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하여 웃기지 말라는 생각을 했다.
외할아버지를 담당하는 의사를 찾아가 솔직하게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3개월쯤 남았을 것이라 한다.
또 눈물이 났다. 그렇게 한참을 슬피 울었다.
그러다 문득 현수 생각이 났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 했다. 하여 오광섭에게 재차 전화를 걸었다.
오광섭은 현수를 거의 신처럼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 역시 서울 소재 이류 대학 출신이다. 그것도 공학 계열이다.
따라서 21세기에 도사님을 운운할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런 그가 현수를 그처럼 생각한다 하니 무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청장 비서실 직원들이 위로 전화를 했다.
그러던 중 요즘 대구에 이상한 소문이 떠돈다고 한다.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있던 환자의 보호자로부터 시작된 듯한 소문인데, 누군가 오대준을 치료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대학병원에 재직 중인 의사가 아니라고 한다.
그 사람은 현재 오대준을 치료해 준 젊은 남자를 찾느라 산지사방을 돌아다닌다고 한다. 자기 아내 역시 뇌사 상태인데 그를 만나면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란다.
이 대목을 듣고 지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21세기라 하지만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공기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기원은 어느 과학자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도사가 없으란 법도 없다. 너무도 드물기에 만나거나 볼 수 없는 것뿐일 수도 있다.
지현은 가장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화장까지 했다. 그리곤 현수의 회사에서 가까운 워커힐 호텔로 향했다.
그리곤 전화한 것이다.
“오빠야, 우리 할아버지도 치료해 주세요. 네?”
오광섭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온 것이 분명하다. 현수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내내 시선을 마주치고 애원의 눈빛을 보낸다.
가족 중 누군가가 목숨을 잃어가고 있다는데도 현수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참, 예쁘구나!’
김태희처럼 예쁜 아가씨가 슬픈 눈빛을 하고 있는데 너무나 섹시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이때 지현이 다시 한 번 애원의 눈빛을 쏜다.
“도와주실 거죠? 네?”
‘아차…!’
문득 제 정신을 찾은 현수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족의 생사 문제가 거론되는 마당이었던 것이다. 하여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아아, 고마워요.”
어느새 지현의 맑은 눈엔 눈물 한 방울이 맺혀 있다.
“제 차로 갑시다.”
“네, 고마워요.”
차를 타고 삼성병원까지 이동하는 동안 지현은 고맙다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얼마나 외할아버지를 좋아하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여기예요.”
현수는 생전처음 종합병원 특실이란 곳을 구경하는 것이다. 이건 특급호텔의 객실과 다를 바 없다. 침대 대신 병상이 있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병상이 엄청나게 비싸 보인다.
병상엔 앙상하게 마른 노인 하나가 누워 있다.
“진통제 맞고 잠드셨나 봐요.”
“네에.”
“살펴봐 주세요.”
“그러지요. 지현 씬 잠깐 밖에 나가 계세요. 방해받으면 안 되니까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주고요.”
“네에, 그럴게요. 그럼 잘 부탁드려요.”
상냥한데다가 말도 참 잘 듣는다.
지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곤 얼른 밖으로 향했다.
현수는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나무랄 데가 없는 몸매임에도 그건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할아버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효성스런 손녀의 뒷모습만 보였을 뿐이다. 문이 닫히자 그제야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눈에 익은 모습이다.
‘이분, 어디서 뵌 분인데 누구시지? 흐음, 분명 어디선가 뵌 분인데……. 어쨌거나 한번 살펴나 보자.’
“마나여, 움직임을 나타내라. 마나 디텍션.”
두 손을 뻗어 간이 있는 부위를 검색해 보았다. 마나의 양도 적은데 움직임까지 거의 멈춰 있다. 천천히 움직여 보니 한쪽엔 마나가 뭉친 채 꼼짝도 못하는 모습니다.
“간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까지 전이가 된 듯한데, 내가 이걸 고칠 수 있을까?”
나직이 중얼거리는 동안에도 현수의 신중한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노인의 몸 전체를 스캔하다시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과 장, 그리고 척추까지 전이되었나 보네. 석 달 남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군. 어쩌지? 한 번엔 힘들겠는데.”
현수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흐음, 일단 간부터 손을 보자.”
두 손에 마나를 모았다. 그리곤 나직이 중얼거렸다.
“컴플리트 힐.”
황금빛 마나 줄기가 간이 있는 부위로 스며든다. 그런 상태로 대략 5분을 버텼다. 간에서 시작하여 소장과 대장, 그리고 척추까지 치료 효과가 있는 마나가 스며들도록 한 것이다.
현수는 한국으로 귀환한 후 마법을 시전할 때마다 체내에 모아둔 마나를 사용했다.
대기 중 마나량이 너무 적은 때문이다.
“휴우! 조금 어지럽군.”
이제 마나량이 고갈되어 가는 듯한 느낌이다. 하여 의자에 앉아 측정해 보았다. 예상대로 10%도 채 남지 않은 상태이다.
“으으음!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해. 하지만 일단 치료가 먼저야.”
자리에서 일어난 현수는 다시금 마나를 모았다.
그리곤 나직이 소리쳤다.
“마나여, 원상으로 회복시켜라! 리커버리!”
서늘한 푸른빛 마나 줄기들이 현수의 손끝에서 뿜어져 노인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이제 체내 마나량은 5% 정도 남았을 뿐이다.
치료를 마치고 마나를 얻을 방법을 고심하던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을 권지현을 떠올린 것이다.
문을 열어주니 단박에 달려든다.
“현수 씨! 할아버지는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다만 간으로부터 시작하여 소장과 대장, 그리고 척추까지 암이 전이된 상태라…….”
이곳에 오기 전 현수에겐 간암이라는 말만 했다.
하나 지현은 알고 있었다, 신체의 다른 곳까지 암세포가 전이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의사들이 손을 놓은 것이다.
그런데 현수는 말하지 않은 것까지 언급하고 있다. 새삼 신뢰가 간다.
“고마워요. 흐흑! 정말 고마워요.”
“고마워하긴 이르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조치는 취했지만 병이 낫는다는 보장은 없어요. 다만 조금 더 생명이 연장되기는 할 거예요. 큰 기대는 마세요.”
“아무튼 고마워요.”
지현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표시를 했다.
집으로 돌아온 현수는 이실리프 마법서를 펼쳤다. 그리곤 아공간을 뒤져 스테린리스판을 꺼냈다. 가로 세로 모두 1m 정도 되는 것이다.
이것엔 마나 집적진이 그려질 것이다.
마법서를 보면 마나 집적진의 효율을 너무 많이 올리면 중간계의 조율자인 드래곤의 쓸데없는 관심을 받게 되니 효율 30% 이하가 되도록 하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지구에선 마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
드래곤도 당연히 없다. 그렇기에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효율 100%짜리 집적진을 그렸다.
이 진이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마나석을 꺼내 박았다. 전처럼 오토 리차지 역시 적용된다.
각종 공구를 꺼내 모든 일을 마친 시각은 새벽 2시 30분이다. 시험 삼아 한 시간 정도 안에 들어가 마나심법을 운용했다. 효율 100%임에도 아르센 대륙에서 1초 만에 얻을 마나량을 얻는 데 10분은 걸리는 것 같다.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면 지구의 마나량과 아르센 대륙의 마나량 차이는 대략 1대 600쯤 된다는 뜻이다.
“이런 제길!”
필요한 양의 마나를 얻으려면 또다시 결계 속에 들어가 고독한 시간을 보내야 함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문득 떠오르는 상념이 있었다.
“이실리프여, 열려라!”
스르르르릉∼!
“어디 보자. 흐으음, 회복 포션 제조 비법이라……. 음, 주원료로 트롤의 피를 쓰는 이유가 원상회복 기능이 탁월해서라고? 그래, 그러니 상처를 쉽게 회복시키겠지.”
이실리프 마법서를 막 덮으려던 순간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구절이 보인다.
“어라! 이건 뭐지? 마나 포션 제조 비법? 마나량이 부족할 때 신속히 공급해 준다고? 주원료가 만드라고라라고?”
내용을 다 읽은 현수는 허탈한 기분이 들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만드라고라라는 이계의 식물만 있으면 지금처럼 마나가 부족할 때 이를 공급해 줄 포션을 제조할 수 있다.
그런데 주원료가 없다. 한때 상당히 많이 있었다.
알베제 마을을 떠나 올테른으로 향하는 중간 만드라고라 서식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 상당히 많은 양을 수확하여 아공간에 보관했다.
그런데 케이상단에 몬스터 가죽 등을 꺼내주면서 그것까지 모두 준 것이다.
“에이, 이런 줄 알았으면……. 흐음, 이래서 경험이 중요하다는 거군. 아쉽지만 할 수 없지.”
현수는 입맛이 씁쓸했다. 하나 어쩌겠는가!
“일단 회복 포션부터 만들어보자.”
아공간에는 트롤 두 마리로부터 얻은 피가 있다. 이것들을 정제하면 대략 50∼100여 병 정도가 만들어진다.
정제 솜씨가 얼마나 좋으냐에 따른 것이다.
이실리프에 기록된 것들을 보니 정제 기구는 마법사들이 쓰던 것보다 현대의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하여 현수는 필요한 기구들의 목록부터 꼼꼼히 작성했다. 그리곤 서둘러 차를 몰고 각종 실험 기구 등을 다루는 곳으로 향했다.
금 팔러 가던 종로 3가에 이런 가게들이 밀집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현수는 먼저 금화 열 개를 처분했다.
그리곤 곧장 비커, 플라스크, 피펫, 디스펜서, 알코올램프, 클램프, 클립, 플레임 등을 구매했다.
원심분리기와 교반기(액체와 액체, 액체와 고체, 또는 분체 등을 휘저어 섞기 위한 기구) 등도 구입했다.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밤늦은 시각이었다.
“현수냐, 밥은 먹고 다니니?”
“네, 어머니!”
“근데 그건 다 뭐니?”
“네, 회사에서 출장 갈 때 가져가야 하는 거라 사왔어요. 지하실에 넣을 거예요.”
“그러니? 우린 먼저 잔다. 자기 전에 꼭 이빨 닦고 자라.”
“네, 걱정 마세요. 근데 아버지는요?”
“먼저 다니던 공방 옆에 있던 추씨네 공방 혹시 아니?”
“네, 추씨 아저씨라면 아버지더러 자기네 공방으로 오라던 사람 아니에요?”
“그래, 그 추씨가 소일 삼아 집에서 작업하라고 했단다.”
“아, 그래요?”
“그래서 기분이 좋아 약주 한잔 자시고 주무신다.”
“정말 잘되었네요.”
“그래. 모든 게 술술 풀리는 기분이라 너무 좋다. 이 모든 게 네 덕인 듯하다.”
“아이고, 아니에요. 하여간 먼저 쉬세요. 전 작업 좀 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그래, 배고프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어라.”
“네, 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니가 들어가신 후 현수는 각종 기구들을 배치했다. 그리곤 이실리프의 마법서를 펼쳐 놓고 회복 포션 제조에 돌입했다.
아침 7시, 현수는 120병의 회복 포션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현대 기구들 덕에 최상의 정제 작업을 할 수 있어 손실율이 제로에 가까웠기에 얻은 결과이다.
작업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현수는 권지현의 외조부가 누구인지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대전에서 금화를 처분한 날 자그마한 여관에 투숙했었다.
그날 캔 맥주를 홀짝이면서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는데 어떤 독립운동가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그때 방송에 나와 자신의 일생을 회고한 노인이 있었다.
1935년에 불과 15살의 나이였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2학년인데 그때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 당했다.
하지만 탈출하여 광복군에 몸담았다고 한다.
이후 각종 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 공을 인정받아 광복 후 다섯 개의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광복 후에는 변호사가 되어 힘없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들을 위해 무료 변론을 맡아 했다고 한다.
현재에도 독립운동가에게 주어지는 보훈연금 전액을 부하의 유족들을 돕는 데 쓰고 있다고 했다.
이런 노영웅이 병마와의 싸움에 져서 진통제가 없으면 잠잘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기에 밤잠 안 자고 정성을 기울여 포션 제조에 몰두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난 후 잠깐 눈을 붙였다. 그리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곤 차를 몰고 나섰다.
현수가 병원에 당도한 것은 12시 30분쯤 되었을 때이다.
“오셨어요?”
“네, 좀 어떠십니까?”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권지현은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를 했다.
오늘 아침 할아버지로부터 모처럼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지현은 뛸 듯이 기뻤다.
현수가 부린 조화 덕분에 몸이 좋아진 것이 분명하다.
오랜만에 미소 짓는 할아버지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현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어제의 치료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듯하니 잠시 후 방문하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