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6화 (16/1,307)

# 16

“산업 스파이라니요? 뭘 보고 산업 스파이라고 하는 겁니까? 증거 있어요?”

경찰이 있기에 더 이상의 폭력 행위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 현수는 강하게 나갔다.

“그래! 여기 적어놓은 게 우리 점포에 대해 조사한 거 아냐. 안 그래? 이걸 갖다 주고 얼마 받기로 했어?”

현수가 말을 하려는 순간 경찰 가운데 하나가 나선다.

“저어,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이런 일이 잦습니까?”

“물론입니다. 요즘은 물건값 10원 차이에 손님들 숫자가 달라지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대형마트들은 가격 보안에 각별히 신경 쓰고 있습니다.”

“그래요?”

“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경쟁사에서 최저가 정책을 쓴다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때문에 우리 마트에선 가격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는 중이었습니다.”

“잠깐만요. 아까는 나더러 물건을 훔친 도둑이라고 했는데 지금 와선 왜 산업 스파이로 말을 바꾸죠?”

현수의 항의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보안실장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건… 그야……. 하여간 이걸 왜 적었느냐고 물었어. 당신 어느 마트에서 보낸 사람이야?”

“조금 전에 마트끼리 가격 경쟁을 해서 가격 보안을 한다 했습니다. 맞습니까?”

현수의 물음에 보안실장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진다.

“맞아. 그래서 우리 보안요원들이 경쟁사의 스파이들을 잡아내느라 애를 먹고 있지.”

“그럼 그 수첩을 보십시오. 상품의 모델명 말고 값이 쓰여 있습니까?”

“여기……?”

보안실장이 무의식적으로 내민 수첩엔 마침 구입해야 할 면도기와 날의 숫자가 적혀 있다.

“이 점포에선 설마 면도기가 3원인 건 아니지요? 면도기의 날 네 개가 들어 있는 것은 6원입니까?”

“그건……!”

보안실장이 보니 상품의 모델명 옆엔 숫자들이 쓰여 있는데 가격은 아닌 듯 싶다.

수첩을 넘겨보니 의류들의 명칭이 쓰여 있다. 청바지 옆에는 3이라 쓰여 있고, 운동화에는 2라 쓰여 있다.

도마는 2, 주방용 식칼도 종류별로 전부 2라 쓰여 있다.

뒷장을 넘겨보았다.

냉장고 1이다. 노트북도 1이다. 이건 분명 가격이 아니다.

“자아,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 잡아다 욕하고 무지막지하게 구타하고, 그런 걸 무엇으로 보상하겠습니까? 아! 미안하다는 말과 돈 몇 푼은 거절합니다.”

“……!”

보안실은 고요했다. 경찰들은 현수가 구타당했음을 눈치채고 있었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건의 결말이 어찌 될지 궁금한 모양이다.

“제가 원하는 보상은 여러분 전부의 사표입니다.”

“……!”

“손님, 그건…….”

보안실장이 한마디하려는 순간 현수가 말을 잘랐다.

“손님이요? 아까 저더러 씨발 놈이라 했습니다. 도둑놈의 새끼라는 말도 했고, 싸가지없는 개새끼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걷어차고 짓밟고, 온갖 행패를 부렸습니다. 근데 이제 와서 손님이라고요?”

“……!”

현수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면서 경찰에게 시선을 돌렸다.

“경찰관님, 이 사람들이 멍 안 드는 곳만 골라서 때린다고 하고 때렸습니다. 아마 멍이 안 들었겠지요. 근데 이 사람들 처벌할 방법 없습니까?”

“그건… 증거가 없으면 곤란합니다. CCTV에 촬영된 것이라도 있으면 되지만 조금 전에 보니 그런 상황은 전혀 찍히지 않았습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유착 관계가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경찰의 말대로 처벌할 방법은 없는 모양이다.

분하지만 어쩌겠는가!

“손님,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저의 영업점에서 손님께 사과의 의미로 상품권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노여움을 푸시기 바랍니다. 어이, 최 대리, 가서 상품권 좀 가져와.”

“네, 실장님!”

아까 현수를 개 패듯 하던 최 대리라는 놈이 쏜살처럼 달려가 무언가를 꺼내온다. 실장은 그중 일부를 꺼내 봉투에 담았다. 백두마트의 로고가 새겨진 봉투이다.

“얼마 되지 않지만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보안실장이 봉투를 내밀었지만 현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5초 정도 지났을 때 경찰이 먼저 입을 연다.

“억울하겠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그러니 화해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냥 받으시죠. 화난다고 안 받으면 본인만 손해이니.”

“으음, 알겠습니다.”

현수는 봉투를 받아 가방 속에 넣었다. 그리곤 최 대리와 그 졸개를 째려보았다. 미안한지 고개를 숙인다.

“손님, 죄송합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보안실 직원 전부 고개를 숙인다. 현수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인사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경찰관님, 저 가도 되는 거죠?”

“물론입니다. 우리도 갈 건데 같아 나가시죠.”

말을 마친 경찰은 보안실 직원들을 보며 한마디한다.

“다음부터는 확인하고 신고하십시오. 그리고 현행범이라 할지라도 구타는 절대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

“오늘은 증거가 없어 그냥 가지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발생되고 증거가 있으면 우린 여러분을 체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

보안실 직원들은 대답없이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경찰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때 둘이 이야길 한다.

“아, 대체 이 마트는 왜 조폭 같은 애들을 고용해서 쓰지?”

“몰라. 뭔가 있겠지. 그나저나 괜찮으십니까?”

“네? 아, 네에. 여기저기 조금씩 쑤시고 결리기는 하지만 참을 만합니다.”

“근데 수첩에 쓴 거, 그거 왜 쓴 겁니까?”

“아, 그거요?”

현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혼자서 쓰려고 산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회사 기숙사에서 쓸 것들 모델명 확인한 거예요.”

“아, 그래요?”

별다른 점이 없기에 경찰 둘은 순찰차를 타고 사라졌다. 현수 역시 택시를 잡아탔다. 의도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9장 구타 사건에 대한 보복

“오랜만이군. 29년하고도 한 달 만인가?”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온 현수는 감개무량한 눈길로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생각났다는 듯 서둘러 보일러를 가동시켰다. 외출로 해놓았기에 냉기만 감돌고 있었던 때문이다.

현관 옆에 있던 우편물 함에는 각종 고지서들이 꽂혀 있었다. 전기, 전화, 가스, 신문, 상하수도, 통신, 카드사 등에서 돈 내라고 보낸 것이다.

돈 안 내면 가스, 전기를 끊겠다는 경고장도 있다.

ㄴ“쩝! 이 생각을 못했군. 그나저나 진짜 독하다. 돈 준다는 건 하나도 없고 모조리 돈 내라는 것만 있다니.”

현수는 고지서들을 정리했다. 수북하다. 물론 액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쓴 게 있어야 청구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그렇지, 전기 요금 1,840원 안 냈다고 전기를 끊어? 가스 요금도 그래, 1,230원 안 냈다고 차단해? 참 너무들 하는군. 하여간 인정머리없는 놈들이야.”

현수는 혀를 찼다. 그러면서 냉장고를 열었다. 텅 비어 있다. 하긴 몽땅 쓸어 담아갔으니 있을 게 없다.

수도를 틀어봤다. 당연히 잘 나온다.

잠시 후, 현수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인근 마트를 찾았다. 백두마트와는 다른 회사에서 운영하는 것이다.

“어서 오세요, 손님. 무엇을 찾으세요? 말씀만 하시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명찰을 보니 아르바이트 대학생이다.

“괜찮아요. 옷을 사려고 하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네, 손님.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셔요.”

참 사근사근하기도 하다. 하여 싱긋 웃음 지어 주었다.

“네, 필요하면 꼭 부르겠습니다. 후후.”

“어머나, 호호호!”

현수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옷을 골랐다.

이제 곧 겨울이 시작될 모양이다.

그렇다면 방한 효과가 좋은 옷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물었더니 등산복 코너에 기능성 의류가 많다고 한다. 언뜻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다.

하여 등산복 코너에서 옷을 골랐다. 바지는 기모가 들어 있는 것으로 골랐다. 이게 따뜻하다고 해서 고른 것이다.

상의는 폴라플리스 재질로 만들어진 것으로 골랐다. 최고의 보온 소재로 검증된 원단이라고 한다.

양말도 바닥이 두툼한 등산 양말을 여러 켤레 샀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등산화도 샀다.

이제 곧 아르센 대륙으로 갈 텐데 그곳은 대한민국과 달리 발달된 도로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당장 입을 팬티도 없어 그것까지 모두 사자 한 짐이다.

기분 좋은 쇼핑을 마친 현수는 집 근처에서 김치찌개를 사 먹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더욱 맛이 있는 듯하다.

“어머, 김현수 씨! 지금 어디에요?”

“회사 근처입니다.”

“그래요? 어딘지 문자로 넣어주시고 기다리세요. 이제 곧 퇴근이니. 건강은 괜찮은 거예요? 이렇게 나와서 다녀도 돼요? 그동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

“어머, 제가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물었죠? 하여간 어디 있는지 문자로 넣어주시고, 넉넉잡고 한 시간만 기다려 줘요. 금방 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강연희 대리의 음성엔 반가움이 그득했다. 그래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강 대리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자신의 전화에 이처럼 반색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던 때문이다.

그래서 기다리는 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29년하고도 1개월 만의 만남이다.

강산이 세 번쯤 변했을 세월이지만 강 대리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녀의 시간으론 두 달이 흐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못 견디게 보고 싶어 마음이 설레었다.

강연희 대리가 현수의 눈앞에 나타난 건 통화를 하고 정확히 1시간 34분 만이다.

오는 동안 조금 늦는다고 문자가 왔기에 걱정하진 않았다.

“미안해요. 갑자기 구조계산팀에서 업무 협조 요청이 들어와서. 오래 기다렸죠?”

강 대리는 말을 하며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그리곤 그걸 가지런히 접어 무릎에 올려놓는다.

조신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이다.

“어머! 안색이 창백해요. 진짜 괜찮은 거예요?”

걱정스런 눈빛이다. 현수는 일순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부모를 제외하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 강 대리님 염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현수는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강 대리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너무도 보고 싶었던 얼굴이다. 긴긴 세월 동안 마음의 위로가 되어주었던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움은 어느새 사랑으로 발전해 있다. 그래서 예전엔 안 그랬지만 이젠 목숨마저 걸 수 있는 존재이다.

“어머,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현수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연희가 얼른 콤팩트10)를 꺼낸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이쪽저쪽을 살피는 모습이 콱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다.

“치이, 아무것도 안 묻었잖아요. 근데 왜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봤어요?”

“강 대리님이 너무 아름다워서요. ……. 사랑합니다.”

“네……? 뭐라고요?”

현수의 나직한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강 대리가 반문했다.

“아, 아닙니다. 그냥 뭐가 묻은 거 같아서 봤습니다.”

“그랬군요. 근데 아무것도 안 묻었네요. 병 때문에 시력이 조금 나빠지셨나? 그나저나 그동안 잘 있었어요?”

“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머무는 데는 대체 어디예요? 어딘지 가르쳐 주면 찾아가기라도 하잖아요. 근데 아무것도 안 알려주고 전화를 해도 받질 않으니. 궁금했단 말이에요.”

토라져서 쫑알대는 여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제가 있는 곳은 깊은 산속이에요. 근데 올라가는 길이 좀 험해서. 강 대리님이 오실 만한 곳은 아니에요. 그래서 알려 드리지 않은 겁니다.”

“어머,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제가 못 갈 곳이 어디 있어요. 산행 잘하는 거 잊으셨어요? 그리고 전화는 왜 안 받은 거예요?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알아요?”

그간 수십 통도 더 전화가 왔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결계 안에서는 통화가 안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야 안 것이다.

“죄송합니다. 전화를 못 받은 것은 통화가 어려운 지역이라 그렇습니다. 물어봤더니 근처에 군부대가 있는데 전파를 차단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좋아요. 그건 그렇다 쳐요. 어디에 머무는지 약도 그려줘요. 안 그럼 오늘 못 가요. 아셨죠?

현수는 진땀을 흘렸다. 순간적으로 둘러대야 하는데 갑작스레 말문이 막힌 때문이다.

보아하니 진짜 약도를 안 그려주면 안 보낼 모양이다.

그러는 한편 대체 왜 이러나 싶다.

퀸카 중의 퀸카인 강연희 대리가 같은 부서도 아닌 곳에 근무하는 후배 사원을 대함에 있어 너무 살갑다.

마치 열렬히 사랑하는 연인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하여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지만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한 가지 말씀 안 드린 게 있는데, 제가 머무는 곳에 계시는 어르신이 외인, 특히 여자들을 꺼리십니다.”

“네에? 왜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무튼 여자들이 올라오는 것을 너무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못 알려 드리는 겁니다.”

“치이, 괜히 가르쳐 주기 싫어서 그러는 거죠?”

“아, 아닙니다. 진짜 아닙니다.”

“좋아요. 언제 그리로 가요?”

“내일쯤 내려가야 합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