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그리곤 제품의 질을 높여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러자 곤란해하더니 납품 단가를 올려달라는 요구를 한다. 아니면 계약서에 기록된 대로 납품하겠다고 한다.
현수로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여름휴가 시즌이 다가왔다.
하나 현수는 휴가를 떠날 수 없었다. 박 대리가 으르렁거리고, 곽 대리가 튕기는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2장 9월에 받은 여름휴가
진땀 나던 휴가 시즌이 모두 끝나 회사 분위기가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그제야 곽 대리가 휴가를 써먹으라는 말을 했다. 그렇기에 9월 초에야 여름휴가를 낸 것이다.
휴가를 떠나기 전 곽 대리는 박 대리의 견제가 자신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현수를 겨냥했던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이번 휴가 때 혹시라도 현수가 연희와 같이 휴가를 갈까 싶어 일부러 그랬다는 것이다.
배알이 틀렸다. 차라리 대놓고 강 대리에게 집적거리지 말라고 했다면 알았다 하고 물러났을 것이다.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엄연한 선배 사원이 아닌가!
그녀에게 호감은 있지만 대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런데 박 대리는 치졸하게도 업무를 핑계로 속을 긁을 대로 긁었다.
사실 이번 일로 현수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여 날마다 신문 광고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잘리면 갈 곳을 미리 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휴가가 결정된 날 현수는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유념하면 좋은 글귀라 생각합니다.
휴가 잘 보내길……. ―구조계산팀 박진영.
현수는 부화가 치솟았으나 어쩌겠는가!
박 대리는 엄연한 상사이고, 나이도 많다. 그렇기에 이를 악물었을 뿐이다.
내심 포기하고 있던 휴가였기에 현수에겐 계획이 없었다. 하여 원룸에서 뒹굴었다.
현수는 취직을 해서 독립한 것이 아니다. 군대를 다녀와 보니 살던 집이 재개발된다고 헐렸다.
현수네는 전세를 살았었다. 보증금은 돌려받았지만 인근에서 세를 얻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갑작스레 살던 집들이 사라졌으니 수요가 많아진 탓이다.
게다가 돌려받은 보증금 가운데 일부는 현수가 학자금 융자받았던 것을 상환하는 데 썼다고 한다.
하여 경기도 김포시에 소재한 조그만 연립주택 지하 셋방으로 이사하였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9평이 조금 안 된다고 한다.
세 식구가 살기엔 집이 너무 좁다.
또한 출퇴근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하여 할 수 없이 회사 근처에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20만 원짜리 원룸을 얻었다.
이 집 역시 좁다. 게다가 햇볕도 잘 들지 않고 바람도 잘 통하지 않는다. 하여 덥고 짜증이 났다.
마음 같아선 에어컨을 펑펑 틀고 싶지만 전기 요금 고지서가 두려워 하루에 고작 두어 시간 트는 게 전부였다.
나머진 뜨뜻한 바람을 뿜어내는 선풍기가 담당했다.
이럴 때 예쁜 각시라도 있다면 달콤하고 시원한 수박화채라도 만들어 더위를 식히도록 했을 것이다.
하나 불행히도 현수는 곰팡내 나는 무적의 솔로 부대원이다. 그래서 주말만 되면 이 산 저 산을 돌아다녔던 것이다.
그렇게 빈둥거리던 중 문득 태백산맥에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시원하게 땀이라도 흘리고 나면 꽉 막힌 심사가 스르르 풀어질 것만 같아서이다.
그리고 어제, 그러니까 휴가 둘째 날 덕항산 초입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그 결과 이처럼 이름 모를 산등성이에 조난당해 앉아 있는 것이다.
“휴우! 복권에 당첨되거나 하늘에서 금덩이 같은 게 툭 떨어졌으면 좋겠다. 그럼 빌어먹을 회사 때려치우고 만날 산이나 타게. 쩝, 그나저나 비가 오려나?”
구름이 점점 진해진다는 느낌에 현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산이 없으니 비 피할 곳을 강구하기 위함이다.
덕항산 초입에서 보았던 관광 안내판엔 근처에 여러 동굴들이 있다고 되어 있었다.
환선굴, 대금굴, 대이동굴, 관음굴이 그것이다.
찾기만 하면 비를 피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러려면 먼저 여기가 어딘 줄 알아야 찾아갈 것이 아닌가!
현재로선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흐음, 일단 골짜기로 내려가 볼까? 아냐. 비가 오면 골짜기의 물이 불어 위험할 수도 있어.”
홀로 중얼거린 현수는 무작정 앞으로 나아갔다.
태백산맥이 크기는 하다. 하나 웬만해선 한여름에 조난당해 죽을 일은 없는 곳이다.
호랑이, 곰, 늑대 같은 흉포한 산짐승은 오래전에 멸종당했을 것이니 똑바로만 가면 큰일은 겪지 않을 것이다. 무협 소설에 종종 나오는 절벽도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삼십여 분 정도 전진을 했다. 길이 없기에 나뭇가지에 긁히기도 하였지만 생채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툭! 툭! 투툭! 투투툭! 투투투툭……!
“으윽! 비?”
모자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낀 현수는 재빨리 전후좌우를 둘러보았다. 첫 빗방울이 굵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피하지 않으면 물에 젖은 생쥐처럼 팬티까지 몽땅 젖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현재 현수가 있는 곳은 아주 좁은 협곡의 산허리 부근이다.
그렇기에 우거진 녹음 사이로 옆 봉우리까지 살필 수 있는 위치였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중 눈에 뜨이는 곳이 있다.
“아! 저기!”
바로 옆 봉우리 아래쪽 계곡 부근에 계류가 흐르고 있다.
그러다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는데 그 옆이 움푹 파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투툭! 투투투툭……!
금세 빗방울이 조금 더 굵어진 느낌이다.
하여 얼른 발을 놀렸다. 서두르느라 미끄러지기도 했지만 다행히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인적이 드물어 그런지 부드러운 부엽토가 땅거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현수가 언뜻 본 것은 진짜였다. 오는 내내 울창한 수림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동굴이 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짐을 느끼고 서둘러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빗줄기가 더욱 굵어지면서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쏴아아아아아아……!
“휴우! 하마터면…….”
10초만 늦었어도 속옷까지 모두 젖을 엄청난 폭우다.
나직이 안도의 한숨을 쉰 현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계곡 물이 불어 안으로 물이 들이치면 재수없게도 산속에서 익사하는 경우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동굴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위쪽으로 경사져 있다.
이 정도면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물에 잠기는 일은 없을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그러고 보니 달려오느라 땀이 났는지 젖은 느낌이 든다. 하여 옷을 살펴보니 벌써 반 이상 젖어 있다.
체온이 떨어지면 감기에 걸릴 수 있으므로 수건을 꺼내 닦고는 얼른 갈아입었다. 그러면서 가랑비에 속옷 젖는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생각을 했다. 별로 비를 맞은 것 같지 않았는데도 상당히 많이 젖었던 것이다.
잠시 후, 현수는 버너에 불을 붙였다. 또 라면을 끓이려는 것이다. 그리곤 새삼 주변을 둘러보았다.
끝없이 이어졌으면 좋았을 동굴은 애석하게도 그 길이가 불과 30m를 넘지 않았다.
석순이랄지 기타 기기묘묘한 암석이 있거나 호수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흙이 움푹 파여 있는 정도이다.
별다른 흥미를 못 느낀 현수는 라면 하나를 뚝딱 해치웠다. 그리곤 남은 물을 끓여 커피 한 잔을 만들었다.
그리고 보니 줄기차게 울어대던 매미라는 놈들의 합창 소리가 뚝 끊겨 있다.
“짜식들, 쌤통이다. 후후!”
비에 젖어 꼼짝도 못하고 있을 매미를 떠올린 현수는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그리곤 물끄러미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폭우다.
“조금만 늦었으면 이 비를 다 맞았을 거 아냐? 진짜 다행이네. 그나저나 언제 그치지? 설마 여기서 밤을 새워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그 설마가 사람을 잡을 모양이다.
시간이 흘러 오후 7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빗줄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해가 떨어질 것이다.
현수는 편평한 바닥을 찾아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이동할 수 없으니 하룻밤 잘 생각을 한 것이다.
텐트는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쳤다.
부드러운 흙을 골고루 펼쳐 놓았기에 오늘은 어제 같이 등이 배겨 잠 못 자는 고생을 하진 않을 것이다.
저녁 식사는 또 라면이다.
뜨거운 국물을 훌훌 불어 마시니 그제야 속이 풀리는 것 같다. 어제 마신 술로부터 이제야 해방된 것이다.
커피까지 마시고 나니 할 일이 없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잠이나 일찍 자자는 생각에 몸을 뉘였다.
한데 잠이 오질 않는다. 너무 시끄럽기 때문이다.
빗소리와 폭포 쏟아지는 소리가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데 어찌 잠이 오겠는가!
“젠장, 빌어먹을 비는 밤새 오려는 모양인가?”
나직이 투덜거린 현수는 가스 랜턴을 꺼내 불을 밝히곤 배낭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김현석 작가가 지은 ‘신화창조’라는 소설이다.
현수는 못 배운 부모를 만나 평생 동안 가난하게 살았다. 그래서 못해본 거, 못 먹어본 것, 못 가본 곳이 너무나 많다.
스키장은 물론이고 눈썰매장도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다.
이태리 식당이나 프랑스 요리를 하는 레스토랑은 가본 적도 없다.
그나마 일식은 천지건설(주)에 입사한 후 접대를 받느라 두어 번 가보았다. 그때마다 회를 먹었는데 매양 먹던 것이 아니라 그런지 비린내가 느껴져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몇 번이나 가보았을 제주도도 한 번 못 가보았다. 뿐만이 아니다. 서울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설악산, 지리산, 속리산, 내장산도 아직 한 번도 못 가봤다.
그런 데 놀러 갈 형편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수는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이 늘 불만족스러웠다.
돈이라는 것이 없어서 늘 욕구를 억눌러야 했으니 어찌 만족스러웠겠는가!
그런 그에게 있어 신화창조라는 소설은 대리만족 내지는 심리적 충족감을 느끼게 하는 글이다.
하여 읽고 또 읽고 하는 중이다.
인터넷에서 신화창조의 텍스트를 불법 다운로드를 받아 핸드폰에 넣고 다닐 수도 있다.
하나 그러지 않았다.
작가도 먹고살아야 하는 사회의 구성원인데 그가 애써 써내려 간 것을 공짜로 읽는 게 결코 바람직스럽다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마음 먹고 전질을 샀다. 덕분에 한 달 용돈의 절반이 후딱 날아갔다.
아무튼 신화창조는 현실에선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종의 기적 같은 이야기이다.
현수도 다른 사람들처럼 기적을 좋아한다.
게다가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도 김현수이다.
그렇기에 읽을 때마다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너무도 좋다.
그런데 이제 너무 많이 읽었나 보다.
아무 데나 펼쳐 들었는데도 그다음 내용이 뭔지 떠오르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펼쳤던 책을 도로 접고는 또다시 멍한 시선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어둠이 다가왔는지 밖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다.
“로또 복권은 아무리 사도 당첨되지 않고……. 제기랄! 평생 이러고 살아야 하나?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오로지 일, 일, 일! 평생 일만 하면서…….”
나직한 투덜거림에 이어 또다시 중얼거린다.
“에이, 하늘에서 금덩이라도 확 떨어졌으면 좋겠네. 그럼… 헉! 이, 이건 대체 뭐지?”
갑자기 눈앞의 공간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인다. 술도 마시지 않았기에 자신의 눈이 잘못되었나 싶어 눈을 비볐다. 그런데도 공간이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고정시킨 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순간, 무언가가 일렁이던 공간을 통하여 빠져나왔다.
땡그랑 ! 떼구루루!
“……!”
무언가가 떨어지자 일렁이던 공간의 움직임이 사라졌다.
현수는 얼른 가스 랜턴의 조절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실내가 금방 대낮처럼 밝아진다.
“이, 이건 뭐지?”
조심스럽게 집어 든 것은 폭이 5㎝, 직경은 15㎝, 두께는 1㎝ 정도 되는 속이 빈 원통형 물체이다.
안과 밖에 기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고, 빨강과 검은색 보석 비슷한 것이 한 개씩 박혀 있다.
이것들은 지름이 약 1㎝ 정도 되었다.
가운데엔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모두 보석 비슷한 것이 박혀 있었던 자리처럼 보인다.
랜턴에 비춰 보니 삼각형과 사각형, 원과 타원 등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그리고 처음 보는 문자 같은 것들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흐음, 이게 뭐지? 머리에 쓰는 건 아닌 것 같고… 팔찌인가? 아냐. 그러기엔 너무 굵어. 혹시 발에 끼우는 건가?”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용도를 알 수 없다. 그러던 중 저도 모르게 왼쪽 팔을 그것에 넣어보았다.
그 순간이다!
스르르르릉 !
지금껏 멀쩡하던 팔찌 비슷한 것이 갑작스레 줄어든다.
빼려고 했으나 어느새 팔뚝 굵기에 근접해 빠지지 않는다.
“어어! 이, 이거 왜 이래?”
화들짝 놀란 현수는 얼른 배낭을 뒤졌다. 비누를 찾기 위함이다. 의도한 것이 손에 잡히자 즉시 밖으로 향했다.
빗물을 받아 비누 거품을 만들 요량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사방이 환해진다.
번쩍 !
콰쾅! 콰콰콰콰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