀라서 란델의 팔을 잡고 그를 휙 끌어당겼다.
“란델, 이쪽으로. 거기서 떨어져요.”
“실비아? 왜…….”
“당신, 세이렌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면서요. 필리아가 그러던데.”
실비아는 연신 불안한 눈으로 꽃집 가판대를 힐끔거렸다.
세이렌 꽃에 이렇듯 가까이 있으면 란델에게 좋지 않을…….
“없는데요.”
“……네?”
“어렸을 적에 필리아가 세이렌 꽃과 나뭇잎을 돌로 짓이겨 반죽해 제게 먹이려 들길래, 그걸 피하려 했던 말이었습니다만……. 그걸 아직도 믿고 있답니까?”
“…….”
“부인?”
란델이 어리둥절하게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실비아는 그의 말에 답할 생각도 못하고 속으로 부들거렸다.
‘필리아…….’
그 음산한 중얼거림에, 한창 북부로 돌아가는 중이던 필리아가 잠시 어깨를 떨었으나 실비아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차피 따져봐야 기억도 못 할 것 같긴 한데…….’
당시에 자신이 필리아의 그 한 마디에 얼마나 땅을 팠는지 돌이켜 생각하니 새삼 허탈해졌다.
실비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란델을 놓아주었다.
“그렇다니 차라리 다행이네요. 그럼 잠깐 구경하고 갈래요?”
“좋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쩌다가 필리아와 그런 대화를 하신 겁니까?”
“……알면 다쳐요.”
필리아의 그 한 마디 때문에 질투가 나서 그를 밀어냈었다는 이야기는 죽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것이다.
실비아는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며 꽃집 가판대 앞으로 다가갔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천천히 둘러봐요.”
가판대 뒤쪽에서 꽃을 손질하던 주인이 얼른 몸을 일으켜 두 사람을 맞이했다.
그녀가 입에 익어버린 듯한 말들을 줄줄이 뱉어냈다.
“신혼부부신가? 부인 미모에 우리 집 꽃들이 다 시들겠어요, 아주!”
“그렇게 된다면 배상하겠습니다.”
“……아주머니께서 장난치시는 거잖아요. 당신이 한술 더 뜨면 어떻게 해요.”
주인의 너스레에 란델이 진지하게 답하자 민망해진 실비아가 그를 밉지 않게 흘기며 팔을 툭 쳤다.
그러나 입가에는 어쩔 수 없는 미소가 피어났다.
“……!”
그때 장난스레 웃고 있던 란델이 돌연 고개를 휙 돌렸다.
그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연녹색 눈이 가늘어지더니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 저편을 빤히 바라보았다.
“란델? 왜 그래요?”
실비아는 란델의 태도에서 심상찮음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혹시 싶어 기감을 일으켜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달리 위험한 기운은 감지되지 않았기에 더욱 의아했다.
란델은 실비아의 목소리에 아차 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가 고민하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실비아.”
“네?”
“별건 아닙니다만, 잠깐 확인해보고 싶은 일이 생겨서요.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위험한 일은 아니죠?”
“맹세코 아닙니다.”
“알았어요. 다녀와서 말해줘야 해요.”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실비아 역시 선선히 그를 보내주기로 했다.
란델은 떠나기 전, 꽃집 주인에게 작은 동전 주머니를 건넸다.
주인은 묵직한 주머니에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이, 이건 너무 많아요! 부인께서 집은 꽃은 하나면 충분한데요.”
“다른 꽃들의 값에 더해,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잠시 부인을 살펴주시오. 이건 그 값이오.”
“……알겠습니다.”
란델의 말에 갈등하던 꽃집 주인이 결국 고개를 숙이며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란델은 실비아를 한 번 끌어안고 인파 틈으로 사라졌다.
잠시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실비아의 곁으로 꽃집 주인이 팔을 걷어붙이며 다가왔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요, 앉아! 이쪽에 의자를 놔줄 테니 편히 구경해요.”
그 정도는 부담스럽지 않았기에 실비아는 감사를 표하며 주인이 꺼내준 의자에 앉았다.
이런저런 꽃들을 섞어 꽃다발을 만드는 일은 꽤 재밌었고 보람 있었다.
실비아는 꽃다발 만들기에 한동안 푹 빠져 있었다.
“자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냐! 건국제를 기념해서 내 오늘 내일만 특별히! 아주 특별히 반값에 미래를 점쳐드리지!”
그러다가 문득 귓가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실비아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었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점술사?”
실비아가 앉은 거리의 맞은편에서 큰 소리로 호객하는 이는 분명 벨포르 영지에서 보았던 점술사였다.
기운이 심상치 않던, 란델에게 ‘기구한 영혼’이라는 말을 건넸던 이.
‘……설마 그때부터 란델이 클레온이라는 걸 알아보고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실비아는 그때 점술사 할멈이 한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아보기 위해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갔다.
점술사는 실비아가 제게 다가오자 화색을 띠며 손짓했다.
“어서 오시게! 뭐가 궁금하신가? 애인과의 궁합? 아니면…… 어라.”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후드 아래의 얼굴 또한 선명해졌다.
점술사는 실비아의 얼굴을 보고 눈을 끔벅이다가, 다음 순간 벌떡 일어나더니 헐레벌떡 달아났다.
“음?”
대체 왜 도망가는 거지?
의아해하던 실비아는 우선 점술사를 붙잡기로 했다.
그녀가 클로크 아래로 손을 살짝 휘두르자 점술사의 망토가 못에 걸린 것처럼 허공에 고정되었다.
철푸덕!
“이, 이게 뭐여!”
발이 꼬여 바닥에 엎어진 점술사는 누군가에게 붙들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망토를 붙들고 낑낑댔다.
그사이, 실비아는 느긋이 걸어 점술사의 앞에 다다라 쪼그려 앉았다.
“할머니.”
“이게 어디서 늙은이 취급이야! 언니라고 불러!”
“……언니, 왜 도망가세요?”
“그러는 너는 왜 쫓아오냐! 난 잘못한 것 없어! 수도로 자리를 옮긴 건 장사가 잘 안 돼서 그런 거라고!”
그 말로 인해 실비아는 이 점술사가 북부에서 자신과 란델을 만났던 일을 기억한다고 확신했다.
그녀가 후드를 살짝 더 뒤로 젖히고 물었다.
“저도 언니를 잡으려고 찾아온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때 해주셨던 말씀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요.”
“엉? 그때 해줬던 말?”
“네. 분명 제 남편한테 ‘기구한 영혼’이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네.”
“모르겠는데.”
“잘 기억해보세요.”
“기억 안 나.”
점술사가 모르쇠로 일관하자 실비아가 슥 고개를 돌려 거리 곳곳을 순찰하는 경비대를 바라보았다.
점술사가 역정을 내며 미간을 좁혔다.
“썩을! 좀 기다려봐, 망할 것아! 그러니까…….”
투덜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점술사의 말이 멎은 것은 그때였다.
그녀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뻣뻣이 굳어지고 두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언니?”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실비아가 경계심을 바짝 세우며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굳어졌던 점술사의 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박하기 짝이 없던 태도와 달리 더없이 차분하고 진중한 움직임이었다.
점술사가 몸을 돌려 실비아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초점이 나간 두 눈에서 기이한 안광이 흘렀다.
실비아가 클로크 아래로 마력을 움직이려는 순간.
“……오랜만이구나, 죄 많은 영혼아.”
남자인지, 여자인지. 노인인지, 아이인지 알 수 없는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금색 눈이 부릅떠졌다.
어떻게 저 목소리를 잊을 수 있을까. 대체 어떻게.
실비아가 숨도 쉬지 못하고 굳어진 사이, 점술사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이젠 그렇게 부르면 안 되겠군.”
“…….”
“알리사라고 불러야겠구나.”
더는 착각이라고 부정할 수도 없어졌다.
실비아는 목이 졸린 사람처럼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실낱같은 부름이 허공에 스며들었다.
“……신?”
* * *
한편, 실비아의 곁을 떠난 란델은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그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급히 달아나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확실해.’
조금 전, 란델은 꽃집 앞에 서 있던 실비아를 주시하는 시선을 눈치채고는 그를 쫓는 중이었다.
살의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인파 틈으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란델에게는 충분한 경계의 대상이었다.
위험을 대비해서 나쁠 일은 없으니까.
란델은 사신처럼 클로크 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골목을 가로질렀다.
이윽고 골목 저 끝에서 뒷모습을 보인 채 다급하게 달아나는, 그와 비슷한 형식의 클로크를 입고 있는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상대는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었고, 란델은 큰 보폭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으나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어딜 도망가.”
결국 란델의 손이 우악스럽게 상대의 어깨를 잡아채었다.
상대가 반사적으로 반항했으나 그는 손쉽게 그를 찍어 눌렀다.
“대체 누구길래…….”
란델은 바닥에 엎어진 채 퍼덕거리는 인영을 노려보며 그가 쓰고 있는 후드를 휙 뒤로 젖혔다.
그 직후 연녹색 눈이 놀람으로 동그래졌다.
“……라드니 왕자?”
“아, 씁! 팔! 팔! 이러다가 팔 부러지겠습니다!”
실비아를 주시하던 수상한 인영.
그는 낮에도 란델과 한차례 인사를 나누었던, 라드니의 왕자 트레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