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 재회 (4) (115/118)


외전 4. 재회 (4)
2022.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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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드니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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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씁! 팔! 팔! 이러다가 팔 부러지겠습니다!”

란델의 입에서 얼떨떨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바닥에 엎어진 채 그에게 팔을 붙들린 트레반이 다급하게 외치며 손을 비틀었다.

어찌 된 일인지 혼란스럽긴 했지만, 이미 정체를 들킨 이상 그가 허튼짓을 할 것 같진 않았다.

주위에 달리 호위를 숨겨둔 것도 아닌 듯했고.

결국 란델은 약간의 경계심을 남겨둔 채 트레반의 위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트레반이 앓는 소리를 흘리며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는 짧은 새에 벌겋게 달아오른 제 손목을 돌려보더니 감탄 아닌 감탄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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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폐하께서는 힘이 정말 세시네요. 라드니에서도 장정 대여섯은 달려들어야 저랑 힘겨루기가 되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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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내가 국왕이라는 걸 눈치채고 뒤를 밟았던 건가? 이유가 뭐지?”

그러거나 말거나, 란델의 눈에 서려 있던 경계심은 두 배로 짙어졌다.

트레반이 그 말을 듣고 대번에 펄쩍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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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뒤를 밟다니, 그런 거 아닙니다! 저는 수도 구경을 나왔다가 우연히 요정님을 다시 마주친 게 기뻐서 말을 걸어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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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님?”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미궁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란델이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한편, 울컥해서 저도 모르게 ‘요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트레반은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물을 틈이 있을까 싶어 용기를 내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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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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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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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요정님과 무슨 관계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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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요정, 요정 하는데 대체 그게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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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곁에 서 있던 여성분 말입니다!”

그 말에 란델은 순간 누군가에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댕- 하고 종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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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실비아를 말하는 건가?

트레반이 말하는 ‘요정’에 실비아를 대입하자 그제야 어느 정도 그가 하는 말이 이해가 갔다.

물론 그와 별개로 트레반의 저 과도하게 반짝이는 눈빛은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란델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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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 어떤 의미로는 맞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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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렇죠! 외진 궁에서 햇볕을 받으며 휴식을 취하시던 모습이 딱! 요정이었다니까요!”

트레반은 란델의 표정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몽롱한 눈길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실비아를 찬양하던 그가 시선을 휙 돌려 란델을 응시했다.

바다를 닮은 푸른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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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정님과는 무슨 관계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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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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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란델은 제가 느꼈던, 머리를 한 대 맞는 듯한 감각을 그대로 트레반에게 돌려주었다.

꽤 효과적이었는지 트레반의 턱이 툭 떨어졌다.

그가 눈을 댕그랗게 뜨고 더듬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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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설마 그럼 저분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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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바레스의 왕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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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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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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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트레반이 연달아 숨 들이켜는 소리를 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어깨가 조금씩 내려앉았다. 눈썹도 함께였다.

그 모습을 본 란델은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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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군.’

저 왕자, 실비아에게 과할 정도로 관심이 많다. 그것도 이성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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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막아설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인가.’

란델이 한숨을 삼켰다.

그가 아무리 신하들과 함께 죽도록 노력하고 있다지만, 아직 엘바레스는 외부적으로도, 내부적으로도 완전히 안정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주요 인접국 중 하나인 라드니의 왕자와 불화를 빚어서 좋을 건 없다.

라드니가 아무리 지난번의 패전으로 인해 위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벌어지면 엘바레스 역시 무고한 백성의 피를 흘려야 함이 확실했으므로.

란델이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표정을 가다듬던 차였다.

시무룩하게 시선을 떨구고 있던 트레반이 별안간 고개를 치켜들더니 의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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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래도 사람 일은 관에 눕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라고 했으니까 노력하겠습니다! 이혼이랑 재혼이라는 합리적인 제도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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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 미친 자식아?”

결국 란델의 입에서 막을 새도 없이 험한 말이 튀어 나갔다.

한 나라의 국왕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격 없는 말이었다.

* * *

한편, 실비아는 점술사…… 그러니까 점술사의 껍데기를 쓴 신의 뒤를 따라 걷는 중이었다.

그녀는 검은 망토에 휩싸인 뒷모습을 시야에 담으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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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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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와라. 보여줄 게 있으니까.

 
신이 처음 제 존재를 드러냈을 때.

실비아는 충격으로 인해 탄식조차 내뱉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신은 그런 그녀에게 담담히 한마디를 건네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실비아는 얼떨결에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침묵을 틈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기자 당황에 밀려났던 억울함이 스멀스멀 제자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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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제 와서.’

이미 실비아는 신이 내린 죗값을 모두 치렀다.

그렇게 간신히 평화를 되찾았는데, 또다시 실비아의 앞에 나타난 신의 존재는 그녀로 하여금 본능적인 두려움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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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됐잖아.’

당신은 대체 얼마나 더 내 삶에 간섭해야 만족할 텐가.

실비아의 눈빛이 점점 매서워졌다.

손에 힘이 들어가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혹 자신이 마족과의 평화 협정을 주도한 것 때문에 신의 심기를 거스른 건가, 하는 생각이 찰나 머릿속을 스쳤다.

마족과 어둠은 신의 축복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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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타고난 본능을 억누르고, 다른 존재와 화합하기 위해 노력하는 생명까지 모조리 내치려 드는 이를 과연 모든 생명의 어버이라는 ‘신’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적어도 실비아의 생각에서 이 신이라는 작자는 랭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속에서 울분이 치받쳐 그녀가 무어라 한 마디 쏘아붙이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차.

신이 한발 먼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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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왔다.”

실비아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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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고개를 든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미간을 설핏 일그러트렸다.

신이 실비아를 데리고 온 곳은 축제 거리와 연결된, 한 음습한 뒷골목이었다.

이런 곳에서 대체 뭘 보여주겠다는 걸까.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신이 손을 들어 골목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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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길 보아라.”

실비아는 신이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골목 끄트머리에 웅크리고 앉은, 바싹 말라 부스러진 낙엽 같은 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걸인은 응달 끄트머리에 앉아 축제 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한 발만 내디디면 환한 햇빛이 비치는 축제 거리로 나설 수 있건만, 그것을 꺼리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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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알아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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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미심쩍은 표정의 실비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어서 덤덤히 덧붙여진 신의 말에 그녀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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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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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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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네 첫 삶에서 너를 배신했던 동료 중 하나의 환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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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

한번 발끝까지 떨어졌던 심장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귓가를 울리는 박동은 점점 크고 빨라졌다.

그에 따라 숨이 가빠왔다.

걸인에게 시선을 사로잡힌 실비아의 곁에서, 신이 무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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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리사’를 합심해 죽였던 이들에게도 비슷한 벌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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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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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처럼 전생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또다시 제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누군가를 해친다면 끝없이 환생하며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도록.”

수없는 생을 거친 후에야 처음으로 알게 된 이야기에 머리가 온통 멍했다.

실비아가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는 중에도 신의 말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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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해럴드 저자는 이번 생에서 꽤 부유한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났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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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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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치는 친동생과 재산을 나누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동생을 죽였고, 그것을 부모에게 들켜 가문에서 제적당하고 거리로 내쫓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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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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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살았다면 이번 생을 끝으로 죄를 청산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언뜻 듣기에는 안타깝다는 듯한 어조였다.

하지만 신의 말속에 든 것은 지독한 무심함이었다.

실비아는 그 칼날 같은 말에 반응해 고개를 돌렸다.

그에 맞추어 신 또한 고개를 돌려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물음이 귓가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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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원망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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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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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저들이 너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너 또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테니, 모든 잘못이 저들에게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

실비아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신의 추측은 사실이었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답을 바란 물음은 아닌 듯했다.

신이 형형한,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눈으로 툭 말을 꺼냈다.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설명하듯 따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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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중요한 것은 너희의 감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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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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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해한, 본래라면 죽지 않아도 되었을 무고한 영혼의 수지.”

우습게도 실비아는 그 말을 듣자 이해하고 말았다.

왜 신이 그녀에게 가장 무거운 벌을 내렸는지.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납득한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신이 아니라 한갓 인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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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실비아는 이를 갈지 않으려 노력하며 가까스로 말을 뱉어냈다.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터무니없는 말들이 귓가로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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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에게 더 무거운 벌을 내렸다고 하여 저들을 너보다 더 아낀다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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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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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앞장서서 인간을 구하고 다녔던 너를 더 아꼈다면 아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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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끝끝내 분노가 두려움을 이겼다.

실비아의 잇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잠시간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신은 분노에 차 웃는 실비아의 얼굴을 보았음에도 한 점 동요 없이 말을 맺었다.

그것이 더없이 소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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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네가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그 아이와의 계약이 끝난 이번에도 비슷한 시간대에 환생시켜준 것이 아닌가.”

‘그 아이.’ 아마 란델을 뜻하는 말이겠지.

란델의 얼굴을 떠올리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심호흡한 후 신보다 더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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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어, 이 빌어먹을 작자야.”

그 말에, 내내 도자기 같던 신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라고 할 만한 것이 생겼다.

듬성듬성한 눈썹이 미세하게나마 꿈틀한 것이었다.

실비아는 이를 악물고 상체를 기울였다.

신과 코앞에서 눈을 맞춘 그녀가 한 자 한 자 짓씹듯 그의 귀에 말을 때려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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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받는 사람이 그걸 ‘사랑’이라고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혼자만의 이기심과 만족에 불과한 거야. 그러니 감히 내 앞에서, 나를 더 사랑해서 그랬다느니 하는 말은 지껄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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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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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란델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건 우리의 의지 때문이지, 당신의 그 빌어먹을 사랑과 자비 때문이 아니니까. 알아들어?”

신은 실비아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내비치지 않았다.

분노도, 죄책감도. 그 어떤 것도.

단지 얼마일지 모를 시간이 흐른 후, 언제나와 다름없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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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갈까.”

어차피 해야 할 말은 다 했으니 미련은 없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기도 했고.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신은 말없이 걸음을 옮겨 축제 거리 쪽으로 돌아왔다.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고, 웃음소리가 넘쳤다.

마치 그들만이 잠시 세상에서 동떨어진 시간을 살다 온 듯한 기묘한 감각이 일었다.

신이 망토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다가 문득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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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굳이 만나러 올 생각은 아니었다만……. 마침 내 힘을 조금이나마 나누어 받은 영혼이 근처에 있기에 온 것이다. 알려주어야 할 것은 다 전한 것 같군. 그리고.”

후드 아래로 초점 없는 눈이 실비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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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과거의 기억 때문에 아직도 괴로움을 느낀다면 내가 지워주겠다. 그 아이의 것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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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에 실비아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의 말은 꼭 그녀가 최근 느끼는 감정을 죄다 꿰뚫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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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줄리엣.

두 번째 생에서 만났던 그녀의 딸.

그 아이가 마음에 남아서.

실비아는 국왕 부부의 의무 중 후계를 잇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연신 아이를 갖기를 주저했다.

필리아와 루베아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사랑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줄리엣을 지키지 못했던 자신이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에 괴로움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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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하지.”

실비아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신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기색으로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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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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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괴로웠던 순간도 많지만, 그렇기에 더 빛났던 행복의 순간까지 잊고 싶지는 않아.”

불행을 지우겠다는 이유로, 이따금 모래 사이에서 발견한 조개껍데기처럼 반짝이는 기억들까지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삶의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길 것. 그리고 언제나 최선을 다할 것.

그것이 실비아가 긴긴 생을 거쳐 깨달은 사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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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억을 잃으면 무지하게 당신을 찬양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싫고.”

마지막 말에는 약간의 도발과 비아냥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후환이 두려워져 실비아는 힐끔 신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감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존재라 그런가.

신은 의외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담담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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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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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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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세상에 마족도 나돌아 다니는데 불신자가 나돌아 다니지 못할 것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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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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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거라.”

그 인사를 끝으로 신이 눈을 감았다.

점술사의 몸에서 신이 떠나며 그녀의 몸이 휘청 기울어지는 것을 실비아가 받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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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잠시간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때 들려온 목소리가 복잡한 심경을 한 번에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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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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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델.”

실비아는 환히 웃으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선택한, 그리고 그녀를 선택해 긴 시간을 함께 견뎌온 이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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