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아, 그렇군요.”
알론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곤 입을 다물었다. 사람은 괜찮아 보인다. 하나 속까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괜스레 마법사의 뜻을 거스르면 자신만 손해이다.
그렇기에 얼른 입을 닫은 것이다.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든 현수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했다.
“나는 이실리프 마탑 소속이라네.”
마법서 이실리프는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 후작이 저술했고,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실리프라는 말을 모를 것이라 생각하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반응이 예상 밖이다.
“네에? 이, 이실리프 마탑이요?”
13장 이실리프의 여인
“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당연히 없을 것이란 대답을 기대했다. 그런데 엉뚱한 소리를 한다.
“아아! 왜 마법사님께서 멀린으로 가려 하시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
알론은 갑자기 타고 있던 말에서 내린다. 그리곤 정중히 고개 숙이며 입을 열었다.
“이실리프 마탑이라면 멀린에 있는 아드리안 마탑의 추종을 받는 위대한 마탑이 아닙니까? 하아, 위대한 마탑에서 오신 분이란 걸 제가 미처 몰랐습니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알론은 깊숙이 허리 숙여 인사를 한다.
‘뭐야? 이게 대체 무슨 황당 시츄에이션이지?’
현수는 알론이 어떻게 이실리프의 존재를 아는지 궁금했다.
“이실리프 마탑을 어찌 알지?”
“아아! 마법사님께서는 수련을 하시느라 내용을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소인이 자세히 설명해 올리겠습니다.”
갑자기 알론의 태도가 정중을 넘어 공손해졌다. 어리둥절하지만 어쩌겠는가? 설명을 기다렸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 위대하신 9써클 대마법사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 후작 각하께서 현재의 아드리안 공국을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알론의 설명은 이어졌다.
당시의 공국은 발칵 뒤집혔다.
이미 마나의 품으로 돌아간 것으로 알았던 시조가 살아서 왔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게다가 인간이 한 번도 오르지 못한 9써클 마스터이다. 중간계의 조율자라는 드래곤과 거의 동급이 된 것이다.
그때의 공왕은 온갖 예를 다해 멀린을 모셨다. 그리곤 수도의 명칭을 멀린으로 바꿨다.
멀린을 추종했던 마탑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아드리안 마탑이다. 이는 공국을 수호하는 힘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다.
당시 마탑의 탑주는 6써클 유저였다.
그런 그에게 9써클 마스터가 어떤 존재이겠는가!
멀린은 신처럼 모셔졌다.
그때의 마탑주는 멀린과의 대화에서 이실리프라는 명칭을 들은 바 있다.
왜 마탑을 창건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나중에 생각해 볼 일이라 하였다. 그럼 마탑을 만들면 명칭은 무엇이라 하겠느냐는 물음에 무심코 이실리프라 하였던 것이다.
멀린이 레어로 돌아간 뒤 아드리안 마탑은 인부들을 불러보았다. 장차 올지 모를 이실리프 마탑 사람을 위한 방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온통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방이다.
방이라 부르지만 실상은 하나의 방이 아니다. 하나의 큰 건물에 딸린 여섯 개의 작은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중심이 되는 큰 건물은 6각형 모양이다. 그래서 이곳을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Hexagon of Yisilipe)」라 한다.
줄여서 헥사곤이라 부르기도 한다.
주위를 둘러싼 여섯 개의 건물엔 각기 주인이 있다.
어쨌거나 메인이 되는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는 만들어진 후 지금껏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언제 올지 모를 주인을 위해 늘 여섯 명의 여인이 대기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여인들을 일컬어 이실리프의 여인(Lady for Yisilipe)이라 부른다.
헥사곤의 주인이 방문했을 때 시중 들어줄 여인들이다. 하지만 여느 귀족가의 시비와는 격이 다르다.
고위 귀족의 여식 가운데 얼굴 예쁘고 몸매 출중하며, 영리하고 지혜로운 여자들을 가려 뽑기 때문이다.
열여덟 살에 뽑힌 여인은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에서 24세가 될 때까지 머문다. 이런 전통이 이어지는 이유는 이실리프 마탑에서 올 사람을 잡아두기 위함이다.
아드리안 마탑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결국 7써클 마스터가 마탑주가 되었다.
하나 8써클을 넘어본 이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멀린이 9써클 마스터가 되었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러니 이실리프 마탑이라면 분명 9써클 마법서가 있을 것이다.
이를 얻기 위해 일종의 미인계를 쓰려는 것이다.
어쨌거나 24살이 될 때까지도 헥사곤의 주인이 오지 않으면 그때서야 혼인을 한다.
지금껏 이 전통이 깨진 예는 없다.
헥사곤에 머물며 이실리프의 여인이 되기 위한 수련 과정을 거친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드리안 공국에 있어 멀린 및 이실리프라는 이름은 신성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드리안 공국의 공주가 이실리프의 여인이었던 적도 있다.
그래도 이를 이용한 예가 없지는 않다. 결혼을 시키려는데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곳에 들어갔다.
물론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여인들은 많은 교육을 받는다. 인문, 철학, 예술은 물론이고 마법까지 배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일종의 여인들을 위한 아카데미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나서면 최하가 백작가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한다.
현재 헥사곤 근처엔 여러 교육 시설이 운영되고 있다. 헥사곤에 들기 위한 일종의 학원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실리프의 여인들은 헥사곤을 좋은 데 시집가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에 들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인스 대마법사님, 소인이 감히 마법사님의 출현을 소문내도 괜찮은지요?”
“대마법사라니?”
“아이고, 이실리프 마탑에서 오신 분인데 어찌 대마법사님이 아니십니까? 소인이 알아뵙지 못하고 건방지게 군 점이 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어느새 말이 돌았는지 용병들과 상단 인물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실리프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이다.
멀린은 이미 전설이 되어버렸다.
아르센 대륙의 어떤 마탑도 감히 멀린 아드리안이라는 이름 앞에 고개 숙이지 않을 곳이 없다.
차원이 다른 마법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멀린이 9써클 마스터로 공인된 것은 아드리안 공국을 방문하기 직전에 벌어진 사건 때문이다.
당시 아드리안 공국 국경 근처, 바세론 산맥의 끝부분엔 성질 고약한 드래곤 하나가 있었다.
이놈이 사람들에게 온갖 해악을 끼친다는 것을 알고 멀린이 나섰다.
드래곤은 사람으로 폴리모프한 상태에서는 도저히 당할 수 없자 본신으로 돌아가 멀린을 공격했다.
화염의 브레스를 뿜었지만 앱솔루트 배리어는 그것을 번번이 막아냈다. 반면 멀린은 강력한 라이트닝 퍼니쉬먼트로 놈을 죽였다. 이것은 9써클 궁극 마법이다.
성질 고약했던 드래곤은 한순간의 방심 때문에 한줌 재가 되어버렸다. 멀린 입장에서는 에이션트 급 고룡과 일대일로 붙어 마법으로 작살을 낸 것이다.
이 마법은 희대의 마법서 이실리프를 허가받지 않고 열려 했을 때 구현되는 바로 그것이다.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허락받지 않으면 자신의 마법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일 것이다.
어쨌거나 멀린이 궁극 마법으로 드래곤을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이들은 너무도 많다.
악룡 때문에 고생하던 윌리엄 백작가의 가주인 제세프 윌리엄 백작과 그의 휘하 기사 전부, 그리고 1,500명에 달하는 병사 모두가 목격자이다.
이 소문은 즉시 대륙 전체로 번져 나갔다.
유사 이래 드래곤 슬레이어는 딱 둘이다.
하나는 최연소 소드 마스터였던 라플로니안이다.
나중에 블랙 드래곤이 폴리모프하고 유희를 했을 때 이름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의 레어에 남겨진 비망록에 기록되어 있었기에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드래곤은 다른 드래곤을 죽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라플로니안이 다른 드래곤을 죽인 이유는 그 드래곤이 미쳤기 때문이다.
미친 드래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 데나 브레스를 뿜어냈다. 인간으로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미친 드래곤이 유희 중인 라플로니안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브레스를 뿜어냈다.
그 결과 유희 중에 사귀었던 인간 친구들이 모두 죽었다. 분노한 라플로니안이 검을 뽑아 들어 처단한 것이다.
어쨌거나 그 라플로니안을 제외하곤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이 역사책에 기록된 유일한 드래곤 슬레이어이다.
그런데 검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마법으로 마법 생물체를 죽인 것이다.
게다가 노쇠하여 죽음을 목전에 둔 드래곤을 죽인 것도 아니다. 성질 고약하고 팔팔한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 후작이 아드리안 공국의 개국시조로 추앙받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렇기에 그의 이름이 세상에 전파됨과 동시에 아드리안 공국의 지위는 즉시 한 단계 격상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시들해져 결국 남들의 공격을 받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는 아드리안 마탑과도 관계가 있다.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침입하여 마탑주를 암살했다.
7써클 마스터가 어쌔신에게 당한 것이다. 아울러 마탑의 7써클 마법서들이 모두 사라졌다.
아무튼 현재 아드리안 마탑주 대리를 맡고 있는 자는 간신히 6써클을 넘어선 유저 수준이다.
공국을 수호하는 힘이 급격히 쇠락한 것이다.
게다가 공국 기사단에도 괴사가 발생하였다.
공국엔 세 개의 기사단이 있는데 단장과 부단장이 전부 괴질에 걸렸다. 누군가의 소행이 분명하다.
하나 신관의 신성력으로도 괴질은 치유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스릴 광산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났다.
미스릴이라는 금속은 언데드 계열에 저항력을 발휘한다.
뿐만 아니라 마법 발현에 도움을 주며, 병장기의 강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킨다.
따라서 모든 국가가 탐내는 자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장 힘이 약해졌을 때 이것이 있다는 소문이 난 것이다.
결국 강력한 군사력을 키운 미판데 왕국과 쿠르스 왕국, 그리고 바다 건너 엘라이 왕국에서 이를 차지하기 위해 전격적인 침공을 시도한 것이다.
미스릴 광산의 위치는 공왕을 비롯한 두 명의 공작만이 알고 있다고 한다. 극비 중의 극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 세 왕국에서는 으르렁거리면서 협박만 할 뿐 아직 직접적인 군사 행위에 돌입하진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아드리안 공국으로부터 밖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을 막았다. 외부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다행히 아드리안 공국은 위로 제 앞가림하기에도 바쁜 카이엔 제국이 있다. 현재로선 공국을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상황이다.
좌측엔 자신들의 왕국이 있고, 동쪽과 남쪽은 바다이다.
세 나라는 연합하여 아드리안 공국의 고립 작전을 쓰는 중이다. 그런데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것이라 예견된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소득없는 침공이 각국의 재정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은 멀어서 아드리안 공국을 공격할 수 없다. 하나 미스릴은 탐이 난다.
그런데 세 나라가 그것을 차지하여 군사력을 발전시키면 그게 어디로 가겠는가?
자신들이 공격당할 수 있음을 알기에 주변국들은 세 나라를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자신이 가질 수 없으면 남도 가질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만일 아드리안 공국이 위기를 넘겨 미스릴 광산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
그러면 이번 공격에 참여했던 미판테 왕국과 쿠르스 왕국, 그리고 엘라이 왕국에게 검이 겨눠질 것이기 때문이다.
케이상단에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세 왕국은 곧 힘을 모을 것이다. 강력해진 힘을 지닌 공격이 시작되면 아드리안 공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견뎌낼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후 세 왕국은 공국의 영토를 삼등분하여 나눠 갖는 한편, 미스릴 광산의 위치를 찾아 공동 소유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한다.
현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도와야 할 아드리안 공국의 상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강력한 마법을 익히곤 있지만 7써클 마스터인 현재 세 나라의 병사 전부를 상대하기엔 버겁다.
‘에구, 미군 부대에 가서 핵무기라도 훔쳐 와야 하나?’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다 생각되었기에 현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일단 가봐야 알겠군. 미판테 왕국, 쿠르스 왕국, 그리고 엘라이 왕국이라고? 하는 짓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군.’
남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야욕을 채우려는 세 나라의 행태는 근세 유럽이 동남아 각국과 남미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던 것과 다를 바 없다.
대한제국의 역사도 그렇다.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등이 서로 차지하려고 각축전을 벌였다.
결국 일본에 먹혔고, 백성들은 죽을 고생을 했다.
현재의 아드리안 공국이 이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현수는 알론과 용병들의 반응을 보고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하여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