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그렇기에 밥도 안 먹고 현수가 당도하길 기다렸다.
“할아버지, 제가 잘 아는 분인데요, 어제 주무실 때 치료를 해주었어요. 그래서 잠을 잘 주무실 수 있었던 거예요.”
“아, 그래? 젊은이, 고맙네.”
텔레비전에 방송된 것이 언제 녹화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노인은 몹시 쇠약한 모습이다.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한 건 별로 없습니다. 그냥 한번 살펴봐 드린 것뿐입니다.”
“아니네. 내 몸은 내가 잘 알지. 아침에 자고 있어났더니 몸이 전과 다르게 아주 가뿐했네. 통증도 별로 느껴지지 않고.”
“네에, 그러셨군요. 다행입니다.”
“고맙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나저나 몸을 한 번 더 살펴보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그럼 그러게.”
노인이 몸을 눕히자 현수가 입을 열었다.
“지현 씨!”
“알았어요. 밖에 나가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할게요. 대신 우리 할아버지 잘 부탁드려요,”
지현이 나가고 난 뒤 현수는 잠시 눈을 감고 마나를 두 손에 모았다. 그리곤 병상의 노인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마법을 영창했다.
“마나여, 움직임을 나타내라. 마나 디텍션!”
어제와 달리 간에도 적당량의 마나가 움직이고 있다.
소장과 대장, 그리고 척추의 마나 움직임도 정체되거나 꼬이지 않고 그런대로 천천히 움직인다.
“흐음, 많이 좋아지셨네요.”
“그런가? 고맙네.”
노인은 현수가 그저 두 손을 내밀어 자신의 몸 위를 쓰다듬듯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손이 움직일 때마다 그 부위가 시원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과학적으로 입증되진 않았지만 효과만큼은 있다고 알려진 기 치료를 하는가 보다 했다.
“할아버지, 처음 뵈었지만 저를 믿으실 수 있는지요?”
“믿네. 난 젊은이를 믿네.”
“고맙습니다. 이건 제가 만든 치료 보조제입니다. 먼저 한 병을 들이켜십시오.”
“알겠네.”
노인은 두말 않고 현수가 내민 회복 포션을 들이켰다.
“그리고 이것들은 하루에 하나씩 드십시오. 더 드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 병원의 의료진들에겐 결코 보여줘서는 안 되는 겁니다.”
“알겠네. 젊은이 말대로 하지.”
“네,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무슨 말을……. 오히려 이 늙은이가 젊은이에게 더 고맙네.”
“네에. 얼른 쾌차하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고맙네.”
잠시 후 권지현이 들어왔다. 그녀는 현수로부터 단단한 주의를 들었다. 그리곤 아홉 병의 포션을 소중히 간직했다.
조금 전 병실에 들어섰을 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윽한 향기를 맡았다. 아마도 병 속의 물질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할아버지를 암이라는 질병으로부터 구해줄 절세 영약이라 생각하였다. 그렇기에 신주단지 모시듯 소중히 보관한 것이다.
“더 봐드리고 싶은데 회사로부터 해외 지사에 발령을 받아 다음 주 수요일에 출국해야 합니다.”
“……!”
“별일없는 한 출국 전까지 한 번 더 방문해서 봐드리고 싶은데 괜찮지요?”
“물론이에요. 출국 준비를 하려면 바쁘실 텐데 일부러 시간 내서 와주신다니 저야 더 고맙죠.”
“그래요, 그럼. 자, 그럼 오늘은 이만 가겠습니다.”
“네에, 고마웠어요.”
“어르신, 편한 마음으로 계세요. 또 뵙겠습니다.”
“젊은이, 고맙네.”
병실을 나선 현수는 과연 회복 포션으로 효과가 있을지 궁금했다. 그때 스치는 글귀가 있었다.
삼국지의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란 말로부터 기인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글귀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어떤 일이든지 노력하여 최선을 다한 뒤에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일을 성실히 하지 않고 요행을 바라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강조하는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 이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두고 봐야지.”
현수가 우미내 마을 입구로 좌회전하였을 때 눈에 익은 사람이 보인다.
“어! 안녕하세요?”
“아, 세입자 총각이네. 어디 갔다 오는가?”
집주인이 반갑다는 표정을 짓는다. 집을 내놓았는데 한동안 나가지 않아 애를 끓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계약과 동시에 잔금까지 다 치러주는 덕에 마음고생을 덜 수 있었다.
그렇기에 현수를 반가운 표정으로 보는 것이다.
“네에, 여긴 어쩐 일로……?”
“아, 여기 부동산 아줌마가 암에 좋다는 약을 준다고 해서……. 거 뭐더라? 맞아. 차가버섯 달인 물을 준다고 해서 왔네.”
“아! 그러시군요. 참 제가 이런 거 여쭤봐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사모님이 소세포 폐암이라고 하셨죠?”
“휴우! 그렇다네. 평생 담배라곤 한 가치도 피우지 않았는데……. 휴우, 어쩌면 젊었을 때 내가 피운 담배 때문인지도 모르지.”
집주인의 얼굴엔 자책하는 빛이 가득했다.
“병원엔 다니시죠?”
“아닐세. 항암 치료를 마쳐서 퇴원했네.”
“그렇군요. 근데 제게도 암에 좋은 약이 조금 있는데 드려볼까요?”
“암에 좋은 약?”
“네, 장담하진 못하지만 암에 좋다는 약이 있어요.”
“어, 얼만가? 내가 사겠네.”
암에 좋다고만 하면 모조리 사들이는 모양이다.
“근데 제가 사모님을 한번 뵈어도 될까요?”
“자네가? 회사원이라면서?”
천지건설(주) 자재과 직원이라면서 무슨 뜻이냐는 것이다. 현수는 할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제게 약을 준 사람이 말하길, 암에 걸린 사람에게 이 약을 복용시키면 효과가 있을 거라고 했어요. 하지만 눈에 황달이 온 사람에겐 복용시키지 말라고 했거든요.”
순간적으로 둘러댄 말이다.
“혹시 사모님 눈에 황달이 왔나요?”
“황달이라면 노랗게 되는 걸 말하는 거지?”
“네. 근데 그 정도를 제가 봐야 해서…….”
“가세. 내 차를 따라오게.”
“네……? 아, 네에.”
집주인이 차를 몰고 구리시 쪽으로 좌회전해 나갔다. 현수 역시 그 차의 뒤를 따랐다.
현수가 지구에는 없는 귀하디귀한 회복 포션을 집주인에게 주려는 것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계약할 때에도 느꼈지만 부부애가 대단하다. 부인이 죽으면 따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할 정도였던 것이다.
인상을 보아하니 인품이 후덕한 듯싶다. 다시 말해, 남의 등이나 치면서 한 세상을 살아온 인물 같지는 않다.
그렇기에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둘째는 회복 포션의 효과를 조금 더 알고 싶다. 권지현의 외조부에게 열 병을 건네주었지만 그것이 얼마만큼 효과를 내는지는 두고 봐야 한다.
그렇기에 구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흔쾌히 써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마누라! 나 왔어!”
“네에, 몸도 성치 않은데 어딜 그렇게 다녀요?”
힘없는 목소리이지만 남편에 대한 걱정이 묻어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는 동안 보니 집주인은 현재 몸살이 난 상태이다. 그럼에도 마누라 몸에 좋다는 약을 준다고 하자 얼른 달려나갔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누구신지……?”
“이 청년이 우미내에 있는 우리 집 전세로 들어온 사람이야.”
“아, 네에. 어서 오세요.”
60살쯤 된 노부인의 안내로 소파에 앉은 현수는 부인의 얼굴부터 살폈다.
병마에 시달린 때문인지 약간 그늘져 보인다.
“이 청년에게 좋은 약이 있다는데 당신이 그 약을 먹을 수 있는지 여부를 봐야 한다고 해서 데리고 왔어.”
“그래요?”
지금껏 이런 경우가 꽤 있었는지 부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제가 잠시 몸의 상태를 살펴보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럽시다.”
“그러려면 누우셔야 하는데…….”
“그럼 침대로 가면 되지. 마누라, 어서 일어나.”
“네에.”
남편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침대로 갔다.
“주인어른, 시원한 물 한 잔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게.”
집주인이 방을 나서는 것을 확인한 현수는 부인으로 하여금 눕도록 했다. 그리곤 마나 디텍션으로 스캔했다.
과연 폐 쪽의 마나 움직임이 상당히 정체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임파선 부위도 좋지 않다. 전이된 듯하다.
7장 형수님은 제가 책임집니다
“여기 물 떠왔네.”
“네에, 고맙습니다. 사모님, 이거 마시세요.”
현수가 포션을 건네자 부인은 두말 없이 받아 마셨다.
“물로 입가심을 하세요.”
“고마워요.”
다시 소파로 돌아온 현수는 집주인이 손수 타온 커피 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드신 것과 같은 것을 아홉 병 더 드리고 가겠습니다. 매일 한 병씩 드시면 효과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고맙네. 귀한 물건인 것 같은데…….”
“귀한 물건 맞습니다. 그러니 꼭 복용하세요.”
집주인은 약값이 얼마냐면서 사례를 하겠다고 했다. 하나 현수는 사양했다. 돈을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집주인은 현수의 차까지 배웅을 나왔다.
병을 땄을 때 집 안 가득 풍긴 그윽한 향기로 미루어 짐작컨대 진짜 귀한 물건을 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으로 들어온 현수는 마나 집적진 위에 앉아 마나심법을 운용했다. 매우 적은 양이기는 하지만 마나가 조금씩 쌓였기에 식사하고 잠자는 시간을 빼곤 모조리 그것에 몰두했다.
2013년 1월 24일 목요일.
“오빠야! 여기예요.”
“아, 지현 씨! 할아버진 좀 어떠세요?”
“아마 말씀드려도 못 믿으실 걸요? 호호, 우리 할아버지 뵈러 어서 올라가요.”
병원 로비에서 기다리던 지현은 스스럼없이 팔짱을 끼고는 앞장섰다.
“어서 오게.”
“아, 어르신! 안녕하세요? 몸은 좀 어떠십니까?”
“고맙네. 다 자네 덕이네.”
지현의 외조부는 불과 며칠 만에 거의 정상인이 다 되어 있었다.
“어제 CT를 다시 찍었어요. 그런데 그걸 보고 의사 선생님들이 뭐라고 한 줄 아세요?”
“뭐라고 합니까?”
“암세포가 눈에 뜨이게 줄어들었대요.”
“그래요?”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라 잔뜩 긴장했던 현수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네에, 이게 다 현수 씨 덕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아닙니다. 제가 뭘 했다고. 그나저나 암세포가 얼마나 줄어들었다고 합니까?”
“전에 비해 거의 절반 정도로 줄었대요. 이런 일은 본 적도 없다면서 몹시 흥분했어요.”
“아, 정말 다행입니다.”
“고맙네, 젊은이. 자네 덕에 내가 요즘 아프지도 않고 참 편하다네. 이 정도면 정말 살맛 나겠어.”
“네에, 어르신. 오래오래 사셔야죠. 그래서 여기 있는 지현 씨 시집가는 것도 보시고, 증손자도 보셔야죠. 또 그 녀석이 장가가는 것까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끼, 이 사람아! 그러려면 내가 몇 살까지 살아야 하는지 알아?”
역정을 내는 듯하지만 얼굴엔 환한 웃음이 배어 있다. 현수가 말한 것이 희망사항이기 때문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가 시집을 가고, 그래서 태어난 아이가 다시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 할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현수는 짐짓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네, 한 150살까지 사시면 됩니다.”
“어머나! 호호! 호호호호!”
권지현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교소를 터뜨린다. 그런데 참 예쁘다. 하여 시선을 주고 있는데 노인이 입을 연다.
“근데 말이네, 자네가 준 그 약 말이야.”
“네, 어르신. 무슨 부작용이라도 있었나요?”
“아니, 그런 건 없고, 그거 뭐로 만든 건가? 냄새도 좋고 몸에도 아주 좋은 것 같네.”
“그러셨어요? 그런데 그건 왜 묻습니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병에 걸려 오늘내일하는 이들이 좀 있거든. 돈 주고 살 수 있는 거라면 내 돈 주고 사서라도 주고 싶어서 그러네.”
“으음! 그런데 어쩌죠? 그건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겁니다. 원재료를 구하는 데 너무 어려워서…….”
현수는 얼른 권지현에게 눈짓을 했다. 무슨 뜻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할아버지, 그건 현수 씨가 어렵게 구한 원료로 만든 거라고 했어요. 다시는 만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했단 말이에요.”
“아, 그런가?”
노인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제가 한 번 더 살펴보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되고말고.”
노인이 침대에 눕자 지현은 말하지 않았는데도 문밖으로 향한다. 현수는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했다.
예쁜데다 똑똑하다. 게다가 조신하고 상냥하기까지 하다.
집안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고, 흠결없는 법조인의 딸이다.
그러나 그게 끝이다. 현수의 마음속엔 강연희 대리가 화인처럼 새겨져 있기에 현재로선 지현이 있을 자리가 없다.
문 닫히는 소리를 들은 현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나여, 움직임을 나타내라. 마나 디텍션!”
현수의 손끌을 떠난 마나 줄기들은 노인의 장기들을 샅샅이 뒤지며 상태를 알려줬다.
‘으음, 확실히 좋아졌구나. 회복 포션이 제 역할을 하는 모양이군. 간은 좋아졌고, 소장과 대장은? 흐음, 좋아! 이번엔 척추를 보자. 좋아, 이곳도 좋아졌구나. 정말 다행이야.’