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하긴 도사나 마법사나 크게 보면 다를 바 없다.
“도, 도사님!”
아니라고 해도 끝까지 도사라 부르기에 대답한 것이다.
“왜?”
“이거 저도 가르쳐 주십시오.”
털썩 무릎까지 꿇는다.
“……!”
현수는 내심 웃겼다. 하나 웃지는 않았다. 대신 조용히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그리곤 조용히 말했다.
“그냥 조용히 가라.”
“……!”
오광섭은 고개만 숙였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현수가 오광섭의 기억을 제거하지 않은 것엔 이유가 있다.
세상에 두려운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폭력을 쓰더라도 뒤탈을 고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빠야, 화장실 다녀온다면서 어딜 갔다 왔어요?”
“네? 아, 회사에 전화할 일이 생겨서 통화하고 왔어요.”
현수는 천연덕스럽게 둘러대고는 술잔을 비웠다. 이제 마음 놓고 놀 시간만 남은 때문이다.
하나 권지현은 현수의 말을 믿지 않았다. 밤 10시가 넘은 지 한참이기 때문이다. 하나 내색하지 않았다.
“오빠야, 아까 천지건설(주)에 다닌다고 했는데 정말이에요?”
“왜요? 안 믿어져요?”
“이런 데 오면 뻥치는 사람들이 많아서. 아차, 오빠야가 그렇다는 게 아니고.”
무슨 뜻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하나 그런 사내들로 오인받는 것은 사양이다. 그렇기에 현수는 지현의 말을 끊었다.
“천지건설(주) 다니는 거 맞아요. 그냥 믿으세요.”
“네에.”
지현은 현수의 한마디에 금방 다소곳해진다.
사실 현수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홍길동이 왔다 갔다. 현수가 어딜 갔는지 물어보러 온 것이다.
사내이기에 계산을 안 하고 도망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물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현은 길동에게 혹시 현수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러다 현수가 최고급 룸에 머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지건설(주)이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큰 회사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 일개 사원으로 하여금 출장지에서 최고급 룸에 머물도록 하지는 않는다.
뭔가 의심스러웠다. 그렇기에 물었던 것이다.
“춤추러 나가도 되죠?”
“그럼요. 같이 나가요.”
둘은 한바탕 흔들어 땀을 뺐다. 오랜만에 신난다는 느낌이기에 현수는 다른 이들의 시선은 생각지 않고 춤에만 몰두했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 룸으로 돌아온 현수는 샤워를 하고 캔 맥주 하나를 땄다. 물론 객실엔 혼자뿐이다.
헤어지기 전 권지현은 명함을 달라고 했다. 하나 주지 않았다. 주기 싫어서 안 준 것이 아니라 없어서였다.
그러자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알려줄 이유가 없어 망설였다. 오늘 하루만 보고 더 볼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달라고 졸라서 할 수 없이 가르쳐 주었다.
명함을 확인해 보니 대구지청장 비서실에 근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권력자 주변의 인물인 것이다.
이야길 들어보니 노혜미 같은 된장녀가 아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여자인 것이다.
그렇기에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리곤 헤어진 것이다.
“내일은 부산인가? 가서 일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나직이 중얼거리고는 이내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체크아웃을 하고 나서는데 노혜미가 보인다. 아주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한다.
최고급 룸에 머물다 나온 손님이니 그녀의 눈엔 현수가 멋진 사내로 보이는 까닭이다. 하나 그녀의 속내를 뻔히 알게 된 현수는 냉랭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터미널로 가서 부산행 고속버스를 탔다. 다행히 손님이 별로 없어 홀로 앉게 되었다.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현수의 이마가 좁혀져 있다.
금은방 순례가 마뜩치 않았기 때문이다.
금은방을 들를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한다.
금덩이가 비정형 괴의 형태를 한 때문인지 출처를 묻는다. 그리고 주민등록증을 요구한다. 도난품, 또는 불법적인 경로로 유통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고 한다.
현수는 자신의 자취가 남는 것이 싫었기에 매번 이미지 컨퓨징으로 자신의 모습을 모호하게 했다.
또한 메모리 일리머네이션으로 기억까지 삭제했다.
그런데 그게 매우 번거롭게 느껴진다.
“필요한 돈을 조달할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지 안 되겠어.”
아공간에는 금과 은, 그리고 각종 보석이 왕창 있다. 그런데 이를 처분할 방법이 현재와 같다면 너무 불편하다.
그렇기에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산은 대구보다 큰 도시이다. 그래서인지 쉽게 처분되었다.
그 결과 현수의 아공간엔 현금과 수표 약간이 섞여 11억 8천만 원이 조금 안 되는 돈이 들어 있다.
“흐음, 부산에 왔으니 해운대 구경이나 해볼까?”
오후 3시 경, 남은 금을 모두 처분한 현수는 택시를 탔다.
“아저씨, 해운대로 가주세요.”
“해운대 어데요?”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가주세요.”
“네, 알았심더.”
택시에서 내린 현수는 파도 철썩이는 바다로 향했다.
“우와, 바다! 이게 바다구나.”
생전 처음 보는 바다인 셈이다. 현수는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해변을 거닐었다.
그런데 연인들끼리 걷는 모습이 제법 보인다.
“으음!”
문득 강연희 대리를 떠올린 현수는 핸드폰을 꺼냈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스마트폰으로 바꾼 것이다.
김포에 있는 아버지 집이 1번으로 저장되어 있고, 2번은 강연희 대리의 번호이다.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받지 않는다.
“흐음, 지금 좀 바쁜가?”
한참 업무를 볼 시간이라 생각했기에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현수는 하릴없는 발걸음으로 해변을 거닐었다.
“오늘 하루 여기서 자고 올라갈까?”
어차피 회사에 복귀하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그리고 바다는 처음이다. 여름이 아니라 해수욕은 할 수 없지만 구경이라도 실컷 하고 싶다.
“에라, 모르겠다. 하루 자지, 뭐.”
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번듯한 호텔이 눈에 뜨인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객실 하나 주세요.”
“네, 어떤 룸으로 드릴까요?”
“흐음, 바다가 잘 보이는 방이면 좋겠는데, 있지요?”
“물론입니다, 손님. 그런데 혼자이신가요?”
“네, 그냥 바다만 잘 보이는 방이면 됩니다. 크지 않아도 되구요.”
“그럼 디럭스 룸은 어떠십니까?”
“객실 요금은 얼마죠?”
“47만 원입니다. 부가세는 별도구요.”
“좋군요. 그 방으로 주십시오.”
한번 해봐서인지 체크인이 별로 어색하지 않다.
배정 받은 룸으로 들어와 커튼을 완전히 열어젖히자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
바닷바람을 느끼고 싶어 창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들어온다.
“흐으음! 그래도 공기는 아르센 대륙이 훨씬 낫구나. 하긴,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문득 생각이 나 전능의 팔찌에 마나를 모았다. 팔찌가 보인다. 그런데 검은색이어야 할 보석은 여전히 회색이다.
“여긴 마나가 희박한 곳이라 했으니……. 쩝, 얼마나 오래 걸릴까? 빨리 모였으면 좋겠는데.”
매연과 분진 등으로 오염된 공기 속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사람은 맛없는 음식을 더 맛없게 느끼는 그런 원리이다.
현수는 룸에서 현금과 수표를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그리곤 룸을 나섰다. 사람인 이상 먹고는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호텔 내에 레스토랑이 있지만 바람을 쐬고 싶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녔다.
산책과 구경을 겸하면서 마음에 드는 식당을 찾기 위함이다. 그러다 접어든 곳은 해운대구 우동 900번지 일대이다.
“여긴……?”
말로만 듣던 홍등가이다. 다시 말해 집창촌이다.
현수는 화들짝 놀라 돌아 나갔다. 이런 골목에 발을 들여놓으면 여자들이 잡아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휴우! 다행이야. 금방 눈치채서.”
나직이 안도의 한숨을 쉴 때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아는 얼굴이 뛰어온다. 역전파 두목의 아들 오광섭이다.
“어라? 당신은……?”
“아! 도사님!”
“뭐야? 어떻게 여길……?”
“헉헉! 도사님, 도사님을 찾았습니다.”
“나를 찾아? 왜?”
보복을 하려는 것이었다면 조직원들을 데리고 왔을 것이다. 한데 오광섭 혼자이다. 게다가 전혀 공격하려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부하들이 있기는 하다. 그의 뒤에 네 명의 덩치가 멈춰 선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헉헉! 도사님, 염치없지만 도사님께 도움을 청하고자 조직원들을 풀었습니다.”
“……!”
“헉헉!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
현수는 다른 폭력 조직을 제압하는 데 일조를 해달라는 느낌을 받았기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날 뭐로 보고……?”
현수가 막 나무라려는 찰나, 오광섭의 말이 이어진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어젯밤 습격을 당했습니다.”
“……?”
“예전에 행동대장을 했던 놈인데 팔공회의 사주를 받아……. 도사님, 제발 제 아버지 좀 구해주십시오.”
“무슨 소리요?”
“이, 일단 차에 오르십시오. 오르시면 가는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사님! 야, 어서 차 가지고 와!”
“……?”
부하들에게 손짓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상당히 황망해한다.
분위기로 보아 오광섭의 말이 사실인 듯하다.
“이봐요, 난 의사가 아니라…….”
“네, 압니다. 하지만 도와주십시오. 도사님이 아니면 아무도 도울 수 없을 상태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현수의 말은 또 이어지지 못했다. 검은색 차 한 대가 스르르 와서 멈춰 섰기 때문이다.
딱깍!
“도사님!”
오광섭이 문을 연 채 애원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좋아, 애초의 목적은 해결했으니…….’
현수의 상념은 이어지지 못했다.
“이따가 다시 이곳에 모셔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승차해 주십시오, 도사님!”
“좋아요. 일단 가봅시다.”
현수가 승차하자 기다렸다는 듯 달리기 시작한다.
“아버진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아이고, 도사님, 말씀 낮추십시오. 그리고 아버진 현재 대학병원에 입원해 계십니다.”
“대학병원? 하면, 어떤 상태이십니까?”
“아버진 현재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사들이 손을 놓았습니다.”
“의사들이 손을 놓았는데 왜 날……?”
“도사님이시지 않습니까? 제발, 제발 우리 아버지 좀 살려주십시오. 네?”
“도사라 하여 사람들의 질병을 모두 치유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냥 한 번만, 한 번만 살펴봐 주십시오. 아버질 이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도사님!”
말을 하는 오광섭의 부리부리한 두 눈엔 습기가 가득하다. 아까부터 울고 있었는데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진 제게 그냥 단순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어머니 역할까지 해주신 분입니다. 제가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손가락질할 수 있다면서 손도 씻으셨습니다.”
“……!”
현수는 대꾸 대신 듣고만 있었다. 그러는 동안 자동차는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다. 계기판을 흘깃 바라보니 시속 150㎞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급하긴 엄청 급한 모양이다.
현수가 병실에 도착한 것은 부산을 떠난 지 한 시간 반도 되지 않았을 때이다.
4장 무면허 의료 행위
“도사님, 이분이 저희 아버지이십니다.”
중환자실은 원칙으로 보호자 한 명만 드나들 수 있도록 한다. 하나 오광섭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안다는 듯 별다른 제지가 없어 바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의사들이 뇌사 상태인 것 같다고 했다고요?”
“네. 의사들끼리 대화하는 걸 언뜻 들었는데 분명 브레인 데스라고 했습니다.”
Brain Death는 오광섭의 말대로 뇌사(腦死)를 의미한다.
외상과 같은 심각한 사고를 당해 뇌간을 포함한 전반적인 뇌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이다.
오는 동안 듣기로 교도소 복역을 마치고 나온 예전의 부하를 만났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오대준은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부하를 위로했다.
그런데 둘만이 할 이야기가 있다 하기에 무슨 중요한 일인가 싶어 그렇게 했다고 한다. 둘만 남게 되자 귓속말을 하려던 옛 부하는 품속의 회칼을 꺼내 오대준을 찔렀다.
창자 깊숙한 곳까지 상처를 입은 오대준이 바닥에 쓰러지자 앉아 있던 의자로 머리를 내려쳤다.
그 결과 뇌사 직전인 것이다.
응급실로 실려 온 직후 칼에 찔린 상처는 수술을 받았지만 두개골 골절은 아직 손을 대지 못했다.
자칫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는 MRI와 CT 촬영 자료를 바탕으로 의사들끼리 논의하는 중이라고 한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현수는 오광섭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하나뿐인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효심을 읽을 수 있었다.
오대준은 과거엔 깡패였지만 현재는 손을 씻은 상태이고, 부하들이 자력갱생할 수 있도록 밑바탕이 되고 보호막이 되려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