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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19화 (19/1,307)

# 19

레어를 떠난 현수는 촉각을 곤두세운 채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전진했다.

패밀리어 마법으로 작은 짐승을 척후로 보내는 방법도 있으나 아직 마법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지경은 아니다.

수련만 했지 실전에서 써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첫날은 괜찮았다. 별다른 조우 없이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녁이 되자 텐트를 쳤다.

굳이 불을 켜지 않아도 어둠 속을 꿰뚫어 볼 수 있기에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엔 그냥 우두커니 앉아서 전방을 주시했다.

참 평화로운 풍경이다.

약간 쌀쌀한 바람이 살랑인다. 그런 바람이 불 때마다 아직 지지 않았던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어 휘날린다.

진짜 자연이다.

시간이 흘러 해가 떨어지자 예상했던 소리들이 들린다.

바람에 나뭇잎 비벼지는 소리, 흔들리는 가지끼리 부딪치는 소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들의 울부짖는 소리, 어디에선가 목숨을 건 혈투가 벌어지는 소리 등이다.

혹시 몰라 앱솔루트 배리어를 치니 소리마저 차단된 듯 고요하다. 현수는 그 안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날 아침, 현수는 가볍게 몸을 풀고는 텐트를 걷었다. 그리곤 아공간에서 라면을 꺼내 그것을 끓여 먹었다.

“크으음, 입맛 없을 땐 라면도 괜찮군. 그나저나 공기가 상쾌해서 그러나? 피곤이 덜한 것 같군,”

어제 제법 먼 거리를 긴장한 채 걸어 밤엔 조금 피로를 느꼈었다. 그런데 말끔히 풀린 것이다.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100여 m 정도 떨어진 곳에 무언가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감각을 예민하게 하는 샤프 히어링(Sharp Hearing) 마법 덕이다.

‘뭐지? 오크? 고블린? 아무튼 준비해야겠군. 아직 안개가 끼어 있으니 체인 라이트닝이 좋겠어.’

준비를 마친 현수는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50m쯤 갔을 때이다.

“취이익! 인간이다! 먹자!”

“취이익! 먹을 거다!”

“아, 저건! 오크구나! 으윽, 이게 무슨 냄새야?”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두 마리 오크를 본 현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구역질을 유발하는 악취 때문이다.

이런 냄새는 시골 돈사에서 맡아본 적이 있다.

“젠장! 생긴 것도 돼지 같은데 냄새까지 비슷해? 에잇! 체인 라이트닝!”

파지직! 파지지직!

“케에엑! 크와아아악!”

현수가 레어를 벗어나 아르센 대륙에 와서 처음 만난 존재들은 고압 전류에 의한 감전사를 당했다.

보자마자 마법으로 이들을 해치운 것은 멀린이 남긴 기록을 통해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하나 처음으로 생명체를 죽였다는 찝찝한 기분 때문에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서서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오크들은 정말 흉측하게 생겼다.

어디서 주운 건지 알 수 없지만 녹슨 도끼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에 의해 상처를 입으면 파상풍이 우려되었다.

‘음……! 지구에 가면 파상풍 예방주사부터 맞아야겠군.’

발로 툭툭 오크의 사체를 건드리던 현수는 이내 관심을 끊고 가던 길로 나섰다.

나흘 동안 오크는 열세 번, 고블린은 열한 번, 트롤도 한 번 만났고, 오우거도 두번이나 만났다.

그런데 너무 쉽다.

비교적 저써클 마법인 파이어 랜스, 또는 체인 라이트닝만으로도 모두 물리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수는 몰랐다.

자신이 펼친 3써클 파이어 랜스가 아르센 대륙 6써클 마법사들의 익스플로전과 비교될 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물론 멀린의 마법이기에 이런 위력을 보이는 것이다.

레어를 떠난 지 닷새 만에 현수는 숲 가장자리에 도달했다.

몬스터들을 만나서 싸우는 것에 흥미를 잃었기에 플라이 마법을 펼쳐 고속 이동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이동한 거리가 20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처음 며칠 동안 어디가 어딘지 가늠할 수 없어 길을 잃고 헤맨 때문이다.

멀린의 레어는 바세론 산맥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서 외곽까지의 거리가 이 정도이니 산맥은 그 폭이 무려 400㎞에 달하는 것이다.

“헛……! 이건 연기 냄새?”

아주 어릴 때 시골에 위치한 외가에서 맡았던 냄새이다.

반가운 마음이 든 현수는 황급히 전방을 주시했다. 멀리 얼기설기 엮어놓은 목책이 보인다.

“30가구쯤 되는군. 화전민인가?”

현수는 자신이 이방인임을 잊지 않고 있다. 하여 마을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위험한 산적 소굴은 아닌 듯하다.

사실 산적 소굴이라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7써클 마스터는 마탑 탑주와 비교했을 때 우월한 경지이다.

100여 명으로 구성된 기사단 10개와 대적한다 할지라도 전체를 몰살시킬 능력을 지녔으니 산적 따위들이 어찌할 존재는 아닌 것이다.

“좋아, 일단 부딪쳐 보자.”

현수는 상대방에서 자신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다가갔다.

“게서 멈추시오. 어디서 오는 누구시오?”

창을 들고 긴장된 시선으로 물은 이는 30대 후반쯤 되는 사내다. 굵은 팔뚝과 건장한 체격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고된 농사일로 단련된 듯하다.

경계하는 시선으로 현수의 아래위를 훑어보는 사내의 눈에는 긴장된 빛도 담겨 있었다.

“반갑소. 나는 바세른 산맥에서 내려왔소. 지나던 길인데 이 마을에서 잠시 쉬어가도 되겠소?”

멀린이 남긴 비망록엔 아르센 대륙에서 마법사라는 존재가 어떤지 기록되어 있다.

평민이라도 마법사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더구나 7써클 마스터쯤 되면 평민 출신이라 할지라도 제국의 후작위를 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똑같은 평민이면서도 마치 제 집 종 부르듯 거만하게 하대를 한다.

하나 현수는 이 대륙에 와서 처음 본 사내를 위압적으로 대할 생각이 없기에 반말은 하되 부드럽게 응대했다.

이에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요? 방금 저 산에서 내려왔다고 했소? 그럼 일행은 어디에 있소? 설마 혼자 내려온 것은 아니겠지요?”

사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조금 전 현수가 있던 곳이다. 그러니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나는 일행이 없소. 혼자 내려왔소이다. 그리고 저 산에서 내려온 것 맞소.”

로브를 걸쳤고, 거창한 스태프를 들고 있어 사내는 현수가 마법사일 것이라 짐작은 했다. 하나 검까지 차고 있어서 혹시 폼은 아닌가 했다.

가끔 이러고 다니는 사기꾼들이 있기는 하다. 물론 매우 드물다. 진짜 마법사에게 걸리면 죽음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세른 산맥에서 혼자 내려왔다면 마법사가 틀림없다. 그것도 상당히 고위 마법사일 것이다.

산속엔 고블린과 오크는 물론이고 트롤과 오우거가 우글거린다. 그런 곳을 단신으로 뚫고 나오려면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내의 음성이 금방 공손해진다.

“저어… 혹시 마법사님이십니까?”

“마법사요? 흐음, 마법을 익히긴 했소. 근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오?”

“아, 아닙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감사하오.”

현수는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마법사님, 소인은 엘베른이라고 합니다요.”

“하인스 킴이라 불러주시오.”

현수라는 이름을 대봐야 발음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대마법사 멀린도 그러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하산하며 이곳에서 사용할 이름을 작명했다.

자신의 이름인 현수와 가장 가까운 걸 골랐기에 하인스라 정한 것이다.

“헉……! 귀족이십니까?”

사내의 음성은 더욱 공손해졌다. 평민은 성이 없다. 그런데 킴이라는 성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하하, 그런 게 중요하오? 그냥 잠시 쉬어갈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네, 알겠습니다. 먼저 저희 알베제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근데 워낙 마을이 적어 여관이 없습니다. 촌장님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요.”

“고맙소. 그냥 길만 알려줘도 되는데…….”

“아닙니다요. 촌장님께서 귀빈께서 마을을 방문하면 반드시 알리라 하셨으니 제가 안내해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엘베른은 대답은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앞장을 섰다. 현수는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 똑같이 생긴 집이라 어떤 것에 촌장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이 마을의 촌장인 마레바라 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사내는 50대 후반이다.

그런데 한쪽 다리를 절고 있다. 지저분한 붕대 비슷한 걸로 감아놓은 걸 보니 상처 입은 듯하다.

“반갑소. 하인스 킴이라 하오.”

“귀한 마법사님께서 오셨는데 마땅한 곳이 없습니다요. 불편하고 누추하더라고 오늘은 제 집에서 머물러 주십시오.”

“배려에 감사드리오. 하나 나는 텐트에서 머물 것이니 마음 쓰지 않아도 되오.”

“네에……? 텐트라니요?”

“아, 그건 내가 잠을 잘 때 쓰는 일종의 집이라 생각하면 되는 것이오.”

“네에……? 집을 들고 다니십니까?”

촌장인 마레바는 현수의 말에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들이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안다.

하나 집까지 들고 다닌다 하기에 놀란 것이다.

텐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이런 반응일 것이다. 하여 현수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생각하는 것만큼 큰 집이 아니오. 그저 잠만 잘 수 있는 것이오. 근데 그러려면 약간의 공터가 필요하오.”

“공터라면… 아, 마법사님께서 편하신 곳을 쓰십시오. 농토만 아니면 됩니다.”

“그렇소? 알겠소.”

말을 마친 현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아까 왔던 목책 안쪽에 제법 너른 공터가 보인다.

“저기 저쪽의 땅을 조금 쓰겠소.”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그런데 식사는?”

“그것도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알아서 해결하겠소.”

“아! 그렇습니까? 그거 다행입니다. 변변히 대접할 만한 것이 없어 걱정이었습니다.”

“그렇소? 아무튼 감사하오. 이곳에서 며칠 쉬었으면 하는데 그것도 가능하오?”

현수는 이곳에서 아르센 대륙에 대한 것들을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책에서 보기는 했지만 이론과 실제는 늘 다르지 않던가! 하여 며칠 머물 생각을 한 것이다.

“물론입니다. 원하시는 만큼 아주 오래 계셔도 됩니다.”

“하하! 고맙소. 이따 텐트를 다 치고 나면 한번 와주시오. 상처를 입은 듯한데 내가 한번 살펴보겠소.”

“네에. 아이고, 고맙습니다요.”

촌장을 뒤로하고 목책 쪽으로 다가가는데 아이들은 물론이고 온 동네 사람들이 졸졸 따라다닌다.

아마도 신기해서 그럴 것이다.

피식 실소를 지은 현수는 아공간에서 텐트를 꺼냈다. 꺼내서 던지기만 하면 펼쳐지는 원터치 자동 텐트이다.

현수가 텐트를 던지자 허공에서 자동으로 모양을 잡더니 펼쳐진다.

“우와아아……!”

사람들의 함성이 들린다.

한국에선 별일 아닌 것이지만 이곳 사람들의 눈엔 영락없이 신기한 마법으로 보일 것이다. 하여 피식 실소를 지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면서 텐트 안으로 들어간 현수는 공간 확장 마법을 구현시켰다.

그러자 일어서서 걸어 다닐 정도로 넓어진다.

텐트 내부는 평수로 따지자면 1평 조금 넘는다. 그런데 이것이 20평 정도로 넓어진 것이다.

아공간에서 싱글 침대를 꺼내 한쪽에 내려놓았다. 이어서 이불과 베게까지 꺼내놓았다.

다음엔 식탁을 꺼냈다. 물론 의자들도 꺼냈다. 다음엔 구급약품을 꺼냈다. 백두마트를 털 때 딸려온 것들이다.

설치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촌장이 감탄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마법사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응? 아, 하하! 뭐, 별거 아니오.”

“별게 아니라니요? 제 생전에 이토록 신기한 마법은 처음 봅니다요. 혹시 안을 들여다봐도 되는지요?”

“그러시오. 들어오는 김에 상처도 한번 봅시다.”

“아이고, 고맙습니다요.”

텐트로 들어선 촌장은 밖에서 볼 때완 달리 상당히 넓다는 것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설명이 필요하다.

“흐음, 실내 공간에 공간 확장 마법을 걸어 밖에서 볼 때보다 안이 훨씬 넓은 것이오.”

“아, 그렇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자아, 이쪽에 앉아보시오.”

현수가 식탁 의자를 권하자 두말 않고 앉는다.

환부를 보려 고개를 숙이는 순간 썩는 냄새가 난다.

천천히 붕대를 풀었다. 본시 붕대가 아니라 옷가지였는데 찢어서 감은 모양이다.

고름이 얼마나 흘러나왔는지 묵직한 느낌이 든다.

붕대가 모두 풀린 뒤 드러난 상처는 끔찍했다. 붕대가 고름에 젖는 바람에 공기가 통하지 않아 살이 불어 있다.

그런데 더러운 고름과 진물이 뒤섞여 흘러나온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이소?”

“얼마 전부터 마을 밖에 새끼 딸린 샤벨타이거가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놈에게 당한 흔적입니다.”

보아하니 날카로운 발톱에 할큄을 당했다. 제법 큰 살점이 떨어져 나갔는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화농된 것이다.

“상처는 얼마나 된 것이오?”

“한 열흘 되었습니다요.”

“이 정도면 통증이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뎠소?”

“그냥 참아야지 뭐 어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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