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근데 서울엔 왜 온 거예요? 공기도 탁한데.”
“그곳 어르신이 심부름을 시키셔서 뭘 좀 사러 왔습니다.”
“그래요? 그게 뭔데요? 샀어요?”
말을 하며 현수의 옆자리를 살핀다. 당연히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 아뇨.”
“그럼 잘 되었네요. 저랑 같이 가서 사요.”
“네……? 아, 네에.”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갈 거죠?”
“내일이요? 아, 그럼요. 내일 사야죠.”
현수는 계속해서 당황하고 있다. 하나 연희는 현수의 이런 허둥거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호호, 그럼 우리 내일도 또 만나야 하는 거네요? 그렇지 않아도 내일 월차를 내놨는데 정말 잘됐어요.”
“월차요? 그럼 뭔가 용무가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회사 방침이 의무적으로 월차를 쓰게끔 바뀌었어요. 현수 씨 없는 사이에 회사 참 좋아졌죠?”
“아, 그렇군요.”
현수와 연희는 담소를 나누며 저녁 식사를 했다. 그리곤 천천히 산책하듯 거리를 누볐다.
가는 동안 맛있어 보이는 거리 음식을 사 먹기도 했다.
하루빨리 나아지기 위해 많이 먹어야 한다면서 연희가 이것저것 권하는 바람에 배가 빵빵해졌다.
그러고 보니 강 대리는 생긴 것과는 달리 참 소탈하다.
생긴 것만으로 따지면 거리 음식 같은 건 질색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안 그렇다. 뭐든 맛있게 먹는다.
어쨌거나 좋은 분위기였다. 어떤 술 취한 미친놈이 연희의 미모에 혹해 졸졸 따라다닌 것만 빼면.
무서워하거나 질겁해야 함에도 연희는 그러지 않았다. 하도 많이 당해 이젠 만성이 되었다고 한다.
현수가 나서려 했으나 환자가 어딜 나서냐고 만류를 하곤 아주 침착하게 경찰서에 신고를 한다.
잠시 후 순찰차가 나타났고, 스토커 노릇을 했던 놈은 연행되어 갔다.
능숙한 처리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 정도 되는 여자라면 쫓아다닐 놈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현수는 연희와 더불어 동의보감이나 동의수세보원 등 한의학과 관련된 책들을 샀다.
또한 오행침법이 기록된 침술서 등도 구매했다.
내친김에 멸균 침과 알코올, 그리고 솜도 구입했다. 그래야 구색이 맞기 때문이다.
현수가 한의학과 침술에 관련된 책들을 구매한 것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였다.
한동안 머물게 될 아르센 대륙엔 현대의학이 없을 것이다.
치유 마법 중에 힐(Heal), 그레이트 힐, 컴플리트 힐, 리커버리 등이 있다. 그런데 아직 익히지 못했다. 다른 걸 익히는 게 더 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응급용으로 쓸 생각을 하고 구입한 것이다.
그리고 산속에 있다는 어르신이 볼 책이라 둘러댔으니 그에 합당한 것을 고른다고 고른 것이다.
하나 연희 입장에선 약간 달리 받아들였다.
현재 현수가 있는 곳은 강원도의 깊은 산속이다. 요양 차 들어가면서 6개월치 약을 가지고 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엔 특이한 능력을 지닌 노인이 있다.
현수가 약을 먹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하는 듯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겨 나서기는 했다.
그런데 기억이 가물거려 참고 서적으로 책을 구해오라고 한 듯하다. 그래서 한방 관련 서적과 침 등을 산 것이다.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참 기막힌 추리이다.
어찌 되었든 현수가 구입한 것은 한의과 대학생들이 전공 공부할 때 쓰는 전문 서적들이다.
예전의 현수였다면 단 한 권도 독파하지 못할 어려운 내용들이 즐비하다.
하나 이젠 다르다.
전능의 팔찌에 각인되어 있는 브레인 리프레쉬 마법에 장시간 노출되어 있으면서 IQ가 180쯤 되었다.
하여 웬만한 것은 한 번 읽는 것만으로도 이해가 된다. 정신 차려 읽는다면 외우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돌아다니는 내내 연희는 재잘거리며 즐거워했다.
오후가 되어 돌아갈 시간이 되자 자신의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한데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가야 할 현수는 애써 고사했다.
다음날, 현수는 청계천 상가들을 돌아다녔다.
그리곤 방독면을 구입했다. 페이스 스트레인(Face Strain) 마법으로 외모를 바꾼 뒤 현금을 주고 샀다.
2012년 12월 3일 월요일 새벽이 되자 현수는 수모를 당했던 마트로 갔다. 백두마트 서초점이다.
출입구마다 월간 계획표에 쓰여 있던 대로 새벽 3시부터 살균 및 해충 구제를 위한 소독 작업이 진행되어 일찍 문을 닫는다는 공고문이 붙어 있다.
새벽 2시 45분, 마트에서 제법 떨어진 주택가 어두운 골목에 있던 현수는 방독면을 쓴 뒤 마나를 팔뚝에 모았다.
전능의 팔찌가 나타나자 주황색 보석에 손을 올려놓고 마나를 불어넣으며 나직이 소리쳤다.
“퍼펙트 트랜스페어런시(Perfect Transparency)!”
새벽 2시 58분.
현수는 마지막으로 보안요원이 나가면서 닫히는 문 사이로 스며들었다.
잠시 후, 희뿌연 연기가 드넓은 매장을 가득 채운다. 대체 무엇으로 만드는지 몰라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이다.
“오올 아이(Owl Eye)!”
매장 안은 희뿌연 연막으로 가득하여 아무것도 분간되지 않는다. 하나 현수에겐 아니다.
어제와 그제 이틀 동안 이실리프를 뒤져서 찾아낸 마법을 익혔기 때문이다. 오올 아이는 올빼미의 눈이란 뜻으로 어둠이나 안개를 뚫고 볼 수 있는 4써클 마법의 명칭이다.
물론 세상엔 없다. 멀린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매대 위의 물건을 본 현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쁜 놈들, 니들도 한번 당해봐라. 아공간 오픈!”
현수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매대 위의 모든 것이 아공간 곳으로 빨려들어 간다. 지하 1층에서 시작하여 지상 3층까지 매장에 있던 모든 물건이 사라졌다.
창고 속의 모든 물건들 역시 사라졌다.
현수가 연막을 뚫고 마트 밖으로 나온 것은 새벽 4시가 조금 넘었을 때이다. 어마어마한 양의 물건들을 위치 이동시킨 것치고는 짧은 시간이다.
마트에서 제법 떨어진 곳까지 이동한 현수는 주위에 단 하나의 CCTV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법을 풀었다.
그리곤 유유히 걸어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 아침, 현수는 일부러 가판대까지 나가 신문을 샀다. 예상대로 1면 톱기사이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희대의 절도 사건 발생!
투명인간이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한 절도 행각!
굵은 활자 아래엔 누군가 써 내려간 기사가 실려 있다.
3일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에 서울 서초구 잠원동 소재 백두마트 서초점의 모든 상품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날 대형 할인마트인 백두마트에서는 살균과 해충 구제를 위한 연막 소독이 실시되었다.
소독 직전까지 멀쩡하던 상품들이 소독을 마쳤을 땐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기가 막힐 일이다. 불과 3시간 만에 대형 할인마트의 모든 상품이 싹쓸이된 것이다.
그러나 전무후무할 대담한 범행의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백두마트 관계자에 의하면 엄청난 물량의 상품을 모두 가져가려면 15톤 카고 트럭이 적어도 200여 대는 동원되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날 주변의 모든 CCTV의 화면을 살펴보았으나 동시간대에 트럭이 접근한 흔적은 없다.
그럼 대체 누구의 소행인가?
또한 어떤 방법으로 그 많은 상품을 가져갔을까?
마트에는 껌 하나, 라면 한 봉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신출귀몰하고 기절초풍할 일이다.
현재 경찰은 범행의 윤곽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누가 범행을 저질렀던 간에 이번 행위는 역사책에 기록되어야 할 정도로 엄청난 행각이다.
경찰은 특별수사대를 구성하여 유사 범죄 행위 전과자들을 중심으로 탐문 수사를…….<하략>
신문을 보던 현수는 히죽 웃었다.
‘미친놈들. 유사 절도 행위란 게 존재할 수나 있어? 총 물량이 3,000톤이라는데.’
다른 신문의 기사도 대동소이하다.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는데 아무도,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그러니 신문사마다 나름대로 소설을 쓴다고 쓰고 있다. 하나 어찌 상상이나 하겠는가!
5써클 마법사가 모든 상품을 아공간에 쓸어 넣었다는 상상은 판타지 소설을 읽은 학생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신문을 접고 TV를 켜 24시간 뉴스 방송으로 채널을 옮겼다. 기자가 누군가와 인터뷰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낯이 익다.
하여 아래의 자막을 보니 백두마트 보안실장이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이놈이 준 봉투엔 5만원어치 상품권이 들어 있었다. 사람 놀리는 것도 유분수라 생각한 현수는 즉각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사람 가지고 장난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야, 이 개새끼야, 넌 분명 산업 스파이야. 근데 증거가 없어서 풀어준 거야. 경찰만 없었다면 고문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았을 거야. 그날 운이 좋은 줄이나 알아. 안 그랬으면 아주 피똥을 싸게 조져 버렸을 테니까. 만일 다시 한 번 이런 전화를 하면 네놈 어디 사는지 아니까 애들 보내서 확 보내 버리는 수가 있어. 알았어?”
그때 현수는 대기업 직원이라는 놈이 조폭과 거의 다를 바 없음에 어이가 없었다.
하여 상대하기조차 귀찮아 전화를 끊었었다.
이렇듯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개 패듯 패고는 겨우 5만 원으로 무마하려 한 놈이니 마음에 들 리 없다.
‘후후, 모가지 1순위가 인터뷰를 하는군.’
보안을 담당하다 일을 당하였으니 파면당할 일만 남은 놈이다. 아울러 이놈 밑에 있던 조폭 떨거지들 역시 찍소리 못하고 잘릴 것이다.
현수가 마트를 턴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 알고 보면 뒤끝 있어. 어디 곧 백수가 될 놈이 뭐라 지껄이는지 볼까?’
“그러니까 연막 소독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상품이 있었는데 소독을 마치고 나니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CCTV에 찍힌 것을 확인해 보니 그렇습니다.”
“연막 소독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했습니까?”
“3시간입니다.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딱 3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단 3시간 만에 그 많은 물건이 사라졌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마트 안에 있던 상품의 총량은 어느 정도 됩니까?”
“15톤짜리 카고 트럭으로 약 200대 분량 정도 됩니다.”
“그럼 약 3,000톤이란 건데 이걸 모두 가져가는 데 3시간이 걸렸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경찰이 범행 당일 마트의 CCTV는 물론이고 인근에 설치된 모든 CCTV의 화면을 검색한 것은 알고 계십니까?”
“네, 보안책임자로서 저도 같이 있었습니다.”
“그럼 그날 그 시간대에 트럭이라곤 단 한 대도 접근하지 않았다는 발표가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마트 인근에 주차하는 것은 물론이고 근처를 지난 것도 없었습니다.”
“그럼 아무런 운반 수단도 없었는데 3,000톤이나 되는 물량이 사라졌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그럼 그날 그 시각에 누군가가 마트로 숨어드는 광경은 보지 못했습니까?”
“네, 분명히 없었습니다. 연막 소독이 실시되는 동안 저희 보안요원들이 모든 입구 앞에 서 있었거든요. 따라서 누군가의 접근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드나든 사람도 없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혹시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고, 아무런 운반 수단도 없는데 3,000톤이나 되는 물량이 사라졌습니다. 이걸 설명할 방법이 있습니까?”
“그, 그건…….”
보안실장이 대답을 못하자 화면이 클로즈업되어 기자의 못생긴 얼굴이 단독으로 비춰진다.
“아시다시피 3,000톤은 아무나 들 수 있는 무게가 아닙니다. 또한 15톤 카고 트럭 200대 분의 부피 또한 작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 트럭도 없고 드나든 사람도 없는데 물건은 모두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럼 이 많은 물량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모든 것이 의혹투성이입니다. 이상 YTM 뉴스의 이상해 기자였습니다.”
이날 모든 언론이 하루 종일 이 사건에 대해 떠들었다.
그러는 동안 국회에서는 슬며시 자신들의 세비를 인상하는 안을 전격적으로 통과시켰다.
또한 보좌관들의 급여 인상안도 통과되었다.
웃기는 것은 그간 격렬한 대립 관계를 맺고 있던 여야가 합의해서 거의 만장일치로 법안을 통과시켰다는 것이다.
같은 날, 정부는 도시가스 요금 4.8% 인상과 수도 요금 4.5% 인상, 그리고 전기 요금까지 4.6%를 인상했다.
얼마 전에 끝난 보궐선거 때 여당은 서민 경제를 위해 절대 올리지 않겠다고 공약했었다.
그런데 혼란을 틈타 기습적으로 인상해 버린 것이다.
어쨌거나 현수는 밀린 공과금을 모두 내고 차원 이동을 하여 멀린의 레어로 갔다.
그리곤 가장 먼저 멀린이 남긴 비망록을 보았다.
거기엔 현수를 위해 기록해 놓은 것들이 있었다.
지구는 마나가 초희박인 세상이다.
그렇기에 5써클에 이르기까지 전능의 팔찌 덕을 보아야 했다. 마나석으로부터 마나를 공급받은 것이다.
하나 카이엔 제국이 있는 아르센 대륙은 지구에 비하면 대기 중 마나의 양이 액체처럼 많은 곳이다.
그럼에도 7써클에 이르기 위해선 막대한 양의 마나가 필요하다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