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그걸 다 팔면 11억 6천 정도 될 것이다.
현재의 급여라면 29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저축해야 모을 수 있는 엄청난 거금이다.
“아! 이거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현수는 자신이 꿈꾸고 있는 것으로 자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안타까운 탄식을 토했다.
“하긴… 꿈이니까 이런 게 내 손에 잡히지, 현실 같으면 이런 걸 구경이나 하겠어?”
현수는 자조적인 심정으로 금화를 뒤집어가며 이리저리 살폈다.
카이엔 제국의 상징인 듯한 나무 잎사귀 사이로 한 자루 장검과 마법사의 스태프가 교차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근데 이거 진짜 금일까? 이익!”
이빨 사이에 끼고 씹어보았다.
“헉……! 진짜잖아?”
금화엔 뚜렷한 이빨 자국이 났다. 진짜 순금으로 만든 것인 듯하다.
“제길, 꿈이 아니라면 이걸 팔면 좋을 텐데. 두 개만 가져가도 일 년은 충분히 먹고살 수 있으니.”
나직이 투덜거린 현수는 다시 아공간에 손을 넣었다. 이번엔 은화를 떠올린 것이다.
“크기는 비슷하네.”
새로 주조한 듯 깨끗해 보이는 은화 역시 금화와 크기가 비슷했다. 하지만 무게는 금화에 비해 현저히 가벼웠다.
그도 그럴 것이, 금은 비중이 0.0518㎤/g이지만 은(銀)은 0.0952㎤/g이다. 따라서 부피는 같지만 무게는 절반에 가까운 118g쯤 된다.
“가만, 은도 요즘 값이 엄청 올랐다고 하던데, 이걸 팔면 얼마나 받을까?”
시세대로 하면 은화 하나당 가격은 18만 원쯤 된다.
“근데 이건 몇 개나 들었지?”
아공간에 손을 넣어 대충 헤아려 본 현수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은화는 1,000개 정도 있다. 그렇다면 1억 8천만 원 정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꿈이라는 것이 또 떠올랐다.
“제기랄! 이건 그림의 떡, 아니, 꿈속의 보물이군. 그나저나 전능의 팔찌에 끼울 보석함이 있다고 했지?”
손을 넣으며 이번엔 길쭉한 보석함을 떠올렸다.
곧 부드러운 벨벳 같은 천으로 싸인 것이 손에 잡힌다.
“우와아! 이건 뭐… 예술이군!”
뚜껑을 연 현수는 감탄사를 먼저 토했다.
영롱하게 빛나는 여러 색깔 보석이 눈에 뜨인 때문이다.
아홉 개의 구멍이 있는데 빨주노초파남보, 검정, 검정으로 채워 넣게 되어 있다.
현재는 맨 위의 것과 맨 아래만 비어 있다.
“주황과 노랑은 잘 모르겠는데 이건 사파이어고, 이건 에메랄드인 건가?”
초록과 파란 보석을 부드럽게 만져보며 중얼거렸다.
물론 색깔은 그것들과 비슷하다. 하나 이것들은 단순한 보석이 아니다.
최상급 가운데에서도 특급에 해당되는 마나석을 솜씨 좋은 드워프 장인들이 온 정성을 다해 깎아내고 연마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일단 이걸 끼우라고 했지?”
현수는 조심스런 손길로 보석들을 꺼내 전능의 팔찌에 끼웠다. 접착제도 없건만 가까이 대는 것만으로도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갔다.
혹시 빠질까 싶어 뽑아내려 하였으나 꼼짝도 하지 않는다.
“우와! 이건 진짜 멋있네! 예술이다, 예술이야!”
각종 보석이 박혀 영롱한 빛을 내고 있는데 그 사이사이에 새겨진 문양에 빛이 스며들자 환상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현수는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며 전능의 팔찌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이때 멀린의 음성이 들린다.
“아공간을 열어 전능의 팔찌를 완성시켰군. 1써클을 이룬 걸 경하하네. 그간 애 썼네. 하지만 지금부터는 더 열심히 마법을 연마해야 하네. 그리하여 속히 5써클에 이르게. 그래야 자네가 나를 도울 수 있으니.”
“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지요. 근데 어디에 계십니까? 목소리는 들리는데 이젠 모습이 뵈질 않습니다. 혹시 투명 은신 마법을 쓰셨습니까?”
“아니네. 이건 채널 어브 디멘션이란 마법으로 차원 간 통신이 가능하게 해주는 마법이네.”
“아! 그렇군요. 대단하십니다. 차원 간의 통신을 실현시키시다니…….”
“자네도 9써클 마스터에 이르면 가능하네.”
“어휴! 제가 언제 그렇게 되겠습니까?”
“뭐든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되지. 안 그런가?”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앞으론 하루 종일 오로지 마법에만 매달려야 하는데 가능한가?”
“매일 밤 꿈에서 연마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가요?”
“꿈……? 자넨 나와의 대화가 단순한 꿈이라 생각하나?”
“제가 멀린 대마법사님을 만나는 거 자체가 꿈 아닙니까?”
멀린은 현수의 말을 곡해했다. 자신으로부터 가르침을 얻는 일이 꿈같은 것이라 여긴다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별말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물론이네. 그러니 하루 종일 연마할 수 있도록 하게나.”
“그럼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데요?”
현수는 꿈이기에 가볍게 생각하고 대답했다.
“자네의 성취가 늦으면 늦을수록 아드리안 공국 백성들의 목숨이 사라지게 되네. 기왕 도운다고 하였으니 최선을 다해줬으면 좋겠네.”
“으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현수는 다른 생각을 했다.
‘꿈인데 뭔들 못하겠어? 해달라는데 까짓것 해주지.’
하나 멀린 입장에선 아니다. 고맙기 이를 데 없는 대답이다. 하여 감격에 찬 음성을 냈다.
“아아! 고맙고 또 고맙네. 나중에 꼭 보답을 하겠네. 어쨌든 먼저 안전하게 지낼 곳을 찾아보게.”
“안전하게 지낼 곳이요?”
“그래.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곳. 그곳에 결계를 치고 타임 딜레이 마법을 실현시키게. 그곳에서 마법을 수련하면 되네.”
“저어… 말씀 중에 죄송한데, 타임 딜레이 마법은 제가 5써클에 이르러야 가능한 거 아닌가요?”
“그렇다네. 그건 5써클 마법이지. 하나 내가 누군가? 전능의 팔찌만 있으면 1써클의 마나량이라도 그걸 발현시킬 수 있도록 해놓았다네.”
“그럼 트랜스퍼 디멘션 마법은 왜 5써클에 해당하는 마나량이 있어야 하는 건가요?”
“타임 딜레이는 5써클 마법이지만 트랜스퍼 디멘션은 9써클 마법이네. 그래서 그렇지.”
“아! 그렇군요. 그럼 전능의 팔찌에 있는 것 가운데 차원 이동 마법과 아공간 속의 아공간을 제외하곤 1써클만 이뤄도 사용할 수 있는 거네요.”
“그렇다네. 자아, 이게 궁금증이 덜해졌으면 얼른 안전한 장소를 물색해 주게. 모든 것이 준비된 후에 팔찌에 마나를 넣으면 내가 나타날 것이네.”
“근데 음색이 조금 피곤한 듯합니다. 어디 편찮으세요?”
“으음! 조금 그렇다네. 마나의 사용량이 너무 많은 듯하네. 자, 그럼 이만 통신을 끊네.”
말을 마친 멀린은 먼저 통신을 끊었다.
* * *
후손으로부터 구조 요청을 받은 직후 멀린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도울 방법을.
후손들이 애써 이룩한 아드리안 공국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하여 어떤 방법이든 쓸 생각이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전능의 팔찌이다.
이것을 만드느라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곤 레어 안의 거의 모든 물건을 아공간에 넣어 보냈다.
이제 얼마 후면 마나의 품에 안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깟 물품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멀린은 공국을 위기로부터 구해줄 은인에게 모든 것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하여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담아 보낸 것이다.
처음 이것을 보낼 때 까마득한 옛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아더와 원탁의 기사들이 회합을 하던 카멜롯(Camelot) 성의 회합실로 전능의 팔찌를 보내려 한 것이다.
멀린은 한때 어깨를 나란히 했던 아더(Arthur)를 비롯하여 란슬롯(Lancelot), 갤러해드(Galahad), 퍼시발(Percival), 보어(Bors), 펠리노어(Pellinor), 거웨인(Gawain), 케이(Kay), 베디베어(Bedivere), 가레스(Gareth), 가헤리스(Gaheris), 모드레드(Mordred)를 떠올렸다.
그 이름도 찬란한 원탁의 기사들이다.
세월이 오래 흘렀지만 그들의 후손 가운데 하나가 왕국을 이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라면 말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너무 오래되었는지 카멜롯 성의 좌표가 가물가물했다. 지구를 떠난 뒤 단 한 번도 되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기억을 쥐어짜 결국엔 좌표를 생각해 냈다.
괜히 대마법사 아닌 것이다.
그런데 12자리 숫자 네 쌍으로 되어 있는 좌표의 숫자 가운데 하나가 틀렸다.
덕분에 전능의 팔찌가 현수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어쨌거나 멀린은 일련의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마나를 소모하였다. 하여 수명을 상당히 깎아먹었다.
덕분에 급격한 노화 현상을 겪는 중이다.
처음 전능의 팔찌를 만들기 시작했을 땐 속은 늙었지만 적어도 겉은 20대였다.
팔찌가 완성되었을 땐 60대의 외모로 보였다. 이후 팔찌를 지구로 보내 현수를 처음 만났을 땐 80대가 되었다.
오늘 차원 간 통신을 마친 멀린은 90세를 넘어 100세에 가까운 호호백발이 되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현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미러 이미지(Mirrior Image)라는 환상 마법은 쓸 수 없다.
마나 소모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멀린은 자신의 수명이 깎여 세상과 일찍 하직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드리안 공국을 구하고 싶다.
그래서 다급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했는데 현수가 제대로 받아들였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는가?
답답하지만 최선을 다해주리라 믿는 수밖에.
마음 같아선 확인하고 싶지만 그러려면 얼마 남지도 않는 마나를 소진해야 한다.
게다가 곧 깨달을 것인데 그걸 설명하느라 귀한 마나를 소모시키고 싶지 않다.
남은 마나는 더 귀한 일을 하는 데 쓰여야 한다. 그래서 용건만 간단히 하고 통신을 끊은 것이다.
다음날, 곤한 잠에서 깨어난 현수는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상념이 있어 웃음 지었다.
꿈이지만 지구상에 단 하나뿐인 1써클 마법사가 되었었다는 것이 즐거웠던 것이다.
“우하하하! 마나여, 화살이 되어 나의 적을 무찔러라! 파이어 애로우(Fire Arrow)!”
1써클을 이룬 후 딱 하나 배운 마법이다.
슈우우욱 !
콰아앙!
“헉! 이, 이런……!”
손끝을 통해 무언가가 빠져나간다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화염으로 만들어진 화살이 쏜살처럼 쏘아져 갔다.
그것은 콘크리트 벽과 충돌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커튼 옆이다. 화살이 뭉개지면서 불이 붙었다.
현수는 화들짝 놀랐다.
하나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다. 대형 화재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얼른 컵에 담겨 있던 물을 끼얹어 불을 껐다.
다행히 초기였기에 불은 금방 꺼졌다.
현수는 놀란 가슴에 털썩 주저앉았다.
“헐! 내, 내가… 진짜 마법사가 된 거야? 말도 안 돼! 꿈이었는데… 헐! 이걸 뭐로 설명하지?”
막 무언인가를 생각하려 할 때이다.
쾅쾅! 쾅쾅 !
“손님! 손님!”
요란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네에, 나갑니다.”
팬티 바람이던 현수는 헐레벌떡 옷을 입었다. 그리곤 서둘러 객실의 문을 열었다.
“손님, 무슨 일입니까?”
“네?”
“방금 전의 굉음……. 그거 뭡니까?”
현수는 시치미를 떼기로 마음먹었다. 파이어 애로우를 무슨 수로 설명한단 말인가?
마법사라는 것을 밝히면 되겠지만 그럼 분명 문제가 된다. 방송국에서 취재하러 오겠다고 법석을 떨 것이다.
그걸로 끝나면 좋다.
유명세를 타게 될 것이고, 돈도 조금 벌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가 기관의 개입이다. 마법을 연구하겠다고 달려들거나 요원이 되라는 협박을 가할 수도 있다.
어쩌면 암살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걸 평범한 현수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여 모르는 척하였다.
“아, 조금 전의 그 굉음이요? 저도 듣긴 들었는데… 글쎄요? 그거 다른 데서 난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분명 손님의 객실에서 난 소리입니다.”
“네에?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지금 현재 이 모텔엔 손님방에만 사람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손님의 방은 제 사무실 바로 옆입니다.”
“아! 그런가요? 근데 제 일행도 있잖아요.”
“그 여자 분이요? 그분은 산책한다고 아까 나가셨거든요.”
“아……!”
“손님, 죄송하지만 객실 좀 살펴봐야겠습니다.”
“네? 그, 그건…….”
“미안합니다.”
종업원은 현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날카로운 시선으로 객실 전체를 훑어보았다.
가끔 객실에 들어서는 못된 짓을 하는 손님들이 있다.
시트를 찢어놓거나 가구를 망가뜨리기도 한다. 며칠 전엔 소형 냉장고의 문짝을 떼어놓아 새로 장만해야 했다.
유리창마다 침을 뱉어놓는 미친놈도 있다.
진짜 웃긴 놈은 화재 시 비상 탈출을 위해 준비해 놓은 완강기를 타고 사라진 놈이다.
숙박비는 선불로 냈다.
그렇기에 당당하게 로비로 나가도 되는데 왜 위험을 무릅쓰고 창 밖의 완강기를 타고 내려갔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진짜 이상한 놈이다.
어쨌거나 그럴 때마다 세상엔 정말 별의별 놈이 다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번 손님도 그렇다.
어젯밤 늦게 눈에 번쩍 뜨이는 예쁜 여자와 둘이 당도하였다. 피곤한 일상에 찌들어 있던 종업원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런데 강연희 대리를 보는 순간 개안한 심 봉사처럼 아무런 말도 안 하고 눈만 깜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