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재회 (5) 2022.05.09.
마침내 새 왕의 즉위 후 첫 번째 건국 기념일 전날 밤. 가면무도회였다. 귀족들과 사절단은 사용인들의 안내에 따라 제각기 다른 입구에서 가면을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족도, 연인도 예외는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예외가 존재했다. 바로 가면무도회의 주최자인 국왕 부부였다.
“뭔가 신기한 기분이네. 잠깐이긴 하지만 가면무도회에 가면 없이 참석한다는 게.”
“축사도 하셔야 하고, ‘그’ 일도 설명하셔야 하니까요. 그래도 그 이후로는 폐하께서도 무도회를 즐기실 수 있을 테니 너무 아쉬워 마세요.”
델마가 실비아의 치맛자락을 정리해주며 빙긋 웃었다. 실비아가 거울 너머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자네가 ‘폐하’라고 할 때마다 아직도 어색하다니까.”
“어쩜 부부라지만 이런 점까지 닮으셨는지. 안 그래도 어제인가, 국왕 폐하께서 오스턴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아직도 호칭에 익숙해지지 못하셨다고요.”
“정말인가?”
“예. 하지만 두 분 다 말로는 엄살을 피우셔도 이제는 이렇게 번듯한 무도회에서 사절단 맞이도 하시고…….”
델마의 눈시울이 문득 젖어 들었다. 델마는 실비아와 란델이 그간 얼마나 많은 일을 겪어 왔는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그 많은 일을 겪고도 여전히 다정하고 강인한.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빛나는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자 가슴이 사무치도록 벅찼다. 코가 시큰해졌다.
“이 늙은이는 충분히 자신감을 가지셔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왕후 폐하께서도, 국왕 폐하께서도요.”
“……고맙네, 델마.”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 실비아는 설명 한 조각 없어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델마의 마음에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델마는 살짝 촉촉해진 눈가를 손끝으로 훔치며 웃었다.
“준비는 끝났으니 이만 나가보시지요. 제가 왕후 폐하를 더 늦게 보내드렸다가는 국왕 폐하께서 말라 죽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실비아가 픽 웃음을 흘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위엄 있는 차림새의 란델이 기다리고 있다가 냉큼 손을 내밀었다. 그의 눈매가 사르르 휘어졌다.
“오늘도 언제나 그랬듯이 아름다우십니다.”
연녹색 눈에서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 벨포르 공작성에서부터 내내 두 사람을 보필해왔던 사용인들조차 볼을 붉히게 할 정도로 다정한 표정이었다. 실비아가 피식 웃으며 란델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가 그를 따라 하듯 곱게 눈을 휘었다.
“폐하께서도요.”
“……혹시 누가 제가 그 호칭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라도 한 겁니까?”
“이만 가요. 이러다가 무도회가 아예 다 끝나버리겠어요.”
멈칫한 란델이 되물었으나 실비아는 모른 척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이내 무도회장의 입구 앞에 섰다. 시종이 큰 소리로 그들의 입장을 알렸다.
“란델 데 메이너드 벨포르 폐하와 실비아 데 플로레트 벨포르 폐하께서 드십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이름들이 귓가를 울리는 동시에 문이 열렸다. 무도회를 즐기던 사람들이 양옆으로 물러나 단상까지 길을 만들어주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란델과 실비아는 손을 맞잡은 채 사람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그들이 곁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 사이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새로운 벨포르 국왕 부처의 미모가 대단하다는 건 그저 소문이라 여겼는데.’
‘오히려 소문이 실제를 다 담아내지 못한 감이 있군.’
국왕 부부의 외모에 관한 이야기처럼, 엘바레스 왕국도 어쩌면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 대단한 나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은근히 엘바레스를 평가절하 하던 사절단들의 어깨가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사이 란델과 실비아는 단상에 올라섰다. 란델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진중한 목소리를 냈다.
“모두 고개를 들라.”
듣는 사람을 집중시키는, 듣기 좋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무도회장을 가득 울렸다.
“이렇듯 많은 이들이 엘바레스의 경사를 함께 축하하기 위해 방문해주었다는 사실이 기쁘기 그지없군. 부디 머무는 동안 마음껏 즐기길 바라네.”
란델이 그리 말하며 싱그럽게 웃었다. 짧은 박수가 지나가고 실비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몰랐겠지만, 오늘 무도회에는 특별히 초대한 손님들이 함께하고 있었다네.”
딱! 실비아가 말을 맺으며 손가락을 소리 나게 튕겼다. 그러자 가면을 쓴 사람 중, 몇의 몸 주위로 흰빛이 어렸다. 사람들이 놀라서 그들에게서 물러났다. 흰빛에 휘감긴 이들이 하나둘 가면을 벗었다. 빛이 사그라듦에 따라 그들의 피부색은 보랏빛으로 물들어갔으며, 눈은 붉게 변했다.
“마족……?”
무도회에 참석한 이들에게서 숨죽인 탄성이 새어 나왔다. 특히나 조금 전까지 마족과 함께 춤을 추고 있던 사람들은 눈이 동그래진 채 제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실비아가 웃으며 설명했다.
“저들은 미리 준비된 마법 약을 마시고 무도회에 참석했지. 혹시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저들이 마족이라는 걸 눈치챈 이가 있나?”
“…….”
사람들은 답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마족들의 외양을 변화시켰던 마법이 풀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상대가 ‘마족’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 정도로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란델과는 다른, 그러나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것은 똑같은 실비아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마족과의 평화 협정에 아직도 불신, 불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네.”
“…….”
“하지만 어떤가? 정말 저들이 우리와 그렇게까지 다르던가?”
“…….”
“나는 자네들이 적어도 한 번은 편견 없이 대화를 나눠봤으면 해.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바뀔 테니까.”
란델과 실비아는 거기까지 말한 뒤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들이 몇몇 사절단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사람들은 조심스럽게나마 마족들에게 하나둘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는 약간의 경계심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대화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계심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감탄과 호감이 메웠다. 하여 마족들의 정체가 드러난 이후로 외려 무도회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활기차졌다. 란델과 실비아도 덩달아 흥분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세상에. 말을 많이 해서 목이 따끔거리는 건 또 처음이네.”
실비아는 결국 중간에 슬쩍 무도회장을 빠져나왔다. 워낙 많은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목소리가 갈라질 지경이었다. 실비아가 숨을 돌리며 테라스에 비치된 물을 잔에 따라 홀짝일 때였다. 똑똑. 커튼 너머로 누군가 테라스의 문을 두드렸다. 실비아는 놀라는 기색 없이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들어와요.”
허락이 떨어지자 테라스의 문이 열렸다. 커튼 사이로 커다란 꽃다발을 품에 안은, 긴장한 얼굴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누군가 했더니. 실비아는 그가 일전에 폐궁에서 잠시 마주쳤던 라드니의 왕자라는 걸 알아보고 의아한 눈을 했다. 그녀는 애초에 무도회장에서부터 누군가의 끈질긴 시선이 느껴져서 일부러 란델을 두고 테라스로 빠져나온 것이었다. 혹 제게 악의가 있는 사람인가 싶어 그리한 것인데.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붉은 얼굴에. 꽃다발이라니.
‘……이건 또 예상 못 했네.’
실비아는 우선 예의상의 미소를 띠고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무슨 일인가, 트레반 왕자?”
“헉. 이, 이름이.”
실비아의 목소리로 듣는 제 이름에 트레반의 어깨가 화드득 튀어 올랐다. 그가 이제는 빨강에 가까워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며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트레반은 이내 심호흡을 하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는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애쓰며 진지한 눈빛으로 실비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미쳤냐며 펄쩍 뛰는 버본을 상대로 열 번 넘게 연습했던 말이 마침내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왕후 폐하.”
“…….”
“누군가는 이 마음을 가볍다 여길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마음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좋아합니다.”
실비아는 제게 고백하는 트레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연푸른 눈은 더없이 진중했고, 젊은 날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트레반의 말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비아는 이따금 정말로 첫눈에 운명처럼 끌리는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탓하지 않았다. 대신 담담한 태도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진심에는 진심으로 답하는 것이 사람에 대한 예의니까.
“미안하네.”
“…….”
“난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이가 아닌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래서 자네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네.”
그리고 실비아의 예상대로, 그녀의 거절을 들은 트레반 역시 크게 실망한 기색 없이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상대의 마음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온 마음을 다한 고백이 거절당했다면, 그것을 정리하는 것 또한 그의 몫이었다.
“……확실히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 그래도 꽃다발은 두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애초에 폐하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니까요.”
“그래. 고맙네.”
“그럼 부디 편히 쉬시길. 물러가겠습니다.”
트레반은 고개를 깊이 숙인 후, 고백을 위해 벗어두었던 가면을 쓰고 테라스에서 돌아 나왔다. 짧았다고 하여 그 마음의 무게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코끝이 시큰거리는 느낌에 그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처음으로 느껴본 사랑, 그리고 거절은 생각보다도 훨씬 쓰라렸다. 트레반이 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울적하게 발을 재촉할 때였다. 서두른 탓인지 반질반질한 무도회장 바닥 위로 발이 휙 미끄러졌다.
“어……!”
이건 확실히 넘어진다. 그가 그렇게 예상하며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그의 팔을 잡아 멈췄다.
“괜찮아요?”
“어?”
트레반은 허공에서 몸이 멈춰 서자 얼떨떨하게 눈을 떴다. 그러자 가면을 쓴 여자 한 명이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트레반은 여자의 도움으로 제자리에 바로 섰다. 그가 뒤늦게나마 가슴에 한 손을 얹고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도움에 감사드립…….”
“혹시 고마우면 저랑 춤 한 번만 춰줄 수 있나요?”
“……예?”
갑작스러운 말에 트레반이 눈을 끔벅였다. 여자가 아, 하며 덧붙였다.
“오해하진 말아요. 아까부터 웬 미친놈이 자꾸 수작을 부려서……. 젠장, 저기 또 오네.”
“하하! 거기 계셨군요!”
저 멀리서 능글능글한 목소리의 남자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는 다급한 마음에 트레반의 손을 휙 잡아채고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눈을 빛냈다.
“미안해요. 대답을 기다릴 시간이 없네. 나랑 춤 한 번만 춥시다.”
트레반은 그렇게 얼떨결에 무도회장 중앙으로 끌려갔다. 그는 아직도 약간의 혼란에 빠진 채로 여자와 춤을 췄다.
‘……뭐지?’
어쩐지 귓가를 울리는 심장 소리가 조금씩 빨라졌다. 고민하던 트레반은 아까 넘어질 뻔해서 그런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의구심을 갈무리했다. 세상에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있지만, 본인이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사랑의 시작도 있다는 걸 아직 모르기에 한 생각이었다. * * * 이후 실비아는 잠시 제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가면을 썼다. 무도회장에 입장하기 전, 란델과 한 가지 내기를 해서였다.
-할 일을 끝마치고 나면 저랑 내기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무슨 내기요?
-가발과 가면을 쓰고, 옷도 갈아입고 무도회장으로 돌아와 누가 먼저 상대를 알아보고 다가오는지요. 먼저 눈치챈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겁니다.
흥미를 느낀 실비아는 란델의 제안에 응했다. 그녀는 완벽함을 위해 금색 가발을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법으로 눈 색까지 푸르게 바꿨다.
“……뭔가 익숙한 느낌인데.”
거울을 보던 실비아는 어쩐지 변장한 모습이 익숙해 보인다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착각이겠거니 하고 가면을 썼다. 아무리 란델이라도 눈 색까지 바꿨는데 자신을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실비아는 약간의 뿌듯함을 느끼고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아직 안 왔나?’
그녀는 치맛자락을 정리하는 척 주위를 티 나지 않게 흘끔거렸다. 아직 ‘란델’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란델의 준비 시간이 저보다 길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던 차에.
“……!”
인파 너머로,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상대의 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자신이 변장한 모습을 익숙하게 여겼는지 상대를 보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실비아가 한숨을 쉬듯 웃었다. 란델은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긴 가발을 쓰고 있었다. 오스턴의 마법 약을 마신 것인지 가면 너머로 보이는 눈은 따듯한 갈색이었다.
‘미리 말을 맞춘 것도 아닌데.’
실비아는 새삼 그들 사이에 이런 내기가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발을 떼어 란델에게 다가갔다. 란델 역시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도 한숨 같은 미소가 스며들어 있었다.
“당신이죠?”
“당신이네요.”
“무승부……라고 해야겠죠, 아무래도?”
실비아가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란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주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승부를 내기에 좋은 밤은 아닌 것 같으니, 즐길까요.”
“좋아요.”
실비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란델과 손을 맞잡았다. 상처가 있어도 괜찮다. 시간이 흐르고 꽃잎이, 낙엽이, 눈이 쌓이면. 그 위에 새 그림을 그려나가면 되니까. 언제까지나, 함께.
* * * 다음 날. 실비아가 건국 기념일 오찬 자리에서 헛구역질한 후 뛰쳐나갔고, 그 뒤를 란델이 황급히 따랐으며. 덕분에 엘바레스에 후계자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아주 빠르게, 그리고 더없이 멀리까지 퍼져나갔다는 것은 두 사람이 아직 모르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