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1화 (11/1,307)

# 11

하여 내내 예의를 갖추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의도이다. 또한 방자 역할을 계속해서 맡고 싶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강 대리가 부탁하면 천지건설(주)의 거의 모든 직원이 기꺼이 방자 내지는 향단이가 될 것이다.

비록 비루한 역할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강 대리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확률이 아주 조금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2박 3일에 걸친 산행은 끝났다.

회사로 복귀한 월요일 오후.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현수는 구조계산팀의 호출을 받았다. 그리곤 최근에 납품 결정된 자재 하나하나에 대한 트집을 들어야 했다.

건축 자재는 안정성과 시공 품질이 보장되기 위해 적절한 강도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새로 납품받을 자재들을 선정할 때엔 시방서7)에서 요구하는 강도를 충족시키는지의 여부를 반드시 따져야 한다.

그래서 설계팀에서 내려온 시방서의 내용을 참조하여 몇몇 자재의 납품을 결정했다.

그런데 휴가를 다녀온 새에 요구 강도를 강화한 모양이다.

결정된 자재가 가진 강도보다 조금씩 높다. 그렇기에 기존의 납품 계약을 철회하도록 압력받았다.

이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지금껏 사용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고, 다른 건설사 모두 사용하는 것을 가지고 흠을 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전에 사용하던 것보다 더 좋은 것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 대리는 노골적으로 협박을 한다.

지시대로 하지 않으면 이의를 제기하여 회사 생활하기 어렵게 만들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현수는 말도 안 되는 트집에 짜증이 났다.

하나 어쩌겠는가! 계급이 깡패다.

참고 또 참으며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박 대리가 이러는 것은 우연히 들은 소문 때문이다.

지난 주말 업무지원팀 강연희 대리가 자재과 김현수 사원과 덕항산에 다녀왔다는 것이 사내에 알려졌다.

이는 연희가 그냥 지나가는 말로 동료 여직원에게 한 말인데 다른 여사원들이 침소봉대하여 소문을 낸 것이다.

말이란 으레 그러하듯 전해지는 과정에서 점점 부풀려진다.

하여 연희와 현수가 뜨거운 사이라 주말마다 산행을 핑계로 밀월여행을 다닌다고 소문이 났다.

자신들보다 월등한 미모의 강 대리를 시기하는 마음에서 지어낸 헛소문이다.

이를 듣고 열받아 현수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투덜거리면서 제자리로 돌아온 현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처럼 박 대리의 견제가 계속되면 회사 생활하기 진짜 어렵다. 그렇다고 때려치울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 얻은 직장인가!

열받는다고 그만두면 실망하실 부모님의 얼굴 때문이라도 그럴 순 없다.

하여 고심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상념이 있다.

회사에선 1년에 한 번 직원들로 하여금 정기 신체검사를 받게 한다. 이걸 이용할 생각을 한 것이다.

즉시 컴퓨터로 검색을 했다.

그리곤 회심에 찬 미소를 지었다.

이날 밤, 현수는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다. 그리곤 파이어 애로우를 시전해 보았다.

처음엔 목표했던 것에 잘 맞지 않았다.

하나 반복해서 해보니 점점 더 정확해진다. 30여 번이 넘어서부터는 대충 겨냥해도 잘 맞았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확인한 것이 있다. 파이어 애로우의 최대 사정거리가 약 500m 정도 된다는 것이다.

다음날, 신체검사 예약을 마친 현수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업무를 보았다.

이제 신검을 받고 나면 이상이 있다는 판정이 날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마나를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핑계로 휴직계를 낼 생각이다.

만일 휴직이 곤란하다면 퇴직까지 고려하고 있다.

아무튼 휴직이 결정되면 곧장 전능의 팔찌를 얻었던 덕항산 동굴로 갈 것이다.

그곳은 인적이 아예 없는 곳이다. 경치가 빼어난 곳도 아니고, 수량 풍부한 계류가 흐르는 곳도 아니다.

이번에 가보니 접근성이 좋은 것도 아니다. 따라서 당분간 사람의 발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수련을 위한 장소로는 최적인 듯싶다.

멀린이 언급하기를, 5써클 마법사가 되기까지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지만 상당한 시일이 소요된다고 한다.

역사상 가장 짧았던 이가 30년이었고, 어떤 이는 평생을 연마했지만 5써클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멀린 자신도 70년 만에 5써클이 되지 않았던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현수 역시 혼자 힘으로 5써클에 이르러야 한다. 하나 머리가 좋아지는 브레인 리프레쉬 마법을 실현시켜 놓았으니 45년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안전을 위해 결계를 치고 타임 딜레이 마법을 걸고 들어갈 것이니 외부 시간으로는 3개월 정도 소요된다.

가기 전에 준비도 해야 하고, 나온 다음엔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하여 이번 휴가는 넉넉잡고 4개월은 되어야 한다.

아무튼 45년 동안이나 마법 수련에 몰두해야 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이 필요하겠는가!

기본적으로 사람인 이상 먹고, 자고, 싸고, 씻고 해야 한다. 하여 꼼꼼하게 준비물 체크 리스트를 만들었다.

우선 그 긴 기간 동안 맨바닥에서 잘 수는 없지 않은가!

하여 가장 먼저 침구를 준비해야 한다고 써놓았다.

침대도 45년 동안 하나만 쓸 수 없으므로 인터넷으로 수명을 확인해 보았다.

매트리스는 5년에 한 번 교체하는 것이 좋다고 되어 있다. 하여 적어도 열 개는 준비하여야 한다.

물론 이불과 베개도 넉넉하게 필요하다.

다음은 먹는 것이다.

아공간에 넣으면 상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찌 그것만 믿겠는가! 게다가 쓸 수 있는 아공간은 마차로 열 대 분량밖에 넣을 수 없다.

하여 저장성이 좋은 통조림 위주로 구매해야 한다.

이와는 별도로 양념이 된 돼지갈비나 불고기 같은 반 조리 식품도 구매할 계획이다. 이것은 한 번 먹을 분량씩 개별 진공 포장을 해야 할 것이다.

이 밖에도 집어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해물탕이나 칼국수 같은 것도 필요하다.

밥만 먹고살 순 없기 때문이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계란, 고추장, 된장, 막장, 김치, 각종 반찬, 설탕, 소금, 후추, 김, 미역, 다시마, 감자, 고구마, 호박, 고추, 파, 마늘, 양파, 참기름 등등도 필요하다.

이외에도 라면과 쌀, 보리, 조, 기장, 메밀, 감자, 당근, 고구마, 옥수수 등도 갖춰야 할 것이다.

이 밖에 이것들을 조리할 도마, 휴대용 가스레인지, 일회용 가스통도 필요하다. 모두 여러 벌씩 준비해야 할 것이다.

하루에 가스통 하나를 소모한다고 했을 때 45년 동안 필요한 양이 무려 16,425개이다.

이를 돈으로 환산해 보니 가스 값만 1,200만 원이다.

휴지도 필요하고 비누, 수건, 샴푸, 치약, 칫솔, 퐁퐁, 수세미도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온갖 살림이 다 필요한 셈이다.

계산을 해보니 마차 열 대 분량이 들어간다는 아공간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하긴 딱 한 사람뿐이지만 45년 간 먹고 마실 양이니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

일 년치 생활비를 뽑아보니 대략 600만 원 정도 된다.

45년이면 2억 7,000만 원이다.

현수는 한숨을 쉬었다. 금화를 처분하는 것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출처가 불분명한 금화를 처분하러 다니는 동안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되면 곤란하게 될 것이다.

하여 다시 한 번 고심했다.

결론은 한꺼번에 모든 것을 준비하지 않는 것으로 났다. 필요하다면 수시로 드나드는 것으로 결정된 것이다.

하여 체크 리스트는 또다시 작성되었다.

이번엔 외부 시간으로 보름, 그리니까 결계 내부 시간으로 따지면 7.5년 동안 사용할 것들만 준비하기로 했다.

그래도 엄청난 양이라 적어도 두어 번은 왕복해야 한다.

3일 후 현수는 신검을 받았다. 그리곤 예상보다 긴, 최소 6개월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판정을 받았다.

진단서 내용은 신장과 간 기능이 현저히 손상되어 이의 회복을 위한 집중적인 치료와 휴식이 필요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에 부적절하다는 뜻이다.

진단서를 첨부하여 휴직계를 냈더니 인사과 직원이 위아래로 훑어본다.

새파란 신입사원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는 표정이다.

이 휴직계 때문에 현수는 향후 진급에 애로사항을 겪게 될 것이다. 또한 회사의 형편이 어려워질 경우엔 구조 조정 1순위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이다.

근데 그러거나 말거나이다.

6개월 휴직이니 자신의 자리는 누군가가 차지할 것이다.

그렇다면 후임이 책상을 쓸 수 있도록 개인 사물을 꺼내 정리해야 한다. 그래서 사물 정리를 시작했다.

이것이 거의 다 끝나갈 때이다.

“김현수 씨, 이야기 들었어요. 그동안 그렇게 많이 아팠던 거예요? 아픈데도 참은 거냐구요?”

“아, 강 대리님.”

“미안해요. 간이 나빠지면 쉽게 피로해지고 그런다는데 혹시 저 때문에 악화된 건 아닌가 싶어 미안하네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의사는 뭐래요?”

“그냥 조금 쉬면 낫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쉬려구요.”

“어디서요? 김현수 씨 원룸은 너무 답답하지 않아요?”

“네, 그래서 이 기회에 시골 공기나 실컷 마셔보려 합니다. 강원도 쪽에 방을 얻어 좀 쉬다 오겠습니다.”

“전화해도 되죠?”

“네에, 물론입니다. 언제든 전화 주십시오.”

“이제 같이 등산은 못 다니는 거네요?”

연희는 아쉽다는 표정이다. 현수는 짐짓 본인도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당분간은 그럴 겁니다.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했거든요. 그냥 책이나 읽으면서 있으렵니다.”

“이따 저녁이나 같이해요. 앞으로 반년이나 못 볼 테니 우리끼리 회식을 해요.”

“회식이요? 네, 그러지요.”

현수는 자신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살갑게 대해주는 강 대리가 고마웠다.

그렇기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어주었다.

사물을 정리한 후 현수는 귀금속 가게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기 위해 지난밤 네 개의 금화를 꺼내 여러 조각으로 갈라냈다. 그걸 팔러 다닌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약 4,500만 원을 손에 쥐었다.

이걸로 7.5년치 음식과 각종 물품을 사야 한다.

어디로 갈까 하다 마트에 들렀다.

천지그룹 계열사가 운영하는 대형마트이다. 이곳이라면 한꺼번에 거의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그런데 막상 방문해 보니 매대에 있는 물건만으론 부족하다. 하여 마트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체크 리스트를 건네고 그만큼을 배달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직원이 눈을 크게 뜬다.

하긴 식료품을 포함하여 4,500만 원가량 된다.

액수가 액수인지라 두말 않고 원하는 장소까지 배달해 주겠다고 한다.

문제는 엄청난 양의 식료품 등을 받을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하여 일요일 오전에 회사 자재 창고로 배달해 줄 것을 요구했다.

마침 비어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고, 이번 주 주말엔 자재과 워크샵이 있어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CCTV가 설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고장 나서 꺼져 있는 상태이니 별 문제 없을 것이다.

배달 일정을 확인하곤 연희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갔다.

가는 동안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몸이 아파서 휴직한다며?

혹시 회사 일이 무서워서 도망가는 건 아니겠지?

6개월 휴직이라고 들었어. 나 같으면 차라리 관두겠네.

쉬는 김에 그냥 그만두게. 절대로 회사로 복귀하지 말길 바란다네.

구조계산팀장 박진영 대리가 보낸 문자이다.

현수는 치미는 욕설을 참았다. 그리곤 가차없이 메시지를 지워 버렸다. 그리곤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런 십장생이……! 두고 봐라. 반드시 복귀할 테니.”

“여기에요.”

“우와! 여기 멋지군요.”

현수는 휘황찬란한 빛을 뿌리는 현란한 샹들리에를 바라보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이곳은 대한민국에서도 내로라하는 초특급 호텔의 이태리 식당이다.

워낙 음식 값이 비싸서 일반인들은 전혀 모르지만 상류층 사람들에겐 입소문이 난 곳이다.

“여기 음식이 맛있다고 소문이 났어요. 김현수 씨를 위해 특별히 예약했는데 괜찮죠?”

“아, 물론입니다. 강 대리님 덕분에 오늘 호강하나 봅니다. 이태리 음식이라는 건 피자 말고는 먹어본 적이 없거든요.”

“호호, 그래요? 그럼 오늘 음식은 제가 주문해 드려도 될까요? 여기 뭐 잘하는지 제가 알거든요.”

“네, 강 대리님이 무엇을 주문해 주시든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호호, 호호호!”

무엇이 그리 좋은지 강연희 대리는 교소를 터뜨렸다.

그리곤 웨이터를 불렀다. 그런데 외국인 웨이터이다.

강 대리가 주문을 하는데 영어는 아니고 이태리어 같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단어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현수는 영어도 제대로 못하기에 기가 죽는 느낌이다.

그러다 문득 전능의 팔찌가 떠올랐다. 하여 슬그머니 빨간 보석에 손을 대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둘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한다.

“미스터 루까 바도에르, 이분은 신장과 간이 좋지 못하대요. 그러니 몸에 좋은 메뉴 위주로 주문하고 싶은데 무엇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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