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어떤 날엔 대리운전 기사 노릇까지 했다. 약간의 수고비를 받기는 했다. 하나 남들이 버는 만큼 받은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카페는 나날이 번창했다. 술에 취하면 안전하게 운전까지 해서 귀가시켜 주니 왜 안 그렇겠는가!
사장이 괜히 운전 학원비를 내준 게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현수는 신장 184㎝, 몸무게 76㎏이다.
마르지도 찌지도 않은 적당한 체격이다.
게다가 잘생겼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서글서글한 마스크를 지녀 제법 많은 여학생들이 좋아했다.
현수를 보기 위해 히야신스에 죽치는 죽순이들까지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아무튼 현수는 바쁘게 오가며 빵도 굽고, 요리도 하며, 때론 바리스타(Barista) 대신 에스프레소도 만들어냈다.
바쁠 땐 홀 서빙도 했다.
그러다가 잠깐이라도 틈이 나면 앞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전공 서적을 펼쳐 들고 조금이라도 더 공부하려고 애를 썼다.
그 모습이 보기에 좋았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대학을 졸업한 후 여러 회사에 지원 서류를 제출했지만 모두 물먹었다. 이때까지의 전적은 53전 53패였다.
실망스러웠다. 하나 좌절하지는 않았다.
삼류 대학 수학과 출신의 취직이 잘될 것이라곤 생각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후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춘천에 있는 102보충대였다. 여기서 신병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배치 받은 곳이 화천에 소재한 27사단 이기자 부대였다. 대한민국 육군 가운데 훈련 많기로 소문난 바로 그 부대이다.
어떤 이들은 해병대와 맞먹을 만큼 힘들다고 하기도 했다.
진짜 훈련에 훈련이 거듭되었다. 눈을 뜨면 훈련이고, 밥을 먹고 나면 훈련이었다. 어떤 날엔 밤에도 훈련을 했다.
현수는 낙오하여 다른 병사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다른 것들은 다 평범했지만 딱 한 가지만은 다른 병사들과 달랐다. 그것은 사격이다.
주간 사격은 25m 영점 사격과 100m, 200m, 250m 사격으로 분류되어 있다. 야간 사격은 50m 사격이다.
주간 사격은 20발 중 18발 이상, 야간 사격은 10발 중 9발 이상 명중해야 특등 사수가 된다.
그런데 현수는 20발이 아니라 200발을 쏴도 모두 명중했다. 이는 야간도 마찬가지였다.
이병 말에 사단에서 저격 교육을 이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또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치고 복귀하니 원래 있던 수색대가 아닌 다른 곳으로 파견 나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간 곳이 국방과학연구소 소화기 개발 연구팀이다.
이곳은 K―2를 개발해 낸 곳이다.
가보니 시험장이 있는데 현수의 임무는 총을 쏘는 것이었다.
새로 개발되는 것의 시험 사격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사용되는 소총과 권총으로 하루 종일 사격만 했다.
덕분에 청력에 문제가 생긴 듯하다. 가끔 이명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럴 때면 골치가 아프곤 한다.
어쨌거나 그러다 제대를 했고, 그때부터 입사지원서를 작성하느라 애를 썼다.
매번 물을 먹어 부모님을 뵐 낯이 없는 나날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후임을 길에서 만났다.
현수가 제대할 때 갓 일병을 달았던 친구가 휴가를 나온 것이다. 제대 후 처음 만나는 후임인지라 한걸음에 다가가 와락 껴안았다.
같이 있는 동안 현수는 후임을 잘 대해줬다.
때리지도 않았고, 얼차려를 시키지도 않았다. 못되게 굴지도 않았으며, 갈구지도 않았다.
진심 어린 대화를 통해 인간관계를 돈독히 했을 뿐이다.
후임 역시 진심으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왜 대낮에 직장에 안 있고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느냐며 웃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예쁜 아가씨가 붙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만 후임의 데이트를 망친 기분이었다. 하여 대강 얼버무리고 나중을 기약하려 했다.
그런데 후임이 여자친구에게 내일 만나자고 하고는 돌려보냈다. 그리곤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했다.
그래서 같이 술을 마셨다.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졸업 전인 후임을 위해 직업 구하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우니 지금부터라도 잘 준비하라는 조언을 했다.
후임은 알았노라고 대답하며 웃었다. 그리곤 헤어졌다.
다음날, 후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문을 보니 천지건설(주)에서 직원을 뽑는다는 광고가 있다면서 지원했느냐고 물었다.
현수가 다닌 학교의 졸업생은 거의 뽑지 않는 것이 재벌사들의 공통점이다.
일류 대학 출신들도 취직이 어려울 정도인데 굳이 삼류 대학 출신을 뽑아서 쓰려 하겠는가!
천지건설(주)은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천지그룹의 계열사라 광고를 보았지만 원서를 쓰지는 않았다.
보나마나 떨어질 것이 뻔하다는 느낌이 든 때문이다.
그래도 후임은 제법 많은 인원을 뽑으니 미친 척하고 지원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현수는 관심을 가져주어 고맙다고 말하고는 머뭇거리다가 지원 서류를 제출했다.
안 되도 할 수 없고, 되면 좋은 거 아닌가!
왕복 차비와 사진 한 장 손해 볼 셈 친 것이다.
며칠 후, 서류 전형을 통과하였다는 문자를 받았다.
필기시험은 며칠 후에 본다고 한다. 시험 과목은 영어와 일반 상식, 딱 두 과목이다.
상식이야 그간 여러 번 시험 보는 동안 쌓일 만큼 쌓였지만 영어가 문제였다. 토익을 준비하느라 몇 달간 학원엘 다녔는데 아직 한 번도 700점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필기시험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지원자들의 스펙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때문이다.
그들 거의 대부분이 일류 대학 출신들이라 하였다.
아무튼 시험을 보러 갔다.
그런데 문제가 지금껏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영국의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의 끝부분에 있는 재판 과정이 지문이다.
그런데 한 줄 건너 하나씩 빈 줄로 되어 있다. 이것들을 채워 넣는 것이 문제이다. 단어가 아닌 문장을 써 넣는 것이다.
현수는 사상 최초로 영어 시험을 보면서 눈빛을 빛냈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리포트 알바를 한 바 있다. 그것은 베니스의 상인을 읽고 독후감을 쓰라는 것이었다.
모 대학 영문과 2학년의 과제였다. 당연히 본문은 영어로 되어 있었고, 리포트 역시 영어로 써야 했다.
현수는 모르는 단어와 숙어를 찾아가며 본문을 해석했다.
해석이 안 되는 것은 한글로 번역되어 있는 소설책을 참고했다. 그 덕에 간신히 리포트를 작성할 수 있었다.
받은 돈보다 들인 수고가 훨씬 더 많은 알바였기에 기억에 남는 일이다.
아무튼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후반부 재판 과정에 있다. 그렇기에 상당 부분이 기억난다.
하여 나름대로의 정답을 써 넣었다.
다시 며칠 후, 필기시험마저 통과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당연할 것이다. 현수의 답안은 거의 원본과 같았던 것이다.
남은 것은 면접시험이다.
긴장되었지만 면접 보는 날 현수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면접관이 묻는다.
“흐음! 그러고 보니 수학을 전공하셨군요. 우리 회사는 김현수 씨가 전공한 수학과는 별 연관이 없는데 어떤 동기로 입사를 지원하셨습니까?”
어떻게 면접관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할까?
현수는 내심 이번에도 떨어졌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나 나름대로 논리적인 대답을 했다.
사흘 후, 놀랍게도 최종 합격하였다는 통보를 받았다.
확인하러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았다.
중간쯤 김현수라는 성명 석 자가 보였다.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하마터면 PC방에서 눈물을 보일 뻔했다.
자세한 내용을 보니 다음 주 월요일부터 12박 13일 예정으로 신입사원 연수 교육이 준비되어 있다. 현수는 남들보다 부족함을 알기에 열심히 교육을 받았다.
연수를 마치고 배치 받은 곳은 자재과였다.
현수는 자신의 사수라 할 수 있는 곽인만 대리의 조수로서 공사 현장에서 사용될 각종 자재에 대한 검품을 하러 다녔다.
예전 같으면 뇌물과 리베이트가 성행했을 곳이 자재과이다. 하나 이젠 다르다.
실수하면 본사 홈페이지에 항의하는 글이 올라간다. 그러면 감사팀에서 즉각적인 조사를 한다.
그래서 예전과 달리 목에 힘을 주는 게 아니라 아주 공손한 태도를 일관하여야 한다.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이 상부의 지시였다.
그렇게 회사를 다니다가 우연히 업무지원팀 강연희 대리를 보게 되었다. 입사는 2년 선배이지만 나이는 한 살 어리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현수는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찰랑찰랑한 생머리, 갸름한 얼굴, 오뚝한 콧날, 사슴의 그것 같은 눈망울, 야리야리한 입술, 불룩 솟은 가슴, 잘록한 허리, 거기에 쪽 뻗은 각선미가 한눈에 들어온 때문이다.
그냥 섹시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아하고 청순하며, 고고하며 백치미까지 엿보인다.
자신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모르는지 강 대리는 동료와 대화하며 현수의 곁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때 향긋하면서도 그윽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텔레비전을 켜면 수많은 아름다운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런 그녀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을 미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강연희 대리는 천지건설(주) 최고의 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회사를 광고하는 CF를 찍기도 했다.
당연히 수많은 늑대들의 목표물이다.
그 가운데 가장 설치고 다니는 놈은 입사 4년차로 곧 과장 진급을 한다고 소문난 박진영 대리이다.
박 대리는 실력을 인정받아 직급은 대리이지만 구조계산팀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또한 실세인 전무이사의 아들이기도 하다.
박준태 전무이사는 회장 부인인 박금순 여사의 동생이다. 다시 말해 천지건설(주) 회장과 처남 매부 사이이다.
박 대리는 회장의 처조카인 것이다.
그런 그가 강연희에게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어 다른 사원들은 강 대리에게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현수는 업무 때문에 강 대리가 소속된 업무지원팀을 가끔 방문한다. 그런데 현수의 사수인 곽인만 대리는 기혼자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강 대리의 협조가 필요할 때면 늘 현수를 보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현수는 영화나 한 편 볼까 싶어 극장을 찾았다. 그때 우연히 강연희 대리를 만나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고, 둘은 같이 영화를 봤다. 그리곤 식사를 하면서 가볍게 술을 한잔 마셨다.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강 대리는 현수가 일하던 히야신스 앞 여대 출신이었다. 덕분에 화제가 풍부해졌다.
그 다음 주 주말엔 북한산 등반을 같이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엔 청계산을 올랐다.
그렇게 관악산과 삼각산, 운악산과 화악산까지 점령하는 동안 둘이 연애한다는 소문이 났다.
산행을 하다 우연히 같은 회사 직원들을 만난 결과이다.
연희의 속내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수는 강 대리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
연희는 얼굴이 예쁘고 몸매만 좋은 게 아니다.
대화를 해보니 진솔하고 상냥하다. 게다가 예의 바르고 착하기까지 하다.
이런 여자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괜히 천지건설(주)의 비너스라는 소문이 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둘은 연애하는 것이 아니다.
등산을 좋아하는데 혼자서 하기 두렵다기에 동행해 주는 것뿐이다. 일종의 보디가드 역할을 한 것이다.
둘은 ‘강 대리님’이라는 호칭과 ‘김현수 씨’라는 호칭으로 서로에게 깍듯한 존칭을 사용한다.
세상에 이런 연인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소문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수는 박진영 대리의 방문을 받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좋은 일로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박 대리는 얼마 전 납품을 결정한 자재에 대해 따질 것이 있다고 한다. 물어보니 구조계산팀에서 요구한 강도에 훨씬 못 미치는 제품인데 왜 그걸로 결정했느냐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현수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사수인 곽 대리가 나름대로 고심 끝에 낙점했던 것이다.
현수는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며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하나 박 대리는 물고 늘어졌다.
검품 업무를 맡은 곳이 자재과이며, 현수는 현장 직원이므로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번 납품 건으로 문제가 발생될 경우 사직서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고 겁박을 주었다.
그 주 주말, 현수는 연희와 더불어 양평의 용문산에 다녀왔다. 이미 약속되어 있던 것이다.
월요일 오후가 되자 박 대리가 호출한다.
구조계산팀에 가보니 결정된 자재에 대한 여러 가지 시험이 진행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겉보기엔 그럴듯하지만 품질 면에서 뒤떨어지니 납품 결정을 취소하라는 것이다.
즉시 사수인 곽 대리에게 보고를 했다.
그런데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현수는 자칫 징계당할 수 있으니 납품업체를 변경하자는 의견을 꺼냈다.
그러자 곽 대리는 구조계산팀과의 힘겨루기에서 져줄 마음이 없으니 예정대로 진행하라고 하였다.
둘 사이에 끼었다고 느낀 현수는 궁여지책으로 납품하기로 한 자재회사를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