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아까 나의 출현을 소문내도 되겠느냐고 물었소?”
“네, 소인에게 그럴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좋네. 대신 조건이 있네.”
“말씀만 하십시오.”
“하인스 킴이라는 내 이름은 감춰주게. 그냥 이실리프의 마탑에서 아드리안 공국으로 가는 마법사들이 나타났다는 정도만 해주게.”
“네에? 그럼 마법사님 말고 다른 분들도 나오신 겁니까?”
“그렇다네. 아드리안 공국에서 이실리프 마탑에 구원을 요청했네. 하여 모든 전력이 출동하였지.”
“아, 네에.”
“소문을 내려거든 이렇게 내주게. 이실리프 마탑이 총출동하였으며 누구든 아드리안 공국에 위해를 가한다면 신의 징벌에 버금갈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네.”
“신의 징벌에 버금갈 재앙이요?”
알론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네. 아드리안 공국을 겁박하고 있는 세 나라에 소문이 퍼지도록 해주게. 만일 아드리안 공국을 공격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주춧돌 한 장 남기지 않고 모두 파괴될 것이며, 구족의 목숨으로도 그 빚을 갚지 못할 것이라고.”
“구족이라니요?”
알론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다.
“왕가는 물론이고 귀족가의 모든 인원까지 죽을 것이란 뜻이오. 또한 그 나라의 모든 국민은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오. 이는 이실리프 마탑주의 뜻이오.”
실로 엄청난 경고이다.
나라 전체를 말살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혀 허황되게 들리지 않는다. 이실리프 마탑이라면 그만한 능력을 지녔을 것이란 생각이 든 때문이다.
사실 멀린이 시전했던 라이트닝 퍼니쉬먼트 한 방이면 수만 군대도 한순간에 전멸할 수 있지 않던가!
“그건…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네들, 모두 들었지?”
“네, 저희들도 모두 똑똑히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대마법사님! 제게 영광을 주셔서. 하신 말씀 그대로 전달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군. 그나저나 행렬의 속도를 조금 높이는 게 어떻겠는가? 조금 답답하군.”
“아, 네에. 그러겠습니다.”
현수에게 깊숙이 허리 숙여 인사한 알론은 몸을 돌려 휘하 상인과 용병들에게 지시한다.
“이봐! 지금부터 속력을 높인다!”
“넷, 알겠습니다.”
용병 및 상인들이 흩어진 후 행렬의 속도가 빨라졌다.
그렇게 이틀을 갔다. 그간 오크가 서너 번, 고블린이 두 번 공격했지만 용병들의 힘만으로 간단히 물리쳤다.
그 과정에서 부상당한 자들이 있었다.
하나 알코올과 후시딘, 그리고 밴드로 대부분 해결되었다.
타박상엔 물파스, 또는 안티프라민을 썼다. 가끔 제놀을 쓰기도 했고, 신신파스와 제일파프도 썼다.
곪은 상처엔 이명래 고약이 최고였다. 효과 만점이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힐 마법이 병행되었다.
그러니 어찌 효과가 빠르지 않겠는가!
용병과 케이상단 사람들은 역시 이실리프 마탑 출신이라고 감탄했다.
그러고 보니 용병들은 정상인 사람이 드물었다. 어느 한구석씩 아픈 곳이 있었던 것이다.
현수는 미안했지만 침을 꺼내 들었다.
약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약은 많다. 하지만 아프다고 아무 약이나 꺼내줄 수는 없다. 부작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각종 영상 자료와 전문 서적을 통해 어떤 때, 어떻게 시침하는지는 안다. 하나 사람에게 침을 놔본 적은 없다.
하여 한참을 망설였다. 괜스레 연습 대상을 만드는 것 같아 미안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한국이라면 비염과 축농증이란 진단을 받았을 용병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늘 코맹맹이 소리를 낸다.
덩치는 큰데 목소리가 걸맞지 않아 놀림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그에게 침을 놨다.
침을 맞은 용병은 처음엔 두려워했다. 마법사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혹시 시험 대상이 되는 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길고 뾰족한 침으로 쑤시겠다고 하는데 겁먹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나 현수가 진심을 다해 시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부터는 아파도 참았고, 두려워도 견뎌냈다.
사실 현수는 돌팔이 침술사이다.
침을 놔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그렇다. 그런데 다행이다. 조금씩 차도가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일부러 마법은 쓰지 않았다. 침만으로도 병을 치료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진하던 어느 날, 용병의 리더가 행렬을 멈췄다. 앞에 오크 부락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작년엔 없던 놈들이라고 한다.
때문에 오던 길에 용병 둘이 목숨을 잃었다. 예상치 못한 느닷없는 공격이었고, 500마리나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방비를 하고 있었어도 용병 열 명의 힘으로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수라 역부족이다.
그런데 죽은 이들 가운데 하나가 용병단장이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동료들을 보호하려 했다.
나머지 하나는 단장의 친구이자 최고령 용병이다. 그 역시 동료들을 가족처럼 여기던 사람이다.
그 둘의 희생이 있었기에 정말 기적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안 그랬다면 전멸했을 것이다.
용병의 리더는 이런 상황이기에 잔뜩 긴장한 채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실리프 마탑 소속 마법사가 있기에 든든하기는 하다. 그래도 걱정스런 표정이다.
“저어, 하인스 대마법사님, 어떻게 할까요?”
“무엇을?”
“놈들은 우릴 보자마자 달려들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죠?”
“일단 상인들은 마차 안에 있도록 하게. 용병 가운데 발 빠른 자들을 내보내 오크들을 유인해 오면 내가 처리하지.”
“하실 수 있겠습니까? 500마리도 넘는데…….”
우려하는 용병을 보며 현수는 피식 웃음 지었다.
“잊었는가, 내가 이실리프의 마법사라는 걸?”
“……!”
“네, 알겠습니다. 가서 오크들을 유인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용병 여덟 가운데 발 빠른 셋이 오크 마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현수는 그들이 몰고 올 길목을 확인했다.
그리곤 상황을 가늠해 놓고 그에 알맞은 마법을 구상했다.
용병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처음부터 센 것을 시전하여야 할 것이다.
놈들이 몰려들 경우엔 5써클 마법 익스플로전, 또는 4써클 인페르노를 쓰면 될 것이다.
분산하여 달려들 경우엔 광범위 마법인 5써클 파이어 필드, 또는 6써클 마법 라이트닝 레인을 준비했다.
현수는 태연했지만 케이상단 상인들과 용병들은 잔뜩 긴장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우지직! 우당탕탕 !
용병 셋이 달려오고 있다. 그 뒤엔 당연히 500여 오크들이 기세등등하게 쫓아오고 있었다.
현수는 용병들이 안전지대로 진입할 때까지 기다렸다.
“마나의 힘이여, 화염의 불꽃이 되어 장벽을 펼쳐라! 파이어 필드!”
화르륵! 화르르륵!
“캐애액! 끄으윽! 캑캑! 끄아아아악!”
“마나의 힘이여, 바람을 일으켜 모든 것을 베어라! 멀티 윈드 블레이드(Multi Wind Blade)!”
이것은 멀린의 4써클 풍계 마법이다.
똑같은 4써클이지만 보통 마법사들이 펼치는 윈드 블레이드는 바람의 칼날이 하나뿐이다. 그런데 현수의 멀티 윈드 브레이드는 바람의 칼날이 무려 스물네 개이다.
요행히 불꽃의 장벽 안에 갇히지 않았던 오크들은 산 채로 절단되는 횡액을 당했다.
“취익! 인간을 공격… 캐애액!”
“끄아악!”
“마나의 힘이여, 바람을 일으켜 모든 것을 베어라. 멀티 윈드 블레이드! 멀티 윈드 블레이드! 멀티 윈드 블레이드!”
현수는 연속하여 마법을 구현시켰다.
만일을 대비하여 칼을 뽑아 든 채 대기하고 있던 용병들은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악전고투를 해도 이기기는커녕 놈들의 손아귀에서 도망칠까 말까 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전에 도주한 것도 사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따라서 마법사가 가세되긴 했지만 어쩌면 힘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경우 이곳에서 뼈를 묻는다고 생각했다.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다. 그냥 보통으로 아닌 게 아니다.
이건 살육이다. 아니, 일방적인 도륙이다.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이건 무자비한 학살이다.
불꽃에 갇혀 몸부림치던 놈들까지 바람의 칼날에 양분되어 피를 뿜어냈다. 어떤 놈은 몸 안에서 쏟아져 나온 장기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몸이 베어졌다.
500마리에 달하던 오크가 전멸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3분 30초쯤이다.
비릿한 혈향과 고기가 불에 타는 냄새가 뒤섞인 현장을 바라보는 알론은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상행을 다니면서 마법사들이 마법을 시전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중엔 5써클 마법사가 끼어 있는 적도 있다.
그런데 이 정도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실리프 마탑의 마법사이니 당연히 강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그런데 강해도 너무 강하다.
오크 500마리는 웬만한 병사 500명으로도 감당하지 못한다. 최소 견습기사 정도는 되어야 일대일로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오크이다. 아르센 대륙의 4써클 마법사라면 혼자서 열 마리 정도 해치우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500여 마리를 그야말로 순식간에 도륙을 냈다.
불이 꺼지고 보니 멀쩡히 죽은 놈은 하나도 없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 데굴데굴 구르다 익어서 죽었다.
어떤 놈은 원래 어느 부분이었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갈가리 찢긴 살덩이로 분리되어 있다.
생각해 보니 현수가 멀티 윈드 블레이드라는 마법을 구현시킬 땐 광기가 엿보일 정도로 눈빛을 번쩍였다.
알론은 자신이 하인스 대마법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저어… 하인스 대마법사님.”
“왜 부르는가?”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말을 마친 알론은 대답도 듣지 않고 후다닥 달려갔다.
“나, 참!”
현수는 알론의 뒷모습을 보고 피식 실소를 지었다.
이런 나날이 지나 드디어 올테른에 당도하였다.
올테른은 분명 강가에 있는 도시이다. 따라서 항구도시라는 이름은 조금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올테른을 항구도시라 한다. 그 이유는 여기서 배를 타면 바다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강이든 바다로 흘러든다. 따라서 배를 타면 바다까지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어폐가 있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올테른을 항구도시라 한다. 강폭이 너무 넓어 바다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현수와 케이상단이 항구도시 올테른에 당도한 것은 깊은 겨울이 되어서였다.
오는 내내 여러 몬스터의 공격을 받았다.
수십 차례이다. 그런데 용병들이 나섰던 적은 별로 없다. 현수의 마법 연습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많은 경험을 쌓았다.
이젠 아주 능숙하게 마법을 구현시킬 수 있게 되었고, 그때그때 가장 적합한 마법을 시전할 능력을 얻게 되었다.
몬스터의 종류에 따라 어떤 마법이 가장 강력한 효과를 내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절대 무리지어 다니지 않는다는 오우거 열 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한 적도 있다.
처음엔 아예 곤죽을 냈다. 그런데 알론이 말하길, 몬스터의 사체는 제법 짭짤한 돈벌이가 된다고 한다.
하여 나중엔 별다른 상처 없이 죽이는 마법으로 놈들을 상대했다. 이때 주로 사용된 마법이 쇼크 웨이브이다.
대상 마법인 이것의 구현 범위를 더욱 좁혀 몬스터의 뇌만 흔들어 죽인 것이다.
당연히 생채기 하나 없는 가죽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많은 몬스터의 가죽이 벗겨졌다. 물론 케이상단에서 그것 모두를 구입했다. 덕분에 현수의 주머니엔 적지 않은 금화와 은화가 짤랑이며 담겨 있다.
“마법사님, 여러모로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긴, 다 돈 되는 일인걸.”
올테른의 케이상단을 방문한 현수는 아공간에 담겨 있던 몬스터의 가죽 등을 꺼내 놓았다.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마차에 실으려면 최소 100여 대는 동원해야 할 정도이다.
모든 것을 꺼내놓자 기다렸다는 듯 알론이 공손히 아뢴다.
“마법사님, 이곳이 처음이신지라 마땅한 숙소가 없으실 테니 저희가 모시고 싶습니다.”
“말은 고맙네. 하나 난 일단 마탑과 연락을 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네. 그러니 나중에 보세.”
알론은 동행해 준 것만으로도 황송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네, 언제든 소인을 찾아주시면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말이라도 고맙네.”
“아이고, 무슨 말씀을…….”
“그렇다면 그럼 내가 다녀올 때까지 아드리안 공국으로 향할 배편을 알아봐 줬으면 좋겠네.”
“아,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가장 좋은 배편을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알론과 그 일행을 뒤로하고 걸어 나온 현수의 얼굴엔 웃음이 배어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아르센 대륙에 대해 상당히 많은 정보를 습득했다. 그러는 한편 몬스터들을 상대로 마법 연습을 실컷 했다. 그 결과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다.
금화만 1,000여 개이다.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약 11억 원이다. 현수가 잡은 엄청난 수효의 오우거, 트롤, 오크, 고블린, 와이번, 하피의 가죽과 부산물들의 대가이다.
『전능의 팔찌』 제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