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처음엔 영화배우나 탤런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현수를 보고 어떻게 저렇게 예쁜 여자랑 엮일 수 있었는지 참 재주도 좋은 놈이란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각자 방을 달라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가끔 이런 손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멋쩍거나 체면치레로 그런 것일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보면 둘이 같은 방에서 나오곤 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면서 밤새 엄청 부러워했다.
그런데 그러지도 않았다. 각자 자기 방에서 잤다. 언제 방을 옮기나 싶어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아는 일이다.
아무튼 아침에도 보았지만 여자는 너무나 예쁘다.
그래서 현수가 허우대는 멀쩡한데 고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못 먹어도 Go!’라는 말이 있질 않던가!
종업원은 자신이 현수의 입장이었다면 밤새 무슨 꾀를 내서라도 같은 방에 머물도록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아 오해한 것이다.
아무튼 벽지의 일부분이 조금 얼룩져 보인다. 무엇으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객실의 집기는 원래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눈에 뜨이는 특이한 물건도 없다.
게다가 크게 트집 잡을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벽의 얼룩은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약간 그슬린 듯한 커튼이 눈에 뜨인다. 물이 뚝뚝 떨어지지 않았다면 찾지 못했을 이상이다.
“손님, 혹시 불장난하셨습니까?”
“네에? 불장난이라니요?”
“아니긴요. 그럼 저 커튼에서 왜 물이 떨어집니까?”
“아! 그, 그건 제가 물을 마시려고 하다 헛디뎌서… 미안합니다. 적시려고 한 거 진짜 아닙니다.”
현수는 얼른 비어버린 물 잔을 들어 보였다.
그런데 종업원은 예리한 시선으로 재떨이를 살핀다. 담배를 피우는지 여부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깨끗하다. 그렇다면 라이터는 없을 것이다.
‘대체 뭐로 이런 거지? 분명 불에 붙었던 냄새가 나는데.’
종업원은 또다시 둘러보았다. 성냥이나 라이터를 찾는 것이다.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어, 손님, 진짜 물만 엎지르신 겁니까?”
“네에, 죄송합니다. 세탁비를 드려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마르기만 하면 되니까요.”
종업원의 말에 현수는 안도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강연희 대리가 들어선다. 객실의 문이 열려 있고 안에서 말하는 소리가 나기에 들어온 모양이다.
“어머! 김현수 씨,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 산책 다녀왔어요?”
“네, 공기도 맑고 아주 좋네요. 근데 무슨 일이에요?”
“무슨 소리가 났다고 해서요.”
“그래요? 무슨 소리죠?”
“몰라요. 저도 듣기는 했는데 그냥 ‘쿵’ 하는 소리였어요. 그나저나 확인은 다 되신 건가요?”
“네,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종업원은 별말 없이 나갔다. 하나 나가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휴우! 진짜 다행이군.’
현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김현수 씨, 어서 준비해요. 오다 보니까 저기 괜찮은 식당이 하나 보였어요. 가서 아침 먹어요. 어제 운전하느라 애쓰셨으니 아침은 제가 쏠게요.”
“네, 알겠습니다.”
강 대리가 나간 후에도 현수는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마법을 발현시켰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험해 볼 수는 없다.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둘은 아침 식사를 하곤 산행을 했다. 땀은 나고 다리도 묵직해지는 느낌이지만 즐겁기만 한 시간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걷는 것이 피로를 풀어준 모양이다.
아무튼 강 대리와 현수는 2박 3일에 걸친 산행을 마치고 귀경했다. 그러는 동안 현수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때마다 강 대리는 어디가 아프냐, 아니면 무슨 골치 아픈 일이 발생되었느냐며 물었다.
만일 회사 일 때문에 그런 거라면 업무지원팀은 그럴 때 필요한 부서라면서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물론 고맙다는 대답을 했다.
하나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현수는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멀린과의 만남이 사실이고, 자신이 진짜 5써클 마법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자신의 성취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아드리안 공국 백성들이 죽어갈 것이라던 말이 귀에 쟁쟁하다.
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몰래 전능의 팔찌에 마나를 불어넣어 보았다. 팔찌가 보인다.
그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모든 것이 진짜라는 것을 새삼 실감한 때문이다.
이번엔 아공간을 열고 손을 넣어 금화 한 개를 꺼내보았다. 물론 강 대리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을 때이다.
그랬더니 금화가 꺼내진다.
현재 아공간엔 금화 100개와 은화 1,000개가 있다.
이걸 팔면 먹고사는 덴 아무 지장도 없다. 따라서 멀린의 말대로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일단 휴직을 신청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드리안 공국의 어려움이 해소되어 돌아왔을 때 몸담을 곳이 없으면 허전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어느 누구의 간섭도 없는 완전무결한 장소가 필요하다는 걸 떠올렸다.
숙박 시설은 당연히 안 된다. 자신의 원룸도 떠올려 보았으나 그것 역시 안 될 노릇이다.
앱솔루트 배리어를 실현시키면 옆집은 물론이고 윗집까지 그 효력이 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시로 사람들이 드나든다.
부모님도 가끔 찾아오시지만 친구 녀석들의 무작정 방문이 심심치 않다. 그러니 수련을 위한 장소로는 젬병이다.
결국 인적이 드문 산밖에 없는데 마땅한 곳이 없다. 그렇기에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느라 말이 없어진 것이다.
반면 강 대리는 부쩍 말이 많아졌다.
계속해서 말을 시켰는데, 그때마다 저도 모르게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토라졌는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하나 그것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생각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라디오를 꺼놓은 상태이다.
하여 바람 가르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질식할 것만 같은 침묵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다시 재잘거리는 산새처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하여 어느 순간 현수는 하던 생각을 접었다.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 강 대리가 또 입을 연다.
“김현수 씨는 언제까지 회사에 다닐 거예요? 10년? 20년? 최소한 이사까지는 해보실 거죠?”
“네? 아, 네에! 할 수만 있다면 그래야죠.”
“호호, 김현수 씨는 너무 믿음직스러워요. 이렇게 주말마다 산행을 다니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죠?”
“10년, 20년 동안이나요?”
“어머, 그럼 안 돼요?”
“안 될 거야 없지만, 결혼 안 하실 거예요?”
강연희 대리는 새침을 떨며 대답한다.
“네, 전 시집을 안 갈 생각이에요.”
“왜요? 왜 결혼을 안 하려고 해요? 강 대리님 같은 사람이 시집을 안 가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어머, 저 같은 사람이라니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한다.
그런데, 세상에나 맙소사!
어떻게 이렇게 귀엽고 예쁘고 깜찍하고 청순하고 요염하며 섹시할 수 있단 말인가!
현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강 대리님은 예쁘시잖아요. 키도 크고 배울 만큼 배웠고… 게다가 직장도 안정되어 있구요.”
이건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뇌에서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상념을 입술이 제멋대로 정리해서 내놓는 것이다.
“호호, 그래요? 근데 그거뿐이에요?”
현수는 연희의 말을 아부해 달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거기에다 착하고 똑똑하기까지 하잖아요. 그리고 이건 진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강 대리님은 정말 섹시해요.”
“어머, 제가요?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에이, 설마요. 전 섹시하곤 담쌓은 사람이에요.”
말로는 부정하고 있지만 연희는 확인 사살까지 하고 싶은 모양이다.
“아닙니다. 진짜 강 대리님은 진짜 괜찮은… 아니, 최고의 신붓감이에요.”
“호호, 아마 김현수 씨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 거예요. 너무 착해서 저한테 후한 점수를 주셨네요. 전 제가 그닥 예쁘지도 않고 똑똑하지도 못하다는 걸 잘 알거든요.”
“아닙니다. 강 대리님은 진짜 예뻐요. 어떤 땐 눈이 부시죠. 게다가 업무 처리 능력까지 대단하시잖아요.”
“호호! 아무튼 고마워요. 절 그렇게 높이 평가해 줘서.”
“헐! 진짜인데. 솔직히 말해 강 대리님 같은 여자, 아주 드물어요. 제가 본 여자 중엔 가장 예쁘다구요.”
“어머, 진짜요?”
“이런 말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강 대리님은 몸매도 너무 예뻐요. 게다가 학벌도 좋으시잖아요.”
“……!”
강 대리는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만 숙였다. 여전히 자신에 대한 찬사를 더 듣고 싶은 앙큼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저야 자격이 없으니까 그렇지, 솔직히 저도 남들처럼 좋은 환경에 괜찮은 학력을 가졌다면 아마 강 대리님에게 목숨 걸고 대시했을지도 몰라요.”
“정말요?”
강연희 대리는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마지막 찬사가 마음에 든다는 뜻일 것이다.
“네, 사나이의 마음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김현수 씨도 꽤 좋은 사람이에요. 착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잖아요. 업무 능력도 뛰어나구요. 제가 보기엔 누구보다도 장래성이 있어요. 성실하잖아요.”
“원 별말씀을……. 그래도 고맙습니다.”
대놓고 상찬을 하는데 현수는 낯이 붉어졌다. 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고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못했다.
조금 전에 했던 말은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에서 한 말이다. 다시 말해 감춰두고 싶었던 본심이다.
6장 잘릴 걸 각오하고 낸 휴직계
실제로 현수는 연희에게 강렬한 호감을 갖고 있다.
웬만한 탤런트는 명함도 못 내밀 미모의 소유자이다.
게다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대학을 졸업했으니 똑똑할 것이다. 그 대학은 전교 석차가 최상위권에 가까워야 갈 수 있는 대학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몸매 역시 모델 뺨칠 정도이다. 들어갈 곳은 확실히 들어갔고, 나올 곳은 적당히 나온 1등급 환상 몸매이다.
살이 찐 것도 아니고 너무 마른 것도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에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가 너무도 잘 어울린다.
사내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 그런 여자이다.
그러니 호감을 갖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사실 현수네 회사 총각 사원 전부는 물론이고 기혼 사원들도 강 대리라면 껌벅 죽는다. 그래서 강 대리가 무슨 부탁이든 하면 무조건 들어줄 것이다.
그렇기에 연희와 있을 때면 정신을 바싹 차린다. 실수하여 나쁜 면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시 정신줄을 놓았다. 그리곤 저도 모르게 속내를 드러냈다. 혹시 부담스러워할까 싶은 마음이 든다.
하여 말없이 한숨을 쉬고 입을 닫은 것이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희는 창 밖 풍광에 시선을 주고 있다.
뭔가 이상한 것이 보이거나 괜찮은 것이 있으면 어린아이처럼 재잘거릴 뿐이다.
참 듣기 좋은 목소리라는 생각이 든다.
‘휴우, 내가 강 대리를 진짜 좋아하긴 하는 모양이야. 아서라. 오르지 못할 나무다. 꿈 깨자. 뱁새가 황새를 쫓으려다간 가랑이가 찢어진다. 정신 차리자, 김현수!’
현수는 회사 내 총각 사원들이 어떤 스펙을 쌓았는지 잘 알고 있다.
거의가 명문대 출신들이다. 심지어 하버드나 프린스턴, 예일 같은 아이비리그 출신도 많다.
그것도 부족한지 온갖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회계사 자격증을 가진 이는 널렸다.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또는 외무고시까지 패스한 직원도 있다.
들리는 소문엔 다들 집안이 빵빵하다고 한다.
대학 교수가 부모인 사람은 흔하다. 의사, 판사, 검사, 변호사를 부모로 둔 직원도 많다.
국회의원이나 장관의 아들도 있고, 대통령 조카도 있다고 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일류 대학 출신이고 부유하다는 것이다.
반면 현수는 삼류 대학 출신이다.
게다가 단 하나의 자격증도 없다. 그리고 현수는 아버지도 가난하고 본인도 가난하다.
경쟁자들과 비교하면 현수는 딱 두 글자로 요약된다.
초라!
초라란 호졸근하고 궁상스럽거나 보잘것없고 변변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 강연희 대리에 대한 호감이 있어도 감히 접근하여 그녀의 마음을 얻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많은 잘난 놈들이 내놓고 대시하곤 했다. 물론 박진영 대리는 모른다.
그들 가운데에는 현수가 보기에도 상당히 괜찮은 녀석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도 강 대리의 환심을 얻지 못한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수가 대시하면 거절당할 것이 뻔하다.
그런데 뭣 하러 자존심 상하고 꼴만 우스워지는 괜한 짓을 자초하겠는가!
강 대리가 산행을 제의했을 때 현수는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인지했다. 보디가드 내지는 산행에 편리함을 제공하는 방자 같은 역할이 그것이다.
하인 비슷함에도 기꺼이 이런 역할을 맡은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같이 있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