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멀린의 마법은 여타 마법과 궤를 달리한다. 효용성을 강조하였기에 구결이 간결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만일 보통의 마법서를 보게 된다면 혼선이 빚어질까 싶어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어쨌든 현수는 이루려는 바를 하루속히 달성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하루에 딱 한 번, 잠자리에 들 때만은 마법 이외의 것을 생각했다.
강연희 대리! 매일 밤 그녀의 사진을 보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현수가 또다시 마트를 방문한 것은 약 7년 반이 흐른 뒤였다. 물론 결계 안의 시간이다. 세상을 기준으로 보면 15일이 지났을 뿐이다.
결계 안에서 7년 반을 보냈지만 현수의 외모는 거의 변화가 없다. 신체적으론 외부 시간만큼 지난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생각보다 먹는 양이 적었다. 하여 이번엔 금화 두 개를 팔았다. 그리고 그간 필요하다 여겼던 것들을 구입했다.
전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양이다.
이것을 옮기기 위해 여덟 번이나 왕복해야 했다.
산행 자체만으로도 몹시 힘들었다.
그간 결계 안에 틀어박혀 오로지 마법에만 매달린 결과 근육이 다 풀렸던 때문이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워낙 반공 교육이 잘 되어 있어서 수상해 보이면 간첩 신고가 접수될 것이다. 그렇기에 평범해 보이려 애를 썼다. 그런데 이것은 기우였다.
여섯 번 왕복을 한 이후에야 전능의 팔찌로 퍼펙트 트랜스페어런시 마법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해 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 은신 마법이 아니던가!
그간 마법에 골몰하느라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후의 산행은 거리낌이 없었다.
오가는 동안 현수는 아공간을 이용하여 쓰레기를 모두 처리했다.
나온 김에 강 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여 쓸쓸한 마음으로 되돌아갔다.
다시 결계 안으로 들어간 현수는 마법이 이 세상의 전부인 양 오로지 그것만을 파고들었다.
대화 상대 하나 없는 공간이지만 애써 참아냈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아서이다.
노트북을 펼치면 낫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면 마법 익히는 것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현실 시간으로 다시 보름이 지난 후 현수는 식료품 등을 구하러 밖으로 나왔다.
워낙 양이 많아 이번에도 애를 먹었다.
물건을 구매한 후 강 대리에게 또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받질 않는다. 회사로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업무 때문에 바쁠 수도 있고,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자를 남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문자를 보내면 답신은 해줄 것 같다. 그런데 그걸 받으면 또다시 결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 같아서이다.
설사 안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 문자의 내용 때문에 가슴앓이를 할 것만 같아서이다.
현실 시간으론 한 달이지만 현수가 느낀 시간은 15년이다.
그간 강 대리에 대한 그리움은 간절한 사랑으로 변했다. 너무도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할 수만 있다면 되든 안 되든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
그랬다가 깨지는 것이 두렵기는 하지만 안 그러면 그녀를 차지할 기회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또다시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을 이뤄내면 당당하게 나설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다시 보름 후, 현수는 필요한 물품들을 사러 나왔다.
세 번째 외출이기에 전보다는 수월해야 함이 마땅하다.
하나 그러지 못했다. 왠지 마트에서 물건을 사는 일이 서툴러진 느낌이 든 때문이다.
하긴 7년 반에 한 번씩 물건을 사니 그럴 것이다.
강 대리는 이번에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현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여 문자를 보냈다.
강연희 대리님,
안녕하신지요?
시간이 제법 흘렀습니다. 잘 계신지 궁금하네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안부를 알고 싶어 문자 보냅니다.
사무치는 그리움을 그대로 옮긴다면 소설책 한 권 분량을 문자로 보내야 할 것이다. 하나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상대는 모르는 외사랑이다. 하여 자격지심 때문에 간결한 몇 줄의 문장만 보낸 것이다.
답신은 물건을 한창 옮기고 있을 때 왔다.
겨울로 접어들어 낙엽이 모두 졌을 때다. 하여 산속이라 할지라도 제법 멀리까지 보인다.
나무 잎사귀들이 모두 사라진 때문이다.
현수는 투명 은신 마법으로 몸을 감추고 있었다. 혹시 있을지 모를 등산객들의 시선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기에 전화기는 진동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걸려온 전화를 받지 못했다.
대신 문자가 길게 와 있다.
오오! 현수 씨!
드디어 소식을 주셨군요. 반가워용.^^
그간 여러 번 연락을 드리고 싶었어요.
근데 요양하는 데 방해될까 싶어 꾸욱 참았답니다.
헤헷! 건강은 어떠신지요? 많이 좋아지셨지요?
오늘 현수 씨가 보낸 문자를 받고 참 기뻤어요.
아직도 절 잊지 않고 계시니 말입니다.^^
전 아주 아주 잘 지낸답니다.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아요.
근데 되게 심심해요.
헤헷! 현수 씨가 얼른 복귀했으면 좋겠어요.
요즘 산행을 하지 못해 좀이 쑤시거든요.
이건 농담이에요.^^ 헤헷!
산행을 못해도 좋으니 어서 오세요.
듬직한 현수 씨를 보고 싶을 때가 많거든요.
자아, 그럼 힘내서 건강해지세요.
연희가 그러라고 기운 보냅니다. 홧팅∼!
문자를 읽는데 울컥하더니 눈물이 나온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현수는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안 때문이다.
답신을 보내진 않았다. 대신 굳은 결의를 하고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이를 악물고 마법에 매진했다.
현수가 5써클을 이룬 것은 현실 시간으로 59일이다.
결계 안 시간으로 계산하면 약 29년 1개월 만이다.
카이엔 제국의 천재가 세운 30년이란 기록을 깬 것이다. 이는 현수가 천재여서가 아니다.
브레인 리프레쉬 마법으로 두뇌가 상당히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나 아이큐가 300쯤 된 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머리가 좋다는 사람보다 아주 약간 좋아진 것뿐이다.
굳이 아이큐로 가늠하자면 한 180쯤 될 것이다.
그런데 현수는 전공이 수학이다.
마법은 순간적으로 고도의 계산이 필요한 일종의 학문이다. 이런 계산을 아주 능숙하게 한다.
카이엔 제국엔 없는 발달된 수학을 이미 섭렵한 바 있다. 그렇기에 최단 시간이라는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5써클을 이루었을 때 현수는 아공간 속의 아공간을 열었다.
가장 먼저 희대의 마법서 이실리프를 꺼내보았다. 그간 오매불망 보고 싶었던 것이다.
가로 45㎝, 세로 65㎝ 정도 되는 이 마법서의 표지는 드래곤의 비늘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실버드래곤의 비늘인 듯싶다. 전체적으로 은은한 은백색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신비로워 보인다.
이것은 이 세상의 어떤 보검으로도 손상을 입힐 수 없다.
드래곤의 비늘 자체가 그런 효능이 있지만 여기에 보호 마법까지 걸려 있기 때문이다.
현수는 표지에 쓰인 카이엔 제국의 문자를 보았다.
제국의 말은 알지만 문자는 처음 보았는데, 꼬불꼬불한 것이 인도의 문자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지의 문자는 이실리프라 쓰인 것 같다.
현수가 저도 모르게 이실리프의 표지를 쓰다듬을 때 한동안 들을 수 없던 멀린의 음성이 들린다.
“아아! 인연자여, 드디어 5써클을 이루었는가! 경하하네.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해주었네.”
“아……! 아드리안 대마법사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그래, 잘 있었네. 어쨌든 그대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네. 자, 기왕에 이실리프를 꺼냈으니 맹약을 맺게 해주겠네.”
“네? 맹약이라니요?”
현수는 마법서 한 권 보는데 무슨 복잡한 절차인가 싶었다. 하나 또다시 반문하지 않았다.
멀린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우선 두 손 모두 펼쳐 이실리프의 표지에 대게. 그리고 끝났다 할 때까지는 절대 손을 떼어서는 안 되네.”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네, 했습니다.”
“마법을 하찮게 여기지 않겠는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니, ‘나 김현수는 마나를 걸고 맹세합니다’라고 말하게. 다시! 마법을 하찮게 여기지 않겠는가?”
“네, 나 김현수는 마나를 걸고 맹세합니다.”
“마법으로 악한 일을 하는 자가 있으면 처단하겠는가?”
“네, 나 김현수는 마나를 걸고 맹세합니다.”
“이실리프의 마법을 더욱 발전시키겠는가?”
“네, 나 김현수는 마나를 걸고 맹세합니다.”
“흑마법사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사악한 존재, 그들을 멸함에 힘쓰겠는가?”
“네, 나 김현수는 마나를 걸고 맹세합니다.”
멀린의 물음은 계속되었다.
대답을 할 때마다 심장의 마나 링이 맹렬한 회전을 한다. 만일 맹약을 깨면 이것들이 파괴된다. 더 이상 마법을 시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하는 말을 따라 하게. 그리고 내가 손을 떼라고 할 때까진 절대 손을 떼어선 아니 될 것이네.”
“네.”
“세상 마법의 근원이 될 이실리프는 나 김현수에게 종속되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하리라!”
“세상 마법의 근원이 될 이실리프는 나 김현수에게 종속되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하리라!”
현수가 복창하자 멀린의 창노한 음성이 들린다.
“θγφξβγ φξζγζ γφτψφ ηθγζγ λσυρτ θγζαηυρτ φτψ φξ гφδβγζγ ετэ!”
나직한 음성으로 이루어진 주문이다. 마법 문자인 룬 문자로만 이루어진 구결이다.
마지막에 말을 마치는 순간 현수는 손바닥 아래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찌르는 것이 느껴진다.
통증이 있다. 하나 손을 떼진 않았다.
많이 아픈 것도 아니고, 떼면 안 된다 하여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때문이다.
그때 멀린의 음성이 또 이어졌다.
“θγζγ μλσυЖ δβγζγ ψφ !”
주문을 마치자 이실리프로부터 밝은 빛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표지 전체에 선혈이 묻어 있다. 이것이 표지 안에 스며들고 있다. 그와 동시에 빛이 점차 줄어든다.
“헉! 이게 왜?”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이실리프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언제든 이실리프를 펼쳐 보고 싶으면 ‘이실리프여, 열려라!’라고 하게. 이제 자네에게 종속되어 오로지 자네만 볼 수 있게 되었네. 닫을 때는 ‘이실리프여, 닫혀라!’라고 하면 되네.”
“알겠습니다. 이실리프여, 열려라!”
나직이 중얼거리자 방금 전에 사라졌던 이실리프가 허공에 둥둥 떠 있다. 대단한 마법이다.
표지를 넘겨보았다.
큰 크기의 책이지만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표지가 완전히 넘어가자 ‘이실리프를 쓰면서’라는 서문이 보인다. 이것을 읽으려 할 때이다.
“인연자여, 이제 그만하게.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으니. 일단 트랜스퍼 디멘션 마법을 발현시키게.”
“알겠습니다. 이실리프여, 닫혀라.”
이실리프가 눈앞에서 스르르 사라졌다. 자동으로 아공간 속으로 옮겨진 것이다. 신기한 현상이다.
하나 이런 신기함에 정신 팔고 있을 새가 없는 듯하다.
하여 전능의 팔찌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리곤 처음으로 초록색 보석에 손을 대며 나직이 소리쳤다.
“트랜스퍼 디멘션!”
화아아아악 !
순식간에 허공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현수의 신형이 사라졌다. 2012년 11월 28일에 일어난 일이다.
“어서 오게. 그간 고생 많았네.”
“아! 아드리안 대마법사님!”
현수는 앞으로 나오려다 앉아 있던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려는 멀린을 황급히 부축했다.
현수를 만나는 것이 몹시 반가웠던 모양이다.
이젠 눈으로 봐도 100살은 훨씬 넘은 노인이다. 굳이 나이를 따지자면 120살쯤 된 듯 보인다.
바싹 말라 있다. 그리고 얼굴 가득 저승꽃이라 칭하는 검버섯이 퍼져 있다.
호호백발이지만 숱이 빠져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할 수 있는 모습이다.
“자넬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바, 반갑네.”
“대마법사님, 고정하십시오. 우선 절을 올리겠습니다.”
“절……? 무슨 절?”
무슨 뜻인지를 묻었지만 현수는 대답 대신 큰절을 했다.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마법사로 만들어준 스승이다.
그래서 최대한 공손히, 그리고 장중하게 절을 했다.
두 손 모아 땅에 대고 그 위에 이마를 대었다.
일찍이 영국에서 산 바 있지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정중함에 멀린은 잠시 말을 잃었다.
“……!”
“아드리안 대마법사님께 김현수가 인사 여쭙습니다.”
절을 마친 현수는 그 앞에 공손히 무릎 꿇고 앉았다.
멀린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제게 마법을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감히 대마법사님께 스승님이라 하여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 스승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하여 주십시오.”
“허허허, 허허허.”
멀린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