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4화 (14/1,307)

# 14

“아! 고맙습니다, 스승님!”

현수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에 멀린이 창노한 음성으로 말을 한다.

“김… 현수라고 했던가? 제자가 되어주어 고맙네. 자넨 이제 하나뿐인 나의 제자이네.”

“고맙습니다, 스승님!”

“내가 오히려 더 고맙네. 늘그막에 제자를 두게 되다니. 그나저나 자네에게 당부할 말이 있네.”

“네, 말씀하십시오, 스승님!”

“이실리프는 이실리프 마탑 탑주만의 소유물이 되어야 하네.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어 세상을 혼란케 할 수 있으니 부디 이실리프의 존재를 감춰주게.”

무슨 뜻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알겠습니다, 스승님.”

“나중에, 아주 나중에 제자를 두더라도 딱 하나에게만 그것을 전하게. 약속하겠는가?”

“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스승님. 그런데 스승님, 우선 조금 쉬셔야 할 듯합니다. 너무 피곤해 보이십니다.”

사실 멀린 대마법사는 벌써 세상을 하직했어야 한다. 하나 현수를 기다리는 일념으로 지금껏 버텨왔다.

지금의 이 모습은 무협 소설에서 흔히 언급하는 회광반조(回光返照) 현상이다.

회광반조란 해가 지기 직전 하늘이 아주 잠깐 환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멀린은 이제 죽음이 가까운 상황이다.

하나 현수는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

“아닐세. 내가 이제 세상을 뜰 때가 되어 그러는 것이네. 힘이 없어 긴 말은 못하겠네.”

“……!”

“이제부턴 이곳에서 마법을 익히게. 공국을 구하려면 최소 7써클 마스터에는 이르러야 한다네.”

“네, 스승님의 뜻을 받들어 마법을 익히겠습니다. 부족하지만 많은 지도 편달 바랍니다.”

“아니, 이젠 자넬 도울 힘조차 없네. 너무 늙은 거지. 그래서 거의 모두 자네 혼자의 힘으로 이뤄야 할 것이네. 만일 내게 문제가 생기면 저기…….”

멀린은 탁자 위엔 두툼한 책 한 권을 가리켰다.

“자네를 기다리는 동안 저 책에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써놓았네. 참고하게. 그리고 아드리안 공국을 지켜주게.”

“네, 스승님.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으음, 힘이 드는군. 날 자리에 눕혀주겠는가?”

“네, 스승님.”

현수는 멀린의 신형을 안아 들었다.

신장이 180㎝를 훨씬 넘기는 것 같은데 너무나 가볍다. 앙상한 뼈 위에 가죽만 얇게 씌워놓은 상황이니 그럴 것이다.

침상에 눕혀놓고 물러서려는데 이상한 기분이 든다. 하여 내려다보니 멀린의 눈이 감겨 있다.

황급히 맥을 짚었다. 그런데 맥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스승님! 스승님!”

심장 부위에 귀를 댔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스승님! 아아, 만난 지 30분도 안 되었는데… 스승님!”

위대한 대마법사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

카이엔 제국에선 건국 일등공신인 아드리안 후작으로 불렸고, 영국에선 궁정 마법사 멀린이라 불렸던 인물.

카이엔 제국의 영광의 마탑 탑주이자 7써클 마스터를 이룬 헬리온 드 스타이발 후작이 무릎 꿇고 존경을 표했던 단 하나의 인물.

마법의 신기원을 열어 지금껏 인간이 이루지 못했던 진정한 9써클 마스터가 된 대마법사.

10년의 시간만 더 주어졌다면 신의 반열에 오를 10써클을 완성했을 위대한 마법사. 그런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이 마나의 품으로 되돌아갔다.

현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친인의 죽음을 목도한 경험이 없다. 친조부모와 외조부모 모두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부모님에겐 다른 형제가 없기에 남들 다 있는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 고모, 이모, 외삼촌이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멀린의 죽음이 어쩌면 친한 사람의 첫 번째 죽음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온다.

처음 전능의 팔찌를 얻었을 때에만 모습을 보았고, 그 뒤론 음성으로만 만날 수 있었던 마법의 스승이다.

그런 스승을 드디어 만났다. 그런데 겨우 30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스승이 세상을 등졌다. 괜스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여 한참을 울었다.

반 시간쯤 흐른 후 냉정을 되찾은 현수는 멀린의 레어를 돌아다녔다.

공간 확장 마법을 걸어놓았는지 제법 넓었다.

그런데 있는 게 별로 없다. 거의 모든 것을 현수의 아공간에 넣어 보낸 때문이다.

있는 것이라곤 약간의 음식과 가구뿐이다. 그리고 탁자 위의 책 몇 권과 펜, 잉크 등 필기도구가 있다.

그러다 이곳에 와서 가장 큰 물건을 발견했다.

모서리 진 귀퉁이에 아마포 비슷한 것으로 덮어놓아 처음엔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것이다.

그것은 미스릴로 도금한 관이다.

현수는 뚜껑을 열고 멀린의 시신을 그곳에 넣었다. 그리곤 시신의 보전을 위해 아공간에 보관했다.

멀린은 아드리안 공국의 개국시조이다.

그렇기에 나중에 아드리안 공국이 위기를 모면하고 나면 국장(國葬)을 치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연후에 새삼스레 레어를 살폈다.

그 결과 이곳이 마법 익히기에 최적인 장소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넓고 쾌적하다. 사시사철 온도의 변화를 느끼지 않도록 기후 조절 마법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먹을 수 있는 샘이 있으니 식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샤워실이라 부를 수 있는 곳도 있다.

정화 마법이 걸린 화장실도 있다. 이제 냄새나는 배설물을 처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

가장 좋은 것은 마음껏 마법을 시전해 볼 수 있는 연습장 비슷한 곳이 있다는 것이다.

하여 아공간에 있던 음식물을 모두 꺼내 식품 창고에 넣었다.

보존 마법이 걸려 있으니 아무리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강의 정리를 마친 현수는 덕항산의 수련지로 차원 이동했다. 쓰레기로 버릴 것은 모두 처분했다.

한참 만에 자신이 있었던 흔적을 모두 지울 수 있었다.

“흐음! 생필품이 다 떨어졌으니 사야겠군. 거기에 얼마나 있어야 할지 모르니 조금 넉넉하게 사야지.”

그러고 보니 옷도 모두 낡았다.

텅 빈 멀린의 레어를 채워 넣어야 쾌적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이번엔 가구도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5써클이 되면서 사용할 수 있는 아공간의 부피가 어마어마해졌으니 아무리 많아도 단 한 번에 옮길 수 있다.

현수는 콧노래를 부르며 하산했다. 그리곤 서울로 와서 금화 열 개를 처분해 1억 1천만 원을 만들었다.

8장 마트에서 벌어진 일

5써클이 되어 아공간 속의 아공간을 열었을 때 현수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어마어마한 보물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금화, 은화는 물론 각종 보석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다.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루비, 사파이어 등등이 그것이다.

양으로 따지자면 각각 실중량 800㎏을 담을 수 있는 곡물 자루를 하나 가득 채울 양이다.

이걸 내다 팔면 단번에 세계 최고의 부호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금화를 처분하면서 가격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았다. 주는 대로 받은 것이다.

어찌 되었든 모든 걸 처분한 현수는 대여 금고에 돈을 넣어두고 찜질방에 들렀다.

출처 불분명하기에 은행에 입금시켰다간 세무서의 추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손에는 가방 하나가 들려 있다. 돈을 담아왔던 가방이다.

어쨌거나 29년하고도 1개월이 조금 넘는 기간 만에 처음 가는 목욕탕이다.

뜨끈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니 나른해지며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사우나에도 드나들었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되게 뜨겁다는 느낌이다.

그러다 무심코 문질렀는데 때가 나온다.

하여 때밀이에게 몸을 맡겼다. 그런데 때가 국수처럼 밀려 나와 몹시 창피했다.

피부청결사라 불러달라는 때밀이는 평생 이처럼 때가 많이 나오는 사람은 처음이라면서 투덜댔다.

밀어도 밀어도 때가 나오니 돈을 더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돈을 두 배로 냈다.

한 번 밀고 한참을 더 있다가 또 밀었던 것이다.

그래도 때가 많이 나왔기에 몹시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목욕을 하고 나가면 체중이 1㎏쯤 줄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만큼 때가 많이 나온 것이다.

일회용 면도기를 사서 면도를 하다가 문득 새 면도기와 날을 사야 한다는 것을 상기했다. 쓰던 게 망가진 것이다.

목욕을 마쳤지만 상쾌한 기분은 아니다. 걸치고 있는 옷에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현수는 5써클 마법사임이 분명하다.

하나 카이엔 제국이 자리 잡고 있는 아르센 대륙의 다른 5써클 마법사들에 비하면 모르는 마법이 훨씬 더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청결 마법과 정화 마법이다. 1써클이지만 한 번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덕항산 동굴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따라서 세탁기를 가져다 놓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곳이다.

덕분에 손빨래는 원없이 했다. 하지만 대강대강 했다.

두 달에 한 번 빠는데 그 양이 얼마나 많겠는가!

팬티 30장, 러닝셔츠 30장, 양말 60개, 상의 20장, 하의 20장, 수건 30장이 기본이다.

꼼꼼히 하면 하루 종일 빨래만 해도 시간이 부족할 판이다. 빨리 마법을 익혀야 하는데 어찌 그럴 수 있는가?

하여 물에 담갔다가 대강대강 흔들어서 빨았다.

그래서 빨아도 냄새가 가시지 않는 것이다.

“흐음! 옷도 전부 새로 사야겠군.”

입던 옷 전부가 후줄근해진 데다 낡았다. 그래서 모두 버리기로 마음먹은 현수는 인근에 있는 백두마트로 향했다.

천지그룹과는 경쟁 관계인 재벌의 계열사이다.

이번엔 전과 달리 천천히 물건을 골라가면서 구매할 생각이다. 멀린의 기대보다 빨리 성취를 이룬 덕에 시간적 여유가 생긴 때문이다.

“어떻게 면도기 대부분이 외국 브랜드지? 국산은 없나?”

나직이 중얼거린 현수는 새삼 외국 상품에 대한 경각심을 느꼈다.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시장을 잠식당한 국내 기업들이 많을 수 있음을 상기한 것이다.

살펴보니 같은 품질이라도 국산이 외국 브랜드보다 저렴하다. 그런데 대부분이 외국 브랜드 제품을 가져가고 있다.

혹시 상품에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샘플 상품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면도를 해보기 전엔 알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겉보기엔 별 이상 없는 듯하다. 하여 수첩을 꺼내 구매하려는 국산 브랜드 면도기와 날의 모델명과 수량을 기록했다.

다음에 간 곳은 치약과 칫솔이 있는 매대다.

이곳에서도 한참을 머물며 상품들을 비교했다. 다음은 비누 매대다. 이곳에선 세면용과 세탁용을 결정했다.

상품을 결정하는 데 있어 현수는 한 가지 원칙을 세운 바 있다. 자신이 방문하게 될 아르센 대륙의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을 것으로만 가져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탁기용 세제는 고르지 않았다.

이렇게 마트 순방을 마치는 데 걸린 시간이 무려 여섯 시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야 할 품목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그동안 배가 고파 푸드 코트에서 비빔밥 한 그릇을 사 먹었을 뿐이다.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기에 현수는 계산대가 아닌 출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몇 발짝 떼기도 전에 마트 보안요원 둘이 앞을 가로막는다. 얼굴은 멀끔하지만 제법 덩치가 크다.

“손님, 잠시 멈춰주십시오.”

“네? 왜요?”

“저희랑 같이 보안실로 가주셔야겠습니다.”

“보안실이요? 거기가 뭐하는 데죠?”

“그건 알 거 없고, 일단 따라와 주십시오. 미리 경고하는데 순순히 따라오는 게 좋을 겁니다.”

“뭐라고요? 아니, 지금 누굴 뭐로 보고……?”

현수는 자신이 절도범으로 오인되고 있음을 깨닫고 버럭 소릴 질렀다. 보안요원들은 현수의 반응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양쪽에서 팔짱을 끼운다.

“놔요! 이거 왜 이래요? 놓으란 말이에요!”

현수는 당연히 저항을 했다. 멀쩡한 사람을 절도범으로 모는데 어찌 저항하지 않겠는가!

“당장 이 손 놓지 못해! 이이익!”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손을 빼려 했으나 역부족이다.

하긴 시간이 거의 멈춰 있다시피 했지만 29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근력이 형편없다. 그러니 운동으로 단련된 보안요원들의 근육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야, 이 새끼, 가방 뺏어!”

보안요원 가운데 상급자인 듯한 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수의 손에 들려있던 가방을 가로채 간다.

그러는 사이에도 현수는 보안요원들의 근육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힘을 줬다. 하나 이겨내지 못했다.

이들은 현수의 두 팔과 목덜미를 움켜쥔 채 보안실로 끌고 갔다.

가는 동안 매대에서 계산을 하려 기다리고 있던 아줌마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어디서 감히 도둑질이야? 젊은 놈이 벌써부터 도둑질이나 하고. 쯧쯧쯧!’이라는 시선이다.

더럽게 창피하다. 그리고 억울하다. 하나 힘이 없어 끌려가고 있다. 한데 어찌 저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런 죄도 없는데…….

하여 계속해서 손을 빼려 힘을 주었다.

그러자 보안요원이 한마디한다.

“아, 그 새끼, 참 더럽게 반항하네. 콱 한 대 갈기기 전에 얌전히 있어, 이 도둑놈의 새끼야!”

“뭐라고요? 도둑놈이라니요?”

“이 새끼가! 도둑놈 주제에 반항하지 말라고 했다. 왜? 티꺼워? 그럼 훔치질 말았어야지, 이 씨방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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